〈 10화 〉 달리지 못하는 소년(5).
* * *
“그래서? 뭐하고 왔어?”
애쉬에게 보고 비슷한 것을 했다.
정조대도 안 차고 바깥에서 돌아다녔는데, 무얼 하고 다녔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리오스 남작을 만났고 신속의 룬 위치정보를 알아냈다.
그 외에는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할 시간조차 없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애쉬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올라온 건지 모를 애쉬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우리 강아지, 나를 위해서 알아온 거야? 착하네?”
나는 애쉬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멋대로 쳐냈다가 무슨 말을 듣게 될지 모르기에, 얌전히 순응했다.
사악. 사악.
내 반응이 퍽이나 마음에 드는 건지, 애쉬는 계속해서 나를 만져댔다.
머리에서 얼굴로, 얼굴에서 허리로….
심심한 손을 달래주려는 듯 마구 주물럭거렸다.
“읏….”
자지가 발기하려 해서 아프다.
있는 힘껏 마인드 컨트롤에 집중했다.
“맛있게 드십쇼.”
발기를 참는 동안, 여관주인이 저녁 식사를 내왔다.
저녁 식사라고 해봐야 근사한 코스 요리가 아니다.
재료가 무엇인지 모를 만큼 대강 끓인 스프에 딱딱한 빵, 구웠지만 질긴 고기 덩이가 전부였다.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 정도도 감지덕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적당히 짜고 달고 매콤한 맛은 내 미각에게 있어 아주 소중한 것이었다.
애쉬는 저질 스프를 자연스럽게 퍼먹기 시작했다.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가 거리낌 없이 잘도 먹는구나.
“먹자. 내일 신속의 룬 찾으러 가려면, 배라도 채워야지.”
“넵, 용사님!”
린 또한 마찬가지.
잡탕에 가까운 스프를 보며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게걸스레 먹어치웠다.
린의 그릇은 순식간에 바닥을 보였다.
짧은 저녁 식사가 끝이 났다.
애쉬는 모두에게 자유 시간을 주었다.
물론, 린과 빈센트 할아범에게만 해당하는 얘기였다.
나에게는 휴식다운 휴식이 없었다.
“이리와, 강아지.”
애쉬에 의해 다시금 착용하게 된 개목걸이.
목줄은 여전히 애쉬의 손에 쥐여져 있다.
애쉬는 목줄을 쥐고 여관 밖으로 나를 이끌었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 해졌는데, 뭘 하려고 나온 것일까.
“산책할 거야.”
애쉬가 당당하게 나오니까, 도리어 할 말이 없어졌다.
그렇게 납득 못할 명분도 아니라서, 나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애쉬를 따랐다.
애쉬는 점점 으슥한 골목으로 향했다.
인적이 드물다 못해 증발한 것 같은 분위기가 풀풀 풍겼다.
내 곁에 애쉬가 없었다면, 나는 절대로 이 골목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쯤 아닌가?”
아까부터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인지, 이리저리 둘러보며 걷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포기해버렸다.
“어우, 못 찾겠다.”
애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골목에서 빠져나갔다.
자연스럽게 나도 불쾌한 골목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꺼림칙한 골목에서, 대로라 칭하기에 약간 부족한 길로 나왔을 때.
험악한 남자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큭큭큭큭, 니들 뭐하는 새끼들이냐?”
“이야, 여자한테 질질 끌려 다니면서 그러고 살아? 병신 새끼.”
“이 시간에 바깥에서 이러고 있는 건 혼쭐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는 건가?”
도시라고는 해도 완벽한 치안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이곳은 판타지 이세카이.
여자 하나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되는 건 비교적 흔한 일이다.
그러나, 두렵지 않았다.
내 곁에 있는 여자가 용사라서, 그것도 좆같은 용사 애쉬 라서, 놈들을 무서워 할 이유가 없었다.
애쉬 그레이필드는 악인은 물론이요, 제 맘에 안 드는 놈을 죽이는데 망설임이 없으니까.
나는 애쉬의 옷소매를 거의 매달리듯 붙잡았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애쉬에게 기대어, 의지하는 것뿐이었다.
애쉬가 힐끔,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 시선이 내 손 끝에 닿고 멀어졌다.
“흫.”
애쉬는 묘한 웃음을 터트리고, 놈들을 훑어봤다.
하나하나 꼼꼼하게.
그리고 한 소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찾았다!”
소년을 향해 정조준 된 손가락이 썩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 남자들이 단검을 꺼내 들었다.
찔리거나 베이는 순간 파상풍 확정, 하나 같이 관리가 잘 된 것 같지는 않았다.
맹독 인챈트를 노린 것이라면 완벽하다고 박수를 쳐주고 싶다.
“자신만만하네. 지금 자기가 어떤 상황인지 전혀 모르나봐?”
“저런 년들 한두 번 보냐? 모험가랍시고 나대는 년들.”
“어차피 박히기 시작하면 울고불고 난리칠 테니까. 지금 모습, 눈으로 잘 기억해두자고.”
놈들은 낄낄낄 웃어재끼며 다가왔다.
올가미가 조여 오듯 천천히 우리를 압박했다.
애쉬는 그런 그들을 흘기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상은 했지만, 좆같네. 냄새도 나고….”
“뭐? 크흐흐, 씨발년이 아직도 사태파악이 안 되나. 머리가 안 돌아가?”
남자들 중 하나가 애쉬를 향해 욕지거릴 내뱉었다.
아랫도리를 벅벅 긁으면서, 이후 애쉬에게 할 짓거리를 은근히 드러냈다.
“병신들.”
애쉬가 성검을 뽑았다.
놈들이 뭐라고 짖든 간에,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칼집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낸 성검이 불량배들을 향해 뻗어졌다.
“…성검?”
불량배 무리 중 누군가가 그리 중얼거렸다.
용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늦었다.
애쉬의 검이 날카롭게 스며들어간다.
놈들을 향해 파고 들어, 사정없이 베어버렸다.
핏물이 화려하게 뿌려졌다.
촤악!
“끄아아아악!”
“요, 용사님! 한 번만 봐주세요!”
“도망쳐…. 미친 용사다!”
다른 용사였다면 그들을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무르고 병신 같은 게 있을까 싶지만, 그런 용사가 실제로 존재한다.
애쉬는 바보 같은 용사들과 거리가 멀다.
악당보다 더 악당에 가까운 용사.
뒤통수를 먼저 갈기고 등쳐먹었으면 먹었지, 얻어맞고 다닐 여자가 아니었다.
“으, 으으…!”
처음에 가리켰던 소년을 제외하고, 모든 불량배들을 죽였다.
한적했던 거리가 시체로 가득해졌다.
이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우욱….”
오장육부가 뒤집힌 생생한 광경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잔혹한 영화나 만화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름끼쳤다.
시체를 보는 것에, 언제쯤 익숙해질 수 있을지.
‘노예 마차에서 탈출할 때와, 기분이 전혀 다르네.’
그 때는 탈출이라는 키워드에 사로잡혀, 노예상인과 그의 호위들에게 눈길이 가지 않았다.
시체를 봤어도 새 삶에 대한 희망이 더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애쉬의 개가 되기는 했으나, 약간 안정을 찾은 상태다.
눈앞의 시체를 보고 느끼고 있는 감정이 전혀 달랐다.
참을 수 있는 정도의 불쾌감.
꿈까지는 안 따라올 것 같은 찝찝함.
딱 거기까지.
더 이상의 감상은 애쉬가 허용하지 않았다.
살려둔 소년을 향해 말을 걸고 있었다.
“야.”
“예, 옙! 용사님!”
소년은 애쉬를 보며 빌빌 길었다.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 앞에서, 어느 누구도 애쉬에게 대들 수 없을 것이다.
“너, 손기술이 좀 좋지?”
“…….”
애쉬는 확신하고 있다는 듯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이 대답을 망설이고 있었다.
소년의 안색을 살핀 애쉬가 말을 이었다.
“네 생각은 필요 없어. 내가 너한테 요구하는 건 딱 하나야.”
“…무슨 요구요?”
“강아지한테 네 기술 알려줘.”
“…그러면 사, 살려주시는 건가요?”
“확실하게 전수되면 못 살려줄 건 없지.”
기술?
나는 소년의 행색을 살펴봤다.
꾀죄죄한 차림은 나보다 더 볼품없었다.
이런 녀석에게 내가 배울 것이라곤 구걸 기술밖에 없을 것 같다.
소년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려드릴게요.”
“금방 배울 거라곤 생각 안 하니까. 일단 따라와.”
애쉬는 등을 돌려 여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나뒹구는 시체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소년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애쉬를 뒤따랐다.
정확히는 목줄과 애쉬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잊고 있었던 수치심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소년을 데리고 여관에 도착했다.
애쉬는 빈센트의 방에 소년을 밀어 넣었다.
빈센트는 어이없는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물었다.
“용사, 이 녀석은…?”
“강아지한테 기술 알려줄 놈이야. 잘 데리고 있어.”
“…알겠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제 멋대로 하는 년이란 걸, 어제오늘에 걸쳐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빈센트에게 짐을 하나 더 맡긴 후, 애쉬는 나를 끌고 방으로 돌아갔다.
이 세계에선 해가 진 이후 할 수 있는 게 극히 드물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잠을 자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침대는 하나뿐인 상황.
자연스럽게 바닥에 누워 자려고 했으나, 애쉬에 의해 가로막혔다.
“뭐해?”
“…침대가 좁아서요.”
“그런데?”
“…….”
애쉬는 당당하게 침대에 누워, 한쪽 품을 열었다.
빨리 올라오라는 듯이.
“안 와?”
좁은 침대에서 둘이 함께 자려면, 꼼짝 못할 정도로 가까이 붙어야 한다.
정조대가 없다면 모를까, 썩 달갑지 않은 스킨십이다.
내게는 거부권한이 없다.
애쉬가 시키면 해야 했다.
“그래, 말 잘 들으니까 얼마나 보기 좋아. 괜히 반항하고 그러면, 그 때는 나도 못 된 주인이 되는 거야.”
나는 얌전히 애쉬의 곁에 누웠다.
고집을 부린다고 해서 애쉬를 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내가 포기하는 편이 나았다.
버티면 버틸수록 내일 컨디션을 장담할 수 없게 돼서, 어쩔 수가 없다.
순순히 응하는 모습이 썩 마음에 드는 건지, 애쉬는 흡족한 듯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그날 밤은 생각보다 더웠다.
다음날 아침, 어제 잡아온 소년과 통성명을 나누었다.
린과 빈센트 할아범은 어젯밤에 방에서 했다고 한다.
“소우타에요.”
통성명을 하는 중에, ‘감정’ 스킬이 소우타에 대한 정보를 파악해서 내게 알려주었다.
애쉬가 소우타를 데리고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소매치기 장인이네.’
‘소매치기’ 스킬이 녀석의 레벨을 가늠했다.
동종 업계에 대한 비교분석, 스킬 덕분에 알아서 이루어졌다.
어마어마한 격의 차이.
나이도 어린데 이 정도 경지라니, 재능이 특출한 놈이었다.
“오늘부터 얘한테서 배우면 돼.”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이야.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애쉬는 내게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아무래도 말을 놓는 게 나을 것 같아. 존댓말은 들을수록 어색한 느낌이고, 벽도 느껴지고…. 응.”
“…….”
자신에게 반말을 하라고 부탁했다.
부탁인 척 하고 있는데, 내 입장에선 전혀 부탁이 아니었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명령이었다.
“알았지? 이제부터 존댓말 하면 벌이야.”
“…예.”
“대답.”
“…알았어.”
“좋아.”
애쉬는 방긋 웃으며 앞장섰다.
목적지는 신속의 룬이 있으리라고 예상되는 절벽동굴.
나는 애쉬의 손에 이끌려 따라가면서도, 애쉬 파티를 슬쩍 흘겨봤다.
한숨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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