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달리지 못하는 소년(4).
* * *
용사는 선택 받은 이들만 가질 수 있는 클래스다.
성검을 사용할 수 있고, 대륙 평화를 위해 삶을 불태우는 정의의 존재들.
용사의 동료들 또한 용사를 도와 성장을 돕고 마왕 봉인에 일조한다.
용사를 따라 약자를 구하고 악을 멸하니, 반쯤은 용사라고 보아도 부족함이 없다.
신민이든 귀족이든, 그들을 대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빈센트는 용사의 동료라는 히든피스를 사용했다.
말단 병사는 믿지 못했으나, 선임 병사는 우리의 존재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덕분에 리오스 남작의 내성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무혈입성.
‘쯧쯧, 할아범. 추하다, 추해.’
빈센트 할아범은 스스로의 명성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비록 용병이지만 자신을 알아주던 시절이 있었다며.
다른 틀딱꼰대들이 보이는 스탠스와 하등 차이가 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
손녀라 해도 무방할 애쉬의 이름을 팔아, 우리는 리오스 남작을 보러 가고 있다.
지금 내가 빈센트를 비웃어도, 나를 향해 손가락질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죄가 없었다.
“환영합니다, 용사님의 동료 여러분들.”
리오스 남작으로 보이는 청년이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홀로 나온 것은 아니고, 집사와 기사를 대동한 상태였다.
아마 이 저택에서 가장 뛰어난 이들일 것이다.
빈센트는 나를 흘기고 앞으로 나아갔다.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그리운 이름을 불렀다.
“리오스 남작…. 프렌 리오스. 프렌 리오스 맞습니까?”
“제가 프렌 리오스입니다.”
“아아…. 그렇다면 혹시, 붉은 늑대를 아십니까? 아니, 기억하고 계십니까?”
“붉은 늑대 말씀이십니까?”
애원하듯 물어보는 빈센트 앞에서, 프렌 리오스는 잠깐 기억을 되짚는 시간을 가졌다.
아주 어릴 적에 마주한 붉은 늑대의 용병,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프렌 리오스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빈센트의 얼굴에 절망이 감돌았다.
“죄송합니다만…. 잘 기억나지 않는군요. 제가 어린 나이일 때, 수많은 사람들이 저택을 들러주셔서….”
“걷지 못하는 몸을 일깨우기 위해서, ‘신속의 룬’을 구해달라는 의뢰를 맡았었는데….”
“아버지가 저 때문에 많은 분들께 신세를 졌죠. 덕분에 그나마 걸을 수는 있게 되었습니다, 하하.”
“이런….”
빈센트의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에게 졌다는 수치심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애쉬는 어젯밤에 무슨 짓을 했을까.
빈센트는 애쉬에게서 무엇을 본 걸까.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들어보고.’
지금은 프렌 리오스가 눈앞에 서있다.
라베루스의 주인, 신속의 룬에 대해 꽤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귀족.
그에게서 들은 말 중 이해되지 않는 것을 물었다.
예의 없어 보일 수 있으나, 내게는 용사 동료라는 배경이 있다.
“그나마 걸을 수 있다는 말씀은…?”
“뛰지는 못합니다. 다리의 힘이 약해서 어쩔 수가 없는 일이죠.”
프렌은 힘없이 웃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반응이었다.
이미 적응하고 포기해버려서, 미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신속의 룬으로 가능한 일인가?’
선대 리오스 남작이 모험가나 용병을 불러들였다면, 신속의 룬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용사님의 동료분들을 바깥에 세워둘 수는 없죠.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프렌이 저택 안으로 우리를 들였다.
용사 동료라는 배경 하나로 귀족과 독대를 할 자격이 생겼다.
웬만큼 사나운 귀족들도 용사 앞에서는 스스로 입을 닥치니, 용사라는 인맥의 중요성을 새삼 체감하게 된다.
‘문제는 그 용사가 하필 애쉬라는 거지.’
사납고 험하며 제멋대로다.
정조대를 채우고 괴롭히려 한다.
다른 용사들에 비해 선한 성격도 아니다.
기이한 행보를 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우리는 프렌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으리으리한 저택 내부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프렌의 응접실로 들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은 빈센트가 자신의 이력을 어필하는 내용이었다.
“…전혀 기억나지 않소?”
“죄송합니다. 당시에 정말 많은 용병들을 만나서, 빈센트 어르신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네요.”
프렌은 정말 공손하게 사과했다.
내 머릿속에 박혀 있는 귀족이란 존재에 대한 고정관념이 부서졌다.
귀족의 언행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의발랐다.
“그래도 용사님의 동료분들이시니, 라베루스에 방문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마 신속의 룬 때문이겠죠?”
“맞습니다. 근처에 룬이 있다는 정보를 얻어서, 그것을 얻기 위해 라베루스에 들렀습니다.”
“저도 아버지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아버지는 신속의 룬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셨죠.”
프렌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자신의 다리를 낫게 하고자 하는 선대 리오스 남작이 돈을 뿌려가며 모험가와 용병을 고용했다.
그 중에는 빈센트의 붉은 늑대가 있었다는데, 확실하게 증명되지는 않은 상태.
라베루스 주변 영지를 샅샅이 뒤졌으나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에는 신속의 룬을 포기해야만 했던 선대 리오스 남작는 좌절하고, 그것을 지켜본 프렌은 제 스스로 걷기 위해 노력했다고.
“아버지께서는 절벽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폭풍이 부는 절벽 아래, 기적을 위한 돌이 있다고. 하지만 허락되지 않은 자는 폭풍을 이겨내지 못한다고. 아마도, 모험가와 용병들이 자격을 갖추지 못한 거겠죠. ‘룬’이니까요.”
‘룬’을 감싸고 있는 폭풍.
자격을 지닌 용사만이 신속의 룬을 얻어낼 수 있다.
하지만, 위험한 시련임이 보이는데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혈기왕성한 모험가와 용병들에게 있어 용사의 룬은 그 어떤 보물보다 값진 보물.
얻기만 하면 부와 명예를 손에 넣을 수 있으니, 목표를 앞에 두고 도망칠 머저리는 모험가를 할 수 없다.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물론, 그 결과는 실패.
“도움이 되셨습니까?”
“혹시 절벽의 위치는 모르시나요? 확실한 위치를 알면 금방 얻어낼 것 같은데.”
“…라베루스 근처 지형 지도를 가져와.”
프렌은 옆에 서있던 집사에게 명령했다.
집사는 명령을 듣자마자 지도를 찾으러 움직였다.
“신속의 룬을 찾게 되신다면, 용사님과 함께 저택에 들러주십시오. 라베루스에 방문해주신 용사님과 식사라도 한 끼, 하고 싶습니다.”
“…한 번 말해보겠습니다.”
“……?”
프렌의 얼굴이 갸우뚱 기울어졌다.
내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애쉬가 귀족의 저택에 괜한 발걸음을 하려고 할까?’
신경쓰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나는 프렌에게 확답을 해줄 수 없었다.
용사 파티의 모든 결정권은 용사에게서 나오니까.
나란 존재는 애쉬 파티에서 성노리개의 역할을 맡고 있을 뿐이다.
‘정조대를 안 찼네.’
어쩐지 몸이 가볍다 했네.
애쉬가 혼자 뛰쳐나가면서, 내 아랫도리는 자유를 되찾았다.
정조대 없는 삶은 생각보다 쾌적했다.
다시는 착용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내게는 정조대를 거부할 권리가 없다.
애쉬가 힘을 써서 강제로 채워버리면, 발기조차 할 수 없게 된다.
힘없는 내가 애쉬를 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응접실을 나갔던 집사가 다시 돌아왔다.
손에는 돌돌 말린 지도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집사에게서 지도를 건네받은 프렌은 지도를 확 넓게 펼치고 한 곳씩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알려주었다.
‘여긴가.’
원작에서 신속의 룬은 제대로 된 행적이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이 얻는 것도 아니라서 습득 루트도 자세히는 모른다.
라베루스 근처 절벽 동굴에서 얻었다, 라는 동료 용사의 말을 제외하면 단서가 거의 없다.
때문에 프렌의 정보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것이었다.
만약 없었다면 한참은 더 헤매고 말았을 것이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제가 용사님께 힘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기쁘네요.”
프렌 리오스와의 짧은 만남을 끝냈다.
다과나 음료는 그 자리에서 먹어치웠다.
린의 입가에는 과자 부스러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가보겠습니다. 배웅 안 해주셔도 돼요.”
“아닙니다. 용사님의 동료분들께 무례를 저지를 수는 없죠.”
괜찮다고 해도, 프렌은 꿋꿋하게 우리를 따라왔다.
응접실에서 저택 입구까지, 우리가 처음 마주했던 그 곳까지.
다시 보니, 절뚝거리는 걸음걸이가 눈에 띈다.
프렌은 우리와 동행하는 이 짧은 거리도 힘겹게 걷고 있었다.
“신속의 룬을 들고, 용사와 함께 다시 오겠습니다.”
“찾으시는 룬을 꼭 얻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작별인사를 고하고 내성 밖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프렌은 집사에게 기댄 채 저택 안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쯧.”
귀족이 저러고 있다는 말은 신성 마법으로도 치유가 안 된다는 의미다.
근본부터 뒤틀려 있다는 뜻.
유전자 단위에서 발발한 병.
신성 마법이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었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그렇다.
그보다 상위의 격에 놓여있는 성검이라면 가능할까.
‘룬’이라면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만들 수 있을까.
그런 기대감에 선대 리오스 남작이 모험가와 용병을 불러들인 것이리라.
“안녕히 가십시오!”
내성으로 들어갈 때는 우리를 경계했는데, 나갈 때는 호쾌한 인사가 뒤따랐다.
빈센트의 표정은 영 아니었지만, 나는 경비병들을 향해서 손을 흔들었다.
빈센트 면전에 엿 먹여준 것에 대한 감사인사였다.
“할아범. 내기는 내가 이긴 거죠? 붉은 늑대고 뭐고, 전혀 몰라보는데요?”
“빌어먹을 애새끼. 기억력이 금붕어 수준에 가까운 건가? 도대체 어떻게 기억을 못할 수가 있는 거지?”
“자신만만하더니, 꼴이 보기 좋네요.”
빈센트를 마구 비웃어주었다.
자의식 과잉에 틀딱꼰대, 환상의 조합을 마주하니 웃지 않고는 못 버티겠다.
참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풉.”
“…….”
구겨지는 빈센트.
그 사이를 린이 파고 들어왔다.
“얼른 돌아가요. 용사님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밖에서 두 시간 정도 시간을 보냈으니까, 애쉬가 돌아왔어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는 발걸음을 재촉해 여관으로 향했다.
도둑의 쉼터 여관 1층은 식당과 주점을 겸한다.
그래봐야 낡은 술집보다 못한 수준이지만, 여관에 머물면서 간단한 식사를 하거나 잠들기 전 한 잔 정도는 할 수 있을 법한 분위기였다.
“어디 다녀왔어?”
차분해진 애쉬가 여관 1층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잠깐 바깥에를 좀 갔다 왔어요.”
“이거, 왜 안 차고 다녀?”
“…그게….”
애쉬는 남성용 정조대를 보여주며 물었다.
내가 답하지 않고 머뭇거리자, 가느다란 검지로 남성용 정조대를 빙글빙글 돌려댔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바지 내려.”
“예?”
“바지 벗으라고. 이거 채워줄 테니까.”
“…….”
애쉬가 단호하게 명령했다.
바지를 벗고 대라고.
정조대가 악마의 주둥이처럼 보였다.
“빈센트 할아범이랑 린이 있어서, 여기서는 조금….”
“그래서?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아? 우스워?”
“아뇨, 아닙니다.”
나는 은근슬쩍 빈센트 할아범을 흘겼다.
린을 데리고 올라가달라는 무언의 부탁이었다.
비록 우리가 되도 않은 내기로 다퉜지만, 애쉬 앞에서는 동맹을 맺을 필요성이 있다.
빈센트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내 표정의 속뜻을 용케도 이해했다.
이 할아범도 참, 대단한 남자였다.
“어디 가려고? 밥 먹어야지.”
“나중에 먹어도 될 것 같네. 바깥에서 군것질을 많이 해서 말이오.”
“저녁 먹고 올라가. 그래도 밥은 같이 먹어.”
“나중에 해도 될 것 같소.”
“…말 두 번, 세 번 하게 만들래?”
“읍…!”
애쉬가 살기를 일으켰다.
분명 레벨1 용사인데, 주변을 짓누르는 묵직한 기세가 느껴졌다.
레벨1 용사가 선보일 수 있는 무위가 아니었다.
성검은 레벨1이어도, 애쉬 자체는 1레벨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아, 알겠소…. 저녁 식사를 해야겠군.”
빈센트는 미안하다는 듯 울상을 지으며 린을 이끌고 애쉬 맞은편에 앉았다.
애쉬의 살기에 겁먹은 린이 빈센트 팔에 매달려 있었다.
애쉬는 빈센트와 린을 자리에 앉히고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자신의 앞에 차렷 자세로 불러 세운 후, 재촉했다.
“빨리.”
슬며시 올라가는 입 꼬리가 보였다.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관객으로서 빈센트와 린을 앉힌 것이다.
수치심이 부글부글 끓었다.
“변태 새끼.”
그런데, 어째서 지금 발기하려고 하는 걸까.
애쉬가 내 바지 허리끈을 잽싸게 풀었다.
허리춤을 잡고 강제로 내린 후, 빠른 속도로 정조대를 채워버렸다.
능숙한 손놀림이 펼쳐졌다.
“읏….”
애쉬의 손길에 완전히 발기하기도 전에, 정조대는 내 발기 자유를 빼앗아갔다.
애쉬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내가 허락할 때에만 발기하는 거야. 알았지, 강아지?”
호칭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는 애쉬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대답.”
“…네. 알겠습니다, 애쉬님….”
“애쉬, 라고 부르라고 몇 번을 말하니.”
“…….”
“존댓말이 문제인가? 흠….”
애쉬가 투덜거리며 내 바지를 도로 입혀주었다.
그리고 제 옆자리에 앉으라는 듯 의자를 툭툭 두드렸다.
“일단 앉아. 밥 먹으면서, 뭐하고 왔는지 들어보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