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용사답지 않은 용사(4).
* * *
짹, 짹짹.
바깥에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숲속이라 그런지, 새들의 활동시간이 앞당겨진 기분이다.
“으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상황이 어떠하든 간에, 최고로 효율적인 스탠스를 유지한다.
덕분에 불편한 잠자리에도 숙면을 취했다.
피로가 전부 씻겨나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개운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
잠결에 버둥거렸다.
옆에 찰싹 달라붙은 누군가가 느껴졌다.
말랑말랑한 몸으로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애쉬였다.
애쉬의 품속에 안겨 있으니, 완전히 밀착해야만 맡을 수 있는 달콤한 내음이 풍겼다.
이 냄새가 애쉬 체향이구나.
또 다시 발기하려 한다.
“윽.”
싸늘한 정조대에 닿아 순간적으로 불쾌해졌다.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내가 꿈틀거리자, 애쉬가 깨어났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잘 잤어, 강아지?”
“…예.”
어째서인지, 내가 애쉬에게 안겨 있다.
덩치로만 따지면 애쉬가 더 작은데 말이다.
“이제 그만 일어나자. 더 자고 싶어도, 슬슬 움직여야 하거든.”
애쉬는 자리에서 일어나 뒷정리를 시작했다.
오늘 안에 라베루스로 들어가려면, 더더욱 빨리 움직여야 했다.
느긋하게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다.
천막 밖으로 나가 노예 후보들을 부렸다.
녀석들은 도망가지도 않고 애쉬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존확률이 더 높은 쪽으로 나름의 선택을 한 것이다.
천막을 치운다.
설치보다 정리가 훨씬 빨랐다.
“움직인다.”
노예 후보들은 다시 짐을 둘러멨다.
어제 군장행군을 하고도, 또 군장을 등에 메고 걸었다.
끔찍한 기억이 떠올라 눈살이 찌푸려졌다.
“가자, 강아지.”
애쉬가 내 목줄을 잡아당겼다.
생각해보니까, 이 목걸이도 문제였다.
정조대 하나만 생각할 게 아니었다.
‘개목걸이도 풀어야 돼.’
야반도주 계획을 수행하려면, 개목걸이와 정조대를 해결해야 한다.
정조대 열쇠는 챙겨두었으니 일단 해결.
남은 것은 개목걸이.
애쉬 몰래 챙겨놓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우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행군 초반이라 그런가, 다들 금방 퍼지려고 하는 게 안타까웠다.
‘다행이다.’
내가 저 꼴을 당하지 않아서.
차라리 개목걸이 차고 졸졸 따르는 게 훨씬 낫다.
행군 기수로 앞서 걷던 그 시절을 다시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뭐든 간에 군장보다는 편한 것이다.
“휴식.”
꽤 걸었다고 생각할 때쯤 애쉬가 제자리에 섰다.
노예 후보들의 상태를 살피고 잠깐 휴식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노예 후보들은 환호성을 감추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말로 힘들면 대화하는 시간조차 아까워진다.
노예 후보들 사이에선 앓는 소리만 들려왔다.
‘할아범….’
노예 후보들 속에는 할아범도 있었다.
따로 도망치거나 했을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따라오는 중이었다.
다른 애들에 비해 짐이 가벼운 감이 없지 않아 있으나, 그렇다 해도 쉽지 않은 일인데.
‘틀딱 꼰대에 치매 증상도 있는 것 같았지.’
옛날에 제법 이름 날렸다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마나를 다루고 하는 게 아니라면, 이 무리를 따라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가 뱉은 이야기 중 웬만한 것들은 죄다 망상에 가까워 보였다.
‘특히 천사를 따먹었다는 부분.’
말도 안 된다.
이 세상에서 천사와 관계를 맺은 남자는 단 하나.
빅터 그레이필드.
애쉬의 아버지 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이미 죽었다.
애쉬가 용사로서 일어서기도 전에 애쉬를 지키다가 목숨을 잃었다.
‘아닌가? 전개가 뒤틀렸으니까, 어떻게 됐을지는 모르는 건가.’
내 앞에 있으면 안 될 애쉬가 내 앞에 있다.
성향 자체도 원작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남에게는 조금 더 폭력적이고, 나에게는 조금 더 다정한 듯한.
원래 애쉬는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지랄 맞은 성격이다.
그 성격 탓에, 시간이 갈수록 애쉬를 도와주던 동료들이 떠나게 된다.
주위에는 아무도 남지 않고, 결국에 마왕을 봉인하지 못하고 패배한다.
어찌어찌 반성하고 각성해서 주인공을 돕지만.
작가는 작중에서 애쉬의 내면과 스토리를 이해시켜주지 않는다.
독자인 나로서는 그렇구나, 하며 대강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그래? 그런 것 치고는 표정이 너무 진지하던데.”
애쉬가 내 곁으로 확 다가왔다.
덕분에 생각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지?”
“?”
“걱정하지 마. 나, 이래보여도 용사야. 너 하나 정도는 책임질 수 있어. 내가 길러줄 테니까, 넌 그냥 내 곁에서 살면 돼.”
애쉬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 뺨을 어루만졌다.
검술을 수련하는 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웠다.
나는 손길을 느끼면서 애쉬와 시선을 맞추었다.
하늘빛 눈동자가 잔잔하게 일렁이며, 내 얼굴을 담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가부장적인 유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나보고…. 용사 뒷바라지나 하며 지내라고?’
남자 중에 남자, 상남자 강아진에게?
‘나쁘지 않아.’
솔직히 무섭다.
탈출을 고민하고 있지만, 탈출한 이후가 두렵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외지 이세계에서 홀로 살아간다니.
끔찍하다.
용사가 뒤에 있어준다면 굉장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정조대를 풀어주시면….”
“그건 안 돼. 네 모든 건 내 꺼야. 육체도, 정신도, 전부.”
“애미 시발.”
“말버릇, 입조심 해야지?”
“…….”
존나 좆같다, 애쉬 그레이필드!
짧은 휴식을 끝마치고, 다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노예 후보들은 꼼지락거리면서도 뒤처지지 않게 잘 따라왔다.
그리고 결국 도착.
해가 지기 전에, 소도시 라베루스의 외곽 성벽을 마주했다.
숲길에서 빠져나와 마주한 들판.
황토색 길을 따라 이어진 마차들의 행렬.
“와아…!”
노예 후보들이 감탄을 흘렸다.
드디어, 라는 감정이 목소리에 묻어나왔다.
“행렬이 기네. 전부 이리로 따라와.”
도시로 들어가는 마차 행렬이 꽤 길었다.
세상에서 우리만 움직이는 게 아닌지라, 어쩔 수 없는 교통체증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있다.
귀족에 준하는 용사라는 신분이 말이다.
“어이! 거기 너, 새치기 하지 말지?”
“누구는 병신이라 차례로 들어가는 줄 아나!”
당연히 시비를 걸어오는 이들이 있다.
도보로 움직이든 말든 관심 없고, 검문을 위해 순서를 지키라는 말이었다.
“쓰레기들이….”
“뭐라?! 이 년이, 뚫린 입이라고 말을 함부로…!”
“저, 저건? 저 검은…?”
애쉬는 해당 상단의 마부를 슬쩍 흘기고는 성검을 뽑아 겨누었다.
용사 클래스만이 다룰 수 있는 성검은 그 어떤 신분패보다 확실한 증명이었다.
위조 자체가 불가능하니, 따지며 물고 늘어지는 게 우습다.
“요, 용사님이셨습니까.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마부는 곧장 꼬리를 말았다.
용사란, 대의를 실천하는 사람들.
왕족조차 그들을 무시하지 못하는데, 어찌 일반신민이 그녀를 무시할 수 있을까.
“다음에 또 걸리면, 그 때는 혓바닥을 잘라갈 거야. 처신 잘 하라고.”
“예, 옙….”
마부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용사가 폭력적인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있으니, 그로서도 적잖이 당황한 것이다.
애쉬도 그 이상 말을 꺼내진 않았다.
성검을 거두고, 막무가내로 새치기하며 도시 검문소로 걸어갔다.
그런 애쉬를 우르르 뒤따르며 칼 같은 새치기.
‘이게 권력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애쉬를 따라다니는 게 옳다.
평화롭게 살아가려면, 죽지 않고 장생하려면, 용사만큼 훌륭한 수단은 없으니까.
하지만, 아랫도리에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정조대의 무게감이 나를 현실로 불러왔다.
애쉬는 성검을 보여주며 라베루스의 검문소를 통과했다.
검문소의 기사 및 병사들은 애쉬를 보며 짧게 경례를 선보였다.
“용사님, 라베루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검문소는 프리패스.
따로 짐들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노예 후보들을 떼로 몰고 다니는데도 말이다.
성문을 지나 라베루스로 들어왔다.
서양 문명의 거리가 내게 새로운 자극으로 다가왔다.
마치 해외여행을 온 것만 같은 기분.
특유의 정경이 내 마음을 울렸다.
마공학적 기술들이 접목된 도시는 서양 근대와 비슷해 보인다.
서술로 읽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소도시가 이 정도 수준인데, 대도시는 어느 정도로 발달했을까.
수도는 어떻고?
‘나쁘지 않은데?’
현대 문물을 즐겨본 문명인으로서 판정을 내린다.
문화생활을 제외하면 크게 불편할 것 같지가 않다.
촌구석에서 시작한 탓인지, 라베루스의 정돈된 거리에 감동을 느꼈다.
애쉬는 노예 후보들을 데리고 라베루스 곳곳을 돌아다녔다.
대장간, 잡화점, 기타 상점들을 방문할 때마다 노예 후보들이 짊어지고 있던 짐이 가벼워졌다.
가지고 있는 짐들을 처분하고 돈으로 바꾸었다.
그 금액이 약 500루나.
숫자 10이 새겨진 은화 쉰 닢을 받았다.
노예 상인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들은 잡동사니에 가까웠다.
그나마 마차와 말이 가장 비쌌다.
용사라는 직위 덕분에 이 정도 받아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상점 앞, 금화를 가죽주머니에 집어넣던 애쉬가 말했다.
“너네, 이제 알아서 살아.”
“네?”
“각자도생, 말귀 못 알아들어? 썩 꺼지라고.”
“아, 아뇨…!”
애쉬는 노예 후보들을 죄다 풀어주었다.
노예들을 팔기 위해선 발품을 팔아야 하는데, 그게 귀찮아서 방생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노예 후보들은 화들짝 놀라며 도시 속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더 머뭇거렸다가는 용사에 의해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해제’에 실패하였습니다.]
[‘해제’에 실패하였습니다.]
“야, 인마.”
은근슬쩍 개목걸이를 ‘해제’ 해보려 했지만 실패.
애쉬가 목줄을 확 잡아당기며 나를 노려본다.
“잘 가!”
애쉬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노예 후보들을 떠나보냈다.
다들 인사도 없이 호다닥 도망쳤다.
그런데, 수인 소녀와 할아범이 남았다.
“용사님…!”
수인 소녀는 죄 지은 죄인 마냥 애쉬 앞에 납작 엎드렸다.
애쉬는 미간을 좁히며 수인 소녀를 내려다봤다.
“안 가?”
“…저, 뭐든지 열심히 할게요. 제발, 거두어주세요!”
“아, 필요 없어. 그냥 꺼져.”
“꺄악…!”
애쉬가 수인 소녀를 걷어찼다.
그럼에도, 수인 소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애쉬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혼자 있다간 다시 노예사냥꾼에게 붙잡히고 말 거예요.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아요!”
“네가 어떻게 되든 간에,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뭐든지 시켜만 주세요.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애쉬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살기가 스며들어, 조금씩 새어나왔다.
“당장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야?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금방 죽여줄게.”
“까흑…!”
애쉬는 수인 소녀의 멱을 잡고 들어올렸다.
수인 소녀가 가벼운 건지 아니면 애쉬의 힘이 강한 건지.
수인 소녀는 애쉬에게 붙잡힌 채, 버둥거렸다.
‘…….’
순간, 수인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살아남기 위해 간절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애쉬를 불렀다.
“그, 용사님…?”
“애쉬, 라고 부르라니까.”
애쉬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게 바뀌었다.
“애쉬…. 한 번, 데리고 다니는 게 어떨까요?”
“…….”
“애쉬는 용사잖아요. 애쉬를 도와줄 동료들이 필요할 거예요.”
용사 혼자서 다 할 수 없다.
잡다한 일을 도와줄 동료가 필요하다.
마왕 봉인이라는 최종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기 위해서.
역할 분담은 필수적이다.
“…동료?”
애쉬가 싸늘하게 웃었다.
어떻게든 머리를 굴렸다.
“난, 다른 년놈들 필요 없어. 너만 있으면 돼.”
“…그, 잡일을 할 친구들이 있어야…. 안 그러면 제가 다 해야 돼요.”
찰나에 불과하지만, 분명히 머뭇거렸다.
“…우리 강아지 손, 상하면 안 되니까.”
잠깐 고민하던 애쉬가 수인 소녀를 내려주었다.
거칠게 숨을 고르며, 수인 소녀는 애쉬를 올려다본다.
다른 용사라면 당연히 받아주었을 텐데.
용사답지 않은 용사, 애쉬 그레이필드는 인정이고 나발이고 일단 좆같이 굴었다.
그 꼬락서니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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