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신세계의 신 (2)
“우리 미국은 자국의 안전을 위해, 그리고 세계의 평화를 위해 극단의 조치를 내렸습니다. 이 법안이 얼마나 많은 비판을 받게 될지, 또 얼마나 많은 저항을 받게 될지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추진하려는 것은, 이 나라가 더는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힐러리는 연설문을 읽지도 않은 채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저는 각국의 정상들에게 고하겠습니다. 이건 우리 미국만 행해야 하는 의무가 아닙니다. 다른 나라도 테러의 위협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베리칩 법안을 반드시 이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나라는 테러의 표적이 되어 온 땅이 불바다로 변해 버릴 것입니다.”
아주 적절하게 다른 나라 정상들에게까지 베리칩을 박으라며 호소했다.
이건 미국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여러 나라가 합심하여 행해야 한다는 걸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베리칩 법안을 발동시키면 다른 나라들도 어쩔 수 없이 따라하는 수밖에 없다.
방금 힐러리가 말하지 않았던가.
신용카드와 현금을 철폐시키겠다고.
그 뜻은 달러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즉, 달러에 의존하고 있는 모든 나라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과 진배없다.
나는 TV를 끄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류정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류정한 비서실장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류 비서.”
“예, 대통령님.”
“연설문 초고 만들어 와. 힐러리의 정성에 답을 해줘야지.”
“알겠습니다. 그럼, 어떤 식으로 만들면 되겠습니까?”
“우리 대한민국도 심사숙고해서 알아보겠다고 해.”
“예, 대통령님.”
힐러리가 운을 띄워줬으니, 이제 그에 답을 하는 것은 정상들의 몫이다. 물론, 대부분이 고려를 해보겠다는 말만 할 뿐, 실제로 미국을 따라 베리칩을 상용화시키는 곳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베리칩을 박은 미국 시민들이 테러로부터 안전해지는 것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터.
나는 그동안 활발한 테러 조직들의 움직임을 부추기며 그들로 하여금 전 세계를 테러의 공포로 몰아넣으면 된다. 그럼, 내가 강요하지 않아도 알아서 베리칩을 자기들 몸에 박게 될 것이다.
* * *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미국 대통령의 용기 있는 발표를 보고 참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테러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이 몸으로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더욱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힐러리의 베리칩 의무화 발표는 굉장한 여파를 낳았다. 당연히 이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또 베리칩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들도 많았다.
미국 백악관까지 뚫려 버린 상황이다. 그렇다는 건 미국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건데, 국민들도 바보는 아니기에 베리칩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반대를 한다고 해도 힐러리는 의무화 법안을 발동시키겠다고 했기 때문에 무를 수도 없다.
그리고 이제 바통을 받은 것은 바로 나다.
“미국이 추진하고자 하는 베리칩 의무화는 국민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도 있는 위험한 법안입니다. 하지만 국민들의 사생활을 지키면서 동시에 테러 위협을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사전에 범죄도 차단하여 누구나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나라가 된다면, 그거야말로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베리칩이 사생활을 침해한다는 우려가 많긴 하지만, 범죄 차단과 테러 방지가 가능하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가 멀다 하고 살인사건과 강간, 유괴사건이 일어난다. 그 모든 범죄들을 사전에 차단할 수만 있다면?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한때 우리나라가 테러 안전 국가라는 말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화진 그룹 빌딩이 불에 타는 것을 보는 순간, 그 모든 믿음이 깨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미국 백악관이 불에 타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그 의구심이 커졌습니다. 과연 우리나라는 안전할까? 그 답은 바로 아니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국민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들로 하여금 테러 위협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각인시켜 줘야 한다.
“청와대와 국회는 미국이 진행하고자 하는 법안을 검토하여 그에 합당한 결과를 도출해 낼 예정입니다.”
내가 할 말은 끝났다. 이제 판단은 국민들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내게는 그들의 결정을 자극해 줄 만한 무기가 있다.
이 나라가 아직도 테러 안전국이라고 믿는 멍청이들이 있다. 그놈들의 믿음을 철저히 부셔 줄 한방을 날린다면 모두 자발적으로 나서서 베리칩을 몸에 심을 것이다.
난 그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 * *
“우린 베리칩을 거부한다!!”
“우린 베리칩을 환영한다! 베리칩이야말로 우리를 안전하게 지킨다!”
예상대로 베리칩 법안을 반대하는 목소리와 그것을 찬성하는 목소리가 서로 갈려져 시내로 나왔다. 미국에 가장 큰 화두인 베리칩 의무화.
종교 단체에서는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666이라며 반대했고, 베리칩으로 미국의 평화를 지킬 수 있다면 꼭 이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종교 단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베리칩 의무화를 두고 싸우는 것이다.
그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내 담화문이 나가기 무섭게 인터넷 검색어는 전부 베리칩에 관련된 이야기만 나왔고, 동시에 베리칩 음모론에 대한 것도 열심히 퍼져 나갔다. 하지만 한국이 테러 위협에 안전하지 않다는 건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었다. 단지, 베리칩을 의무화시킬 정도로 대한민국이 위험할까? 라는 의문이 많을 뿐. 나는 화력 지원을 위해 각 당에 있는 의원들을 동원했다.
“대통령님의 말씀대로 베리칩 의무화는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 백악관이 테러에 무너진 마당에 우리나라가 정녕 안전하다고 믿으십니까? 우리도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뭔가가 터질지 모릅니다.”
“저는 전적으로 대통령님의 말씀을 지지합니다. 베리칩 의무화로 범죄를 예방하고 테러까지 예방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금상천화가 아닙니까? 우리 아이들에게 안전한 미래를 선물해 줄 수만 있다면 전 뭐든지 하겠습니다.”
아이가 있는 부모들은 당연히 베리칩 법안을 찬성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젊은 층들은 사생활 침해라는 목소리를 높여갔다.
아무래도 이들을 하나로 뭉치기 위해서는 크게 한 건을 터뜨려 줘야 할 것 같다.
“일본에서 시작한 베리칩 테스트를 이번 달 안으로 끝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모든 확인이 끝나면 곧바로 미국에 있는 본사에 승인 요청을 내리겠습니다.”
백악관이 터지지만 않았어도 베리칩을 서두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백악관 사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시일을 당겼다. 그리고 한창 실험을 진행 중이던 일본 연구소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진행 상황이 대충 어떻습니까?”
“일단 위치 추적을 비롯해서 결제 시스템과 의료 센서를 포함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수시로 업데이트가 필요한 부분이라서 주기적으로 할 예정입니다.”
“그렇다는 건 베리칩을 교환해야 한다는 건가요?”
“예, 아직은 기술력이 많이 발달하지 않아서 적어도 1~3년에 한 번은 베리칩을 갈아줘야 합니다. 시대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베리칩도 그 기술력이 발전할 테니까요.”
베리칩을 계속 갈아야 한다는 건 수고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막대한 비용이 발생하게 될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가치가 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을 통제하는 일인데, 당연히 이 정도의 수고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좋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베리칩 테스트는 물론, 전염병 테스트도 진행할 겁니다. 어떤 질병이 가장 확실하게 퍼지고 치명적인지를 알아내야 하니까요.”
“일본이라…….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일본을 정말 싫어하시네요.”
“제가 만들려고 하는 세계에는 일본이란 나라가 없어서 말이죠. 조상들이 지은 죄를 후손들이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까? 일본은 우리가 구축하려는 세계에 없다니. 조금 의외입니다.”
“그들의 생존 목적은 인류의 번영을 위한 희생입니다. 그쪽 국민들을 생체 실험 목적으로 써서 우리의 기술력을 발전시킨다면 헛된 희생은 아니겠죠.”
나의 덤덤한 말투에 다니엘 로페즈는 질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 많은 일본인들을 실험 목적으로 쓴다면 엄청난 과학의 진보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시켰을 때도 수많은 인체 실험으로 많은 과학적인 진보를 이뤄냈으니까요.”
이제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는 됐다.
“베리칩 상용화,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이왕 일본을 이용하시려는 거, 크게 한 방 터뜨려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본에 큰 한방을 터뜨린다?
“도쿄나 오사카 쪽에 폭탄 몇 개를 터트려 일본 국민들을 패닉에 빠뜨리는 겁니다. 그리고 오사마 빈 라덴의 얼굴이 담긴 비디오를 뿌리는 거지요. 이제 다음 타깃은 바로 대한민국이라고요.”
나는 다니엘 로페즈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대충 알아들었다.
“그것을 빌미로 우리도 베리칩을 상용화시킨다?”
“바로 그겁니다. 옆 나라 일본이 그 지경이 된 것을 보면 대한민국 국민들도 깨다는 바가 있겠지요. 베리칩을 상용화시키지 않으면 일본과 똑같은 꼴을 당해야 한다고 모두 공포에 떨 겁니다.”
아주 좋은 생각이었다.
국내에서 폭탄을 터뜨리기보다, 차라리 일본에서 폭탄을 터뜨려 그다음 목표가 바로 우리나라라는 걸 알려주는 것이다.
솔직히 국내에서 폭탄을 터트리게 되면 가뜩이나 높았던 내 지지율이 곤두박질치게 될 터. 그것 때문에 조금 망설인 것이 있었다. 하지만 다니엘 로페즈의 말대로 하면 내 지지율도 지킬 수가 있고, 베리칩에 대한 필요성을 높일 수 있다.
나도 참 지독한 놈이지만, 다니엘 로페즈도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간다.
“좋은 생각이군요. 일본에 있는 정식이에게 연락을 넣어보겠습니다.”
“하하.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합니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아시다시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말이죠.”
나는 다니엘 로페즈와의 통화를 끊고 바로 정식이에게 연락을 넣었다. 그리고 자세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어딜 날려 버릴까? 일본 의원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곳을 확 날려 버려?”
정식이는 오랜만에 불꽃놀이를 한다며 좋아하는 눈치였다. 일본도 몇 번 테러를 당한 터라 경계가 강해지긴 했지만, 이번에는 그 규모를 초월하는 테러가 될 것이다.
“아니, 최대한 많은 시민들이 있는 곳이 좋겠지.”
“몇 명 정도를 보고 있는데?”
“수천 명 정도? 1만 명가량 죽어나가면 더 좋고.”
“그 정도 폭탄 양을 설치하려면 뼈 빠지겠는데?”
“그냥 사람들이 잘 모여 있는 곳을 집중적으로 노려. 호텔도 괜찮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관광객으로 많이 오는 곳이잖아. 그 사람들이 휩쓸려도 괜찮아?”
당연히 괜찮다. 그리고 그들의 목숨이 날아가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테러의 위협을 더욱 피부로 느끼게 될 것이다.
“괜찮아. 전부 날려 버려. 잿더미로 만들어.”
“알겠어. 대통령님.”
정식이는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미국에 이어 이제 우리나라도 베리칩을 의무화할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