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사죄 (2)
“그게… 대통령님께서 이번에 일본에게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고 하시기에.”
“그래서?”
내가 지금 굉장히 날카롭다는 걸 눈치챈 대표들은 말을 얼버무렸다.
“아닙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때를 잘못 고른 거 같은…….”
“시끄럽고 다시 엉덩이 붙여. 윗사람 허락도 없이 일어나라는 법은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
“…….”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양반들이지만,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엄연히 내가 윗사람이니까.
“위안부가 뭐 어쨌다고?”
대표들 중 하나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대통령님께서 위안부에게 정확히 어떤 걸 요구하셔야 하는지 도움을 드릴까 하고…….”
“도움? 그럼, 네들이 나 빼고 알아서 해봐. 대신, 내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내놓지 않으면 모두 옷 벗을 각오하고.”
“대, 대통령님.”
“왜? 도움을 준다며. 머리에 든 거라고는 똥밖에 없는 것들이 겁대가리 없이 준다는 도움이 뭔지 난 매우 궁금한데.”
“…….”
대표들은 침묵을 지키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당신들에게 원하는 건 딱 하나야. 무조건적인 복종. 내가 의견이 필요하면 내가 알아서 부를 거야. 내가 부를 때까지 나서는 그런 건방진 행동은 오늘이 마지막이 되어야겠지? 어차피 당신들이 나서봤자 고이즈미 저 새끼를 설득할 수 있을 거 같나?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진작 이 문제들을 해결했겠지.”
나는 대표들의 의견 따위를 들으려고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의원이랍시고 깝치지 마. 난 너희들 의견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야. 그리고 무조건적인 복종만이 너희들의 살길이야. 알겠어? 만약 내 의견에 불만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말해.”
예상했던 대로 누구 하나 대답이 없었다.
난 민주주의적으로 의원들과의 원만한 대화를 통해 국정을 이끌어 갈 생각이 요만큼도 없다. 왕권주의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나는 이들에게 완전한 복종을 요구했다. 만약 이들이 따르지 않는다면 난 그에 합당한 처벌을 내릴 것이다.
모든 황제가 그랬듯.
“그런데 그건 들고 왔나? 내가 장관들 후보 가져오라고 했을 텐데.”
“아, 예. 여기 있습니다.”
난 목록에 적힌 이름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비서실장에게 넘기면서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다 조사해. 언제 뭘 처먹고 다니는지까지 전부.”
“예, 대통령님.”
나는 자리에 앉아 주눅이 들어 있는 대표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총 5개의 정당. 다른 당 대표들도 있지만, 그들은 이런 자리에 끼지도 못한다.
그중 메인이라 할 수 있는 2개를 빼고는 나머지는 솔직히 별 볼 일이 없다.
“이번에 듣자하니, 어떤 새끼가 국가보안법을 들먹였다고 하던데. 그거 누구야? 어느 당에서 그랬어?”
“민주당에서 그랬습니다.”
보수 정당이 좋아라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안보법이 뭐가 문제라는 거지?”
“아무래도 국민들의 사생활에 큰 문제를 끼치며, 국가에 봉사해야 할 기관이 너무 큰 권력을 잡아 남용할 수 있다는 문제 때문에…….”
“그게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됐는지 몰라서 하는 말인가? 빨갱이 새끼들이 하도 간첩들을 보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걸 만든 거잖아. 네들 당에서 간첩 새끼들을 몇 명이나 받아줬는지, 너희들은 모르지? 생각 이상으로 많아.”
보수당 대표가 실실 웃고 있었다. 난 그런 그에게도 핀잔을 주었다.
“처웃지 마. 네 얘기니까.”
“예?”
“보수당이라고 해서 간첩 새끼가 없는 줄 알아?”
“…….”
다른 면에서 보면 참 북한은 간첩 활용에 대해서 아주 탁월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베트남이 그러했듯, 북한도 간첩들을 보내 먼저 우리나라의 정치권에 들어가 세력을 넓힌 뒤, 차근차근 분열을 조장하는 건 기가 막히게 잘한다. 좌파, 우파 할 것 없이 들어가서 내부적 갈등을 일으키며 나아가 국민들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도 여전히 간첩들은 활동 중이다.
북한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의 명령을 따라서 말이다.
난 이들을 아주 유용하게 써먹을 생각이며, 북한과의 외교적 갈등과 테러 위협에 우리나라를 몰아넣어 베리칩 유포를 정당화할 계획이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건 건드리지 마.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나라의 안보를 위한 거니까. 그리고 별 3, 4개 달고 있는 장성들 전부 청와대로 모이라고 해.”
“예, 대통령님.”
나는 대표들을 밖으로 보낸 다음, 군부를 지휘하는 핵심 간부들을 관저실로 불렀다.
그들은 예전부터 나와 면식이 있는 터라 나를 대함에 어려움이 없었다.
“내가 여러 장군님들을 왜 불렀는지 아십니까?”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이것저것 많이 해먹으신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화진 그룹을 필두로 제가 탈 없게 잘 드시라고 포장까지 해드렸으니까요.”
내가 군부와 마찰을 일으키지 않은 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결실은 내가 실종되었을 때 나타났다. 여전히 나를 지지하고 있던 간부들이 이창석의 명령을 거부하고 나를 따라 청와대를 점거했으니까.
물론, 이 내용은 국민들은 모르는 일이다. 단순히 테러 위협 때문에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 그들이 알고 있는 전부였다.
“이제 앞으로 군수 납품으로 장난질을 치는 건 그만하십시오.”
내 말에 간부들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그들의 돈줄을 내가 끊어버리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들에게는 다른 선물이 있다.
“저는 우리나라를 세계 최강으로 만들 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장성들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의 배를 굶게 할 수 없으니, 이제까지 버시던 돈에 두 배를 드리죠. 이렇게 하면 만족하시겠습니까?”
“흠흠, 대통령님. 저희들만 챙겨주시는 건 아무래도 밑의 사람들에게 좀…….”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부족함 없이 잘 챙겨 드릴 테니까요. 하지만 이번 일을 기점으로 누군가가 또 장난질을 하려 한다면 제가 장담해 드리죠. 그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이 땅에서 사라질 겁니다.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실제로 군 간부들 중 몇몇이 행적조차 찾을 수 없게 사라진 일이 있었다. 그들만 사라진 게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도 다 함께 말이다.
이들은 이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전 진심입니다. 부디 여러분도 진심으로 절 따라와 주길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오랫동안 같이한다면 조금 더 나은 나라를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 대통령님.”
지금은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 앞으로의 군사적 강대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저놈들부터 먼저 잘라야 한다. 내가 뒤에서 장난질을 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평생 해온 게 그런 것밖에 없는 놈들인데 내 눈을 피해서 하지 않겠는가?
나는 저놈들부터 먼저 제거한 다음, 따로 사람을 선별해 라인과 관계없이 참 군인들만을 뽑아 우리나라의 군 체계를 재정립할 예정이다.
불만이 터져 나오긴 하겠지만, 감히 불만을 표출하는 놈들은 조용히 처리하면 될 일이다. 군대라는 곳이 원래 그런 곳이니까.
* * *
“고이즈미 총리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정식으로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오늘 낮 위안부 피해자들 모임에 참석했으며, 피해자들 앞에서 직접 사과문을 발표하는 등 이례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한 철저한 보상으로 부끄러움이 없게 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냈습니다. 이로써 그동안 얼어붙어 있던 한일 관계가 다시 풀리려는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채널에서 속보가 뜨면서 고이즈미 총리의 파격적인 행보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피해자들을 한 명씩 만나 손을 잡아주고 사과하는 모습이 전 세계적으로 뉴스를 탔다.
이에 대해 국민들인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지금이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고이즈미 총리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외신들도 고이즈미 총리의 뜻깊은 결정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고이즈미 총리와의 회담을 성공적으로 끝내면서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정당한 보상이 있을 겁니다. 또한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하여 위안부를 비롯한 일본의 침략 전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교육시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일본 측이 그걸 받아들인 겁니까?”
“예, 대통령님께서 몇 시간에 걸친 회담을 통해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일본은 앞으로 침략 전쟁에 피해를 본 각 나라들에게 속죄의 뜻을 전할 것이며, 보상을 해줘야 할 부분은 꼭 그리하겠다는 약속까지 했습니다.”
그토록 외골수였던 일본이 갑자기 저자세로 나오니,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당황스러워했다. 하지만 이것이 모두 나의 업적이라는 것을 언론이 자꾸만 부각시키면서 국민들은 나를 향한 신뢰를 더욱더 높여 나갔다.
미국을 비롯한 각 국 정상들도 고이즈미의 선택과 나의 탁월한 협상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뉴스거리를 던져주었다.
“총리님, 퍼포먼스가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고이즈미가 위안부 피해자들 앞에 허리를 숙인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화젯거리가 되었고, 덕분에 그동안 일본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던 국민들이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됐다.
“이제 대통령님께서 답을 해주셔야 합니다. 일본에 걸려 있는 경제 제재. 전부 풀어주십시오.”
일본 정부가 내게 원하는 것이 뭔지, 난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하,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전에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내 요구사항을 다 말하지 않았다.
“독도 말입니다. 독도는 한국의 땅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하세요.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 건 이제 그만하라는 겁니다.”
“그건…….”
“설마, 이번에도 제 말에 토를 달으려는 건 아니겠죠? 국제 소송을 핑계로 말입니다.”
“…….”
말없이 몸을 부르르 떨던 고이즈미는 이윽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총리님. 덕분에 제가 무거운 짐을 이렇게 내려놓는군요.”
나는 고이즈미에게 술잔을 건넸다.
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어사 주인 것이다.
고이즈미는 조심스레 잔을 받아들었다.
“앞으로 한국과 일본이 아무런 마찰 없이 평화를 이어갔으면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으로 넘어가는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많은데, 극우 성향의 민간인들과 충돌해선 안 될 일이죠.”
일본에 있는 극우 단체를 알아서 처리하라는 말이었다.
고이즈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물론입니다. 한국과의 평화적인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이 제 목표이기도 합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이제 일본도 숨을 쉬고 살 때가 되었죠. 제가 각국에 전화 한 통씩 돌려놓겠습니다. 그동안 일본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걸 풀 때가 됐죠.”
원하는 대답을 들은 고이즈미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감사하기는 이릅니다. 제가 요구한 사안을 먼저 이행하시면, 저도 약속대로 할 겁니다.”
“예, 꼭 그리하겠습니다.”
그동안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던 갈등이 오늘에서야 전부 풀렸다.
이 정도 했으면 국민들의 지지도가 한층 더 올라가지 않을까?
그들은 뛰어난 협상으로 일본과 타협을 이뤄낸 내 업적을 칭송하기 바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