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왕이 되겠다 (3)
“그 양반, 직접 내려오겠다고 하던가?”
“아닙니다. 끝까지 법정 싸움으로 가볼 생각인 거 같습니다.”
“하긴, 어떻게 얻은 자리인데. 거기서 끝내기 아쉽겠지.”
한창 정부의 막강한 힘을 발휘해야 하는 시기에, 탄핵을 당하게 생겼으니 이창석으로써는 억울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내게 배신을 한 순간부터 그의 정치 인생은 거기서 끝났다.
“그런데 중국은 어떻게 하려고? 거기도 리오차오가 겁도 없이 날뛰고 있다며.”
“형님 말씀대로 대국의 힘을 보여주겠다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그놈도 거기까지예요. 천량위를 필두로 반대파가 권력을 잡아서 리오차오를 몰아내게 될 겁니다.”
“그렇게 간단히?”
“리오차오는 처음부터 기반이 약했어요. 그리고 장쩌민 숙청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세력들이 복수의 기회만 노리고 있었죠. 그들은 자연스럽게 천량위의 편에 서게 될 것이고, 리오차오를 따르는 군부도 어쩔 수 없이 제 말을 따르게 될 겁니다.”
“돈으로 산 거냐?”
“돈으로 사기도 하고, 항상 하던 방법대로 협박을 하기도 했죠.”
어떤 사람이든 가족을 걸고넘어지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돈으로 안 되면 무력을 써서라도 뜻을 관찰하는 것이 골든 연합의 방법이지 않은가.
“이창석, 그 양반은 어떻게 하려고?”
“죗값을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정 농단을 일으킨 사람인데요.”
“솔직히 말해서 그 양반이 점쟁이를 가끔 찾아간 건 맞지만, 네가 터뜨린 일 중 70%는 조작된 거잖아.”
“예, 하지만 사실을 기반으로 만든 일입니다. 이창석이 애지중지하는 점쟁이가 실제로 존재하고, 그의 측근들도 다 이창석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렀으니까요. 이 정도면 아무리 조작된 정보라고 해도 국민들은 믿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상상력이라는 게 이래서 무서운 거죠.”
사람들은 의혹을 던져주면 그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이제까지 흑색선전으로 몰락한 정치가들은 전부 국민의 상상력 때문에 쓰러지게 됐다. 나는 국민들에게 상상할 수 있는 소재를 던져주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는 건 오직 그들의 몫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나는 라우팽이 남긴 후임자들 중 하나를 선별해 중국 지부의 총책임을 맡게 했다.
라우팽이 이런 일을 대비해 남긴 사람이니, 분명히 잘해줄 거라 믿었다. 그리고 내 기대대로 라우팽의 후임으로 임명된 샤오팡은 중국에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들을 대거 움직여 군부 간부들을 공략했다.
리오차오의 편에 서 있는 간부들은 모두 암살해 버리고, 리오차오를 배신할 가능성이 높은 간부들은 따로 포섭해 군부를 장악해 놓은 것이다. 라우팽을 스승처럼 따르던 샤오팡은 천량위와 마찬가지로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당분간 중국은 샤오팡의 지휘 아래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정식이는 잘하고 있나?”
중국도 차차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말에 안심한 성일환의 관심은 이제 일본으로 쏠렸다.
“예, 제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기회를 틈타 정식이를 몰아내려 했답니다. 그런데 일본에 있는 우리 조직의 기반이 고작 그 정도로 무너질 리가 없지 않습니까?”
“뭐, 규혁이 얘기는 꺼내기 싫었지만, 그 녀석이 일본 하나는 정말 잘 마무리시키고 갔어.”
황규혁 얘기가 나와 조금 마음이 무거웠지만, 난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죠. 규혁이 형님이 아니었으면 일본은 그 상태를 유지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성일환은 그런 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가 툭 던지듯 물었다.
“아직도 규혁이 생각하냐?”
“안 할 수가 없죠. 형님은 안 하십니까?”
“나? 담배 피울 땐 가끔 생각이 나. 그런데 우리 직업이 워낙 그렇고 그렇잖아. 그런 감정에 연연할 수는 없지. 보낼 땐 확실하게 보내주고 잊어야 돼. 그게 날 위해서라도 좋아.”
틀린 말이 아니다.
떠난 사람을 계속 기억하고 있는 건 나도 힘들다. 그날 황규혁의 목숨을 끊어놓은 건 바로 나니까. 아직도 황규혁의 배를 찔렀을 때의 감촉이 두 손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궁금한 건 이거 하나야. 규혁이를 그 지경으로 몰고 간 로이 루스테를 왜 아직도 살려두고 있냐는 거지.”
성일환의 말에 나는 미소를 거두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어쩌다 보니까. 나도 골든 연합의 소속이잖아. 내가 가동 중인 정보처가 한두 개야?”
난 잔에 있던 술을 벌컥 들이켠 다음, 운을 뗐다.
“로이가 황규혁 형님을 자극했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그냥 놔뒀다는 건 아무래도 연합의 붕괴를 막고자 했던 거겠지?”
“예, 황규혁 형님의 반란을 막기 위해 그때 우리도 총력을 기울이지 않았습니까? 만약 로이까지 적으로 뒀으면 연합은 그날 쪼개졌을 거예요.”
“거기다가 로이 루스테는 메데인 카르텔의 수장이기도 하잖아. 로이가 죽으면 그쪽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것도 맞습니다. 로이가 죽으면 메데인 카르텔은 혼돈에 빠집니다. 그리고 만약 로이 루스테 암살을 실패하게 되면 메데인 카르텔은 그날로 골든 연합의 적이 될 거고요. 굉장히 일이 복잡해집니다.”
성일환은 지금쯤 내가 로이의 힘을 두려워해 그를 죽이지 못한 걸로 생각할 터.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정말 마음먹고 움직인다면 로이 루스테는 진작 죽고 없었을 것이다. 그가 모르게 곁에 심어놓은 내 심복들이 있으니까.
“전 로이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로이의 꼬드김에 한 번에 넘어간 황규혁 형님이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오래전부터 황규혁 형님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죠. 골든 연합이 추구하는 세계에 말입니다. 언젠가 터질 고름이라면 차라리 외부의 힘으로 자극해서 터뜨리는 것이 나아요. 로이도 그걸 알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행동을 했을 겁니다.”
“너와 사이가 틀어질 걸 각오하고 벌인 일이다, 이거지?”
“예, 로이도 제가 일부러 침묵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로이는 바보가 아니거든요. 우리가 알고 있는 걸 로이가 모를까요?”
“하하, 아니지. 로이, 그놈도 굉장한 놈이니까.”
겉으로는 웃음을 터뜨리고 있지만, 그의 속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젠장, 오늘따라 그 새끼 얼굴이 자꾸만 생각이 나네.”
그는 그 쓰린 마음을 술로 달래려 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따라 쓰린 속을 술로 다스리는 수밖에 없었다.
* * *
“이창석 대통령은 하야할 계획이 전혀 없으며 날조된 정보로 국민들이 선동되고 있다는 것이 너무 개탄스럽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창석은 아예 초강수를 두겠다는 입장인 듯 보였다.
그는 국민대담화를 열어 자신의 뜻을 밝히고, 이 날조된 정보를 누가 퍼뜨린 것인지도 명확하게 밝히겠다고 언론에 알렸다.
이게 다 무슨 소리이겠는가?
차라리 자신이 코너에 물려 죽기보다는, 국민대담화에서 나에 대한 내용을 폭로해 다 같이 죽자는 방식인 것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가능할까?
“대통령님, 아주 화끈한 국민대담화를 준비 중이시라는 얘기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아무런 제재 없이 청와대로 불쑥 들어오는 나를 보며 이창석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혼자 가기는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물귀신 작전을 쓰시겠다?”
“제 임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주신다면 저도 뜻을 거두겠습니다.”
“아뇨,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내고 손뼉을 치자 조직원들이 집무실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이건 어떻습니까? 심적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주 좋은 전개가 아닙니까? 이렇게만 하면 모두가 편해질 수 있을 거라 보는데.”
“뭐, 뭐야?”
“아니면 이건 어떨까요?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던 대통령은 가족들을 칼로 해치고 주변 사람들을 다치게 해 경찰에 강제 구금됐다……. 어떻습니까? 사실, 방금 영부인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제가 붙잡아놓은 아드님과 따님 때문에 참 걱정이 많으시더군요.”
“다, 당신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내 아들과 딸이라니!”
“왜 이러십니까. 제 방식을 몰랐던 거도 아니고. 대통령님이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저도 어쩔 수 없이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아니면 마지막 옵션을 드릴까요?”
이창석은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지만, 이 사람은 감정에만 움직이는 정치인이 아니다. 내가 지금 협상 중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차분하게 자리에 앉았다.
“말씀해 보세요.”
나는 그에게 마지막 선택권을 주었다.
“대통령님이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하야하시는 겁니다. 솔직히 저도 존경하는 정치가를 직접 탄핵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옷 벗으세요. 그게 가족도 살고, 대통령님도 살 수 있는 방법입니다.”
“…만약 거절한다면?”
“24시간 안에 결정이 나겠죠. 대통령님이 죽을지, 아니면 아들과 딸이 대신 죽을지.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무슨 수를 써도 대통령님은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없을 겁니다.”
“…….”
망연자실한 얼굴로 이창석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훈계하듯 타일렀다.
“그러게 어른들 말씀을 들으셨어야죠. 곁에 무당이 판을 치면 그 사람 인생을 조진다는 걸 모르시진 않았을 테고. 한 나라의 대통령이 점쟁이에 의지해서 되겠습니까?”
“…….”
할 말이 없는지 이창석은 눈을 감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이윽고 그는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제가 하야를 하게 되면, 그 후에는 어떻게 할 겁니까?”
“하야를 하시면 저도 더 이상 대통령님을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대통령의 예우는 갖춰 드리겠으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될 순 없을 겁니다. 날 배신한 대가는 두고두고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창석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그것도 매우 한정적인.
어차피 이 사람은 내가 건넨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가족 목숨이 담보로 잡혀 있으니까.
“하야… 하겠습니다.”
강철의 남자라고 불렸던 이창석이 결국 눈물을 흘렸다.
평생의 정치 인생 동안 이런 굴욕과 패배감은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평생 목표로 삼았던 대통령 자리를 이렇게 내놓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대통령님의 결정, 매우 존경합니다. 아주 훌륭한 결정을 하신 겁니다. 모든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기 전에 스스로 물러나시는 것이 명예 회복도 더 쉽겠지요. 그럼, 방송 준비부터 시키겠습니다.”
나는 모든 방송국에 전화를 돌려 대통령의 중대 발표가 있을 거라는 걸 알렸다.
대기 중이던 카메라맨들이 대담화를 촬영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옆에 있는 사무실에 들어가 tv를 켰다.
긴급 속보로 들어온 정보에 아나운서들은 하던 뉴스를 모두 멈추고 대통령 국민대담화에 집중했다. 이윽고 이창석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그간의 일을 모두 사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려 합니다. 언론에서 떠드는 의혹들이 모두 다 사실은 아니나, 충분히 잘못을 인지하고 있으며 부족한 리더십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이에 대한 책임을 지겠습니다. 또한 날조된 정보로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대통령의 자질에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창석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진 않았지만, 이 모든 건 대통령으로써 갖춰야 할 리더십의 부족이니 알아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차라리 저렇게 스스로의 잘못을 부정하고 물러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약속대로 나는 이창석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추가적인 검찰 수사도 없을 터.
“저 이창석은 이제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닌, 이 나라의 국민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미 뒷방으로 밀려난 늙은이에게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앞으로 있을 대선에만 관심이 있을 뿐.
난 이제 이 나라의 왕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