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폭군 폐위 (1)
“결국 이렇게 또 전화를 나눠야 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건만. 그리고 지금도 매우 불편하고요.”
가시가 있는 장연욱의 말을 황규혁은 재치 있게 받아들였다.
“당연히 그러시겠죠. 저 같은 깡패 새끼는 취조실에 앉혀서 설렁탕 한 그릇 먹여놓아야 속이 풀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연욱은 짧게 웃음을 터뜨린 다음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이번에도 전화를 드린 건… 태산이 때문입니다.”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제가 장 검사님의 전화를 기다린 것일 수도 있죠.”
“그렇다는 건 황 사장님도 저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원래 제가 먼저 장 검사님께 전화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태산이를 만나서 브레이크를 걸어달라고요. 지금쯤 그놈한테 상황이 얼마나 막장으로 흘러갔는지를 들으셨겠네요.”
황규혁의 말대로 장연욱은 참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9.11 테러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그걸 이용해 온 세계를 자신의 발아래 두려고 하는 그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계획을 말이다.
인간을 노예화하고 모든 것을 제 뜻대로 행하겠다는 계획.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허황된 이야기라며 비웃었겠지만, 상대는 김태산이다. 고작 15년 만에 세계 각국을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는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그가 세계를 향한 새로운 계획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미 진척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 진짜 문제였다.
“저는 어떻게든 태산이를 막고 싶습니다. 지금 그놈, 미친 듯이 폭주하고 있어요.”
“저도 공감합니다. 이미 태산이는 오사마 빈 라덴을 붙잡았고, 알카에다를 복속시켜 아랍 국가에 퍼져 있는 테러 조직들을 대거 모아놓고 있죠. 그리고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미국 부통령이 사고로 죽은 건 아십니까?”
“딕 체니요?”
“예.”
장연욱은 잠깐 말이 없다 이윽고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설마 그것도 태산이가…….”
“맞습니다. 태산이가 죽였습니다. 그것도 여야 대표들이 보는 앞에서 말이죠. 총으로 머리를 날려 버렸다고 하더군요.”
가히 무시무시한 일이 아닌가.
미국의 부통령을 총으로 쏴 죽여놓고도 사고사로 위장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라니.
도대체 그놈의 힘의 한계는 어디까지란 말인가.
더는 올라갈 자리가 없으니 온 국민을 노예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충분히 가질 만도 하다.
“제가… 어떻게 할까요?”
결국 장연욱은 도움을 청했다.
지금 자신의 힘으로는 김태산을 막을 힘이 없다.
“일단 태산이의 손을 잡으세요. 민주당 쪽에서 장 검사님에게 손을 뻗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과 손을 잡고 대권 레이스에 참가하세요.”
“태산이를 먼저 안심시켜 놓고 뒤에서 다른 짓을 하자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황규혁의 말에 연욱은 고개를 흔들었다.
“전 태산이와 오래된 친구입니다. 그리고 그놈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죠. 아주 철저하고 의심도 많아요. 제가 갑자기 행동을 바꾸면 의심을 할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가능성이 있는 말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무조건 믿는 실수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당장 김태산의 손을 잡으라는 게 아닙니다. 시간을 좀 끌어보세요. 태산이가 설마 단번에 장 검사님을 버리려 하겠습니까? 분명 다시 한번 장 검사님을 설득하려 할 거예요. 이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장 검사님을 오랫동안 청렴한 검사라는 이미지로 키워왔으니까요. 그러니까 기다려 보세요.”
황규혁의 판단이 날카롭다는 걸 연욱은 느꼈다.
이 사람도 자기만큼 김태산이란 사람을 잘 알고 있다.
“그럼, 만약 황 사장님의 말씀대로 된다면요?”
“그다음부터는 청와대와 협력하세요. 그리고 보수당의 이창석 후보와도 손을 잡으셔야 합니다.”
“그 말씀은…….”
“아무리 현 정부가 식물 정권으로 몰락했다고 해도 청와대는 청와대입니다. 임기가 단 하루 남았다고 해서 무시할 게 못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청와대의 힘이죠. 청와대, 이창석 후보, 그리고 여야가 하나로 힘을 합쳐 김태산을 붙잡는다면?”
대충 상상이 됐다.
청와대가 지휘관 역할을 하고 그동안 김태산의 그림자 속에 파묻혀 있던 여야와 각 사람들이 움직여 김태산을 붙잡는다. 그럼, 그의 권력은 거기서 끝이 날 수도 있다.
“괜찮겠습니까? 만약 이 일에 황 사장님 연루되었다는 게 알려지면 태산이를 따르는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장 검사님. 제가 깡패 새끼이긴 하지만, 제 나와바리 안에서는 절 건드릴 사람이 없습니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적어도 일본 안에서만큼은 누구도 자신을 건드릴 수 없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
“골든 연합의 수장은 태산이에요. 그런 태산이가 대한민국 정부 손에 붙잡힌다면 아마 그쪽에서도 뭔가 제재를 취하긴 하겠죠. 그건 제가 알아서 막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장 검사님은 당장 앞의 일을 생각해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태산이를 잡을 수 있을지 말이에요.”
생각보다 황규혁과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속이 쓰려왔다.
평생의 친구로 생각해 왔던 김태산을 이 손으로 잡아야 한다니.
그렇다고 이대로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잘 알겠습니다. 저도 열심히 발품을 팔아보도록 하죠.”
“예. 그럼, 검사님만 믿겠습니다. 조만간 다시 연락드리죠.”
짧은 인사를 끝으로 연욱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황규혁의 말투를 보니 이미 국내에 김태산을 몰아내기 위한 세력을 따로 만들어 둔 것 같았다. 그들의 힘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정말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폭군을 몰아내는 것이.
* * *
“이번에 벌써 다섯 번째다.”
“그럼, 이제 그만 올 때가 된 거 같지 않냐?”
연욱이는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나와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유비도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얻었다고 하던데… 다섯 번이면 충분하지 않냐?”
“그럼 네가 유비같이 되어보든가.”
“미안하다. 내가 귀도 크지 않고 백성을 위한다는 그런 마음은 전혀 없네.”
대답이 참 뻔뻔하게 느껴졌는지 날 바라보는 연욱이의 눈빛에 한심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계속 그렇게 나올 거야? 끝까지 내 손 안 잡고 마이웨이로 가겠다는 거지?”
“…….”
내 물음에 녀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 알았다. 네가 끝까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다른 짓은 하지 말아줘. 내 손으로 널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싶지 않다. 우리가 보통 친구냐? 서로 요단강 건너다가 돌아온 사이인데, 싸우진 말아야지.”
나는 그만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내 끝의 말이 먹혔던 걸까.
연욱이가 서류 하나를 던지며 나를 붙잡았다.
“뭐야?”
“날 스카우트하고 싶다며? 공짜로 하려는 건 아니겠지.”
난 녀석이 준 서류를 슬쩍 펼쳐보았다. 거기에는 여러 재벌들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이 사람들이 널 스카우트하는 비용?”
“그래, 꽤 많지? 그 개새끼들을 언제쯤 잡을까 기회만 노리고 있었어. 나름 증거도 모아 놓았고.”
리스트를 보니 재계에 굉장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사람들만 있다.
“네가 그걸 받아들이면 난 지금 당장 총장한테 달려가서 수사권 가져올 거야. 첫 시작은 천성 그룹 이강찬이고.”
화진 그룹 다음인 천성 그룹을 건드리겠다는 것인가. 그것도 내 유력한 조력자를 치겠다라-
“그다음은 너도 알지? 화진 그룹 회장 권오준. 그놈도 조질 거고.”
“대마 그룹도?”
“그래, 재벌 새끼들 다 털어보는 게 내 평생 소원이었잖냐. 이 기회에 다 날려 버리려고. 이 정도 하면 국민들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거 같지 않냐?”
“이게 정말 네가 원하는 거야?”
“그래.”
다른 날 같았으면 선뜻 허락을 해줬겠지만 지금은 뭔가 쉽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연욱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줄 거야, 말 거야!”
“이거 하나 받고 정말 내 손을 잡겠다고?”
“어차피 나 아니더라도 쓸 사람은 많잖아. 차라리 다른 새끼가 봉황 의자 앉아 있는 거 보느니, 차라리 내가 앉으련다. 대신, 각오하는 게 좋아. 네가 뭘 부탁하든 쉽게 들어줄 생각 없어. 난 절대 네 명령을 듣는 부하가 아니야. 이거 하나는 기억해.”
내 뜻대로 대통령 자리에 앉겠지만, 허수아비가 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놈이 정말 대통령이 되면 하루도 지루할 날이 없을 것 같다.
“좋아, 나도 널 허수아비로 놔둘 생각은 없어. 그리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시어머니 노릇 할 생각도 없고. 네 하고 싶은 대로 해. 옆에서 내가 전적으로 도와줄게.”
연욱이는 씨익 웃으며 내게 손을 건넸다.
“일단 그 새끼들 명단부터 다 통과시켜. 그거 들고 총장 만나러 가게.”
녀석의 미소에 나도 똑같이 미소로 화답하며 말했다.
“쉽지 않을 거다. 수사를 허락해 주는 것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이 노땅들 전부 붙잡으려면 각오 단단히 해야 돼. 옛날에 부장 검사였던 양반들이 전부 변호사 명함 달고 너 물어뜯으려고 달려든다에 내 전 재산을 건다.”
“내가 그 이빨 빠진 호랑이들이 무서울까? 걱정 마라. 그리고 내 후광이 너무 강해서 말이야. 다들 내 뒤에 네가 있다는 거 알고 함부로 안 개기더라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연욱이의 뒤를 내가 받쳐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장연욱이 칼을 뽑았다는 걸 듣게 되면 그들은 아무리 비싼 돈을 준다고 해도 수임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물어뜯든 죽이든, 네 알아서 해.”
난 녀석에게 서류를 넘겼다.
연욱이는 그걸 받고 내게 확인하듯 다시 한번 말했다.
“너 진짜로 허락했다.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라.”
“진짜야,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대신, 너도 약속해. 이걸 끝으로 네 검사 인생도 끝이야. 이거 다음은 국회다. 알겠지?”
나와 연욱이는 손을 맞잡으며 서로의 원하는 점을 충족시켜 주었다.
“먼저 간다. 오늘 총장 얼굴이 볼만하겠구먼.”
벌써부터 피가 끓는지 연욱이는 서류를 들고 후다닥 사무실 밖을 나가 버렸다.
난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것으로 첫 단추가 맞춰진 건가. 아니면 처음부터 어긋난 건가?
* * *
“김 국장.”
“예, 각하.”
“김 국장은 국정원의 국장으로서 항상 자부심을 느끼십니까?”
김용한 국장은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호출에 그렇지 않아도 놀랐는데, 합석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 더 놀랐다.
저 사람이 누군지는 김용한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일본 야쿠자들을 굴복시켜 일본 정부에까지 굉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람, 황규혁이다.
“예, 물론입니다.”
“정말요? 이 나라가 누구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지 뻔히 아시면서 그런 자부심이 나온다는 겁니까?”
얘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각하, 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국장의 당황함을 황규혁이 진정시켰다.
“국장님, 제가 누군지는 아시겠지요.”
“아… 예.”
“골든 연합에서 제 영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도 아십니까?”
“뭐… 대충은.”
“그럼, 국장님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도 아십니까?”
뜬금없는 물음에 김용한 국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국장님은 차기 정권에서 끝납니다. 그리고 보수 정당이 가장 먼저 터는 곳은 국정원이 될 거예요.”
“예? 아니, 왜 국정원을…….”
“그거야 정권이 바뀌지 않습니까? 군기 잡을 필요가 있다고 여기겠지요. 그리고 전 정권에서 어떤 일이 있었나 알아보기도 딱 좋고요.”
진보에서 보수로 정권이 바뀐다. 그럼, 진보의 찌꺼기가 묻은 곳을 털어내는 건 당연한 수순. 국정원이 그 첫 번째 타자가 될 것이고 그다음은 군부가 될 것이다.
“김용한 국장님은 아마 징역살이를 좀 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이걸 원하십니까?”
황규혁의 공격적인 물음에 김 국장은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저한테 뭘 원하시는 겁니까?”
이제야 황규혁이 원하는 물음이 나왔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대답했다.
“저와 함께 이 나라의 왕을 끌어내려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