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깨끗한 정치인
“이, 이런 미친놈을 봤나.”
CIA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읽던 부시의 손이 심하게 떨려왔다. 이윽고 그는 보고서를 집어 던지며 언성을 높였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그 테러리스트 놈을 우리 쪽에 넘기지 않고 자기가 가져가겠다니! 얼른 CIA에 압력 넣어! 당장 가서 그 새끼를 잡아 죽이라고!”
부시가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지만, 수뇌부 인사들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CIA에서는 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 더는 빈 라덴을 쫓지 않는 것으로요.”
“CIA 국장 데려와! 그 새끼부터 해임시키고 하면 될 거 아니야!”
“대통령님, 그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건 모두 미스터 블랙의 결정입니다. 그분의 결정에 반하는 행동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수뇌부들이 지금은 미스터 블랙의 하수인이 되어 버렸다. 부시는 눈을 무섭게 뜬 채 소리쳤다.
“다들 나가! 당신들은 이제 필요 없어!”
“…이따가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들이 자리를 비우면서 부시는 다시 한번 거대한 벽을 실감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나라의 최고 정점에 서 있는 자신이 허수아비 꼴을 하고 있다니. 도대체 그놈이 무슨 짓을 했기에 미국 정치권이 그 손바닥 안에 놀고 있단 말인가.
미국의 참담한 현실에 부시는 부끄러워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대통령님.”
그나마 의지할 곳이라고는 부통령 딕 체니였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외압에 떠밀려 따르긴 했지만, 전적으로 부시를 지원해 주는 사람이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모든 게 저쪽으로 넘어갔어. 그 테러리스트를 데려가서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고! 어쩌면 9.11 테러도 그놈의 소행일 수도 있어. 그놈이 수천, 수만의 사람을 학살한 거야!”
부통령 딕 체니는 저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CIA에서도 추적하지 못한 빈 라덴의 위치를 단번에 알아내어 붙잡은 것도 그렇고, 놈을 미국에 넘겨주지 않고 자신이 데리고 있겠다고 한 건 냄새가 나지 않은가?
“대통령님, 이제 그만 참고 살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언제까지 미스터 블랙의 그림자에서 우리 정부가 가려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이번 기회에 새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흥미로운 제안에 부시는 짙은 어둠으로 가득하던 표정을 지우고 부통령에게 자세를 기울였다.
“구체적으로 말해주겠나?”
“CIA에서 제가 부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이용해 미스터 블랙을 제거하면 어떨까요?”
딕 체니는 과거 CIA에서 일했던 사람이다. 그쪽에는 닿는 줄이 꽤 있다. 하지만 부시는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 사람은 대통령보다 더 험준한 경호를 받는 사람이야. 가능하겠어? 그리고 CIA가 그놈 손에 놀아나고 있는데, CIA를 쓰자니.”
“제 자식과도 같은 사람들입니다. 절대 저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CIA에서도 미스터 블랙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는다면 저쪽에서 우리에게 보복을 할 텐데?”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나 최대한 이쪽 꼬리가 잡히지 않게 잘 처리할 생각입니다. 또한 골든 연합은 수장이 사라지면 차기 수장을 누구로 할지에 대한 것 때문에 아마 정신이 없을 겁니다. 서로 총질하며 싸울 수도 있죠.”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아시아와 미국을 다스리는 연합이다. 이곳의 수장이 된다는 것은 절반이 넘는 세계를 다스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 않던가.
그 황제의 자리를 얻기 위해 서로 싸우고 피를 흘리며 분열하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럼 암살자를 찾기보다는 서로 황제가 되기 위해 열심히 싸우겠군.”
“바로 그겁니다. 보복보다는 왕관을 차지하기 위해 싸울 겁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저들이 서로 싸우도록 이쪽에서는 불만 던져주면 된다.
“괜찮을까?”
하지만 문제는 용기였다.
만일 이 작전이 실패하고 미스터 블랙이 모든 걸 알아내 버린다면…….
“대통령님, 이미 미국 정권은 죽었습니다. 살아도 산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크게 저지르고 끝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이다.
어차피 지금 허수아비로 치욕스러운 삶을 사느니 차라리 이 악연을 직접 끊어내는 것이 옳다.
“바로 실행해. 전적으로 지원하지.”
“예, 대통령님. 감사합니다.”
부통령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집무실 밖을 나섰다.
부시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미스터 블랙이 사라진다?
그럼 다시 미국은 옛 영광을 되찾게 될까?
* * *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미국까지 넘어와 나를 찾아온 것은 보수 정당의 이창석이었다.
그는 1년 앞으로 다가오는 대선을 위해 지금도 발 벗고 뛰어다니는 중이다. 그런 그가 내게 찾아왔다는 건 딱 하나의 이유밖에 없다.
“먼 길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제15대 대선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져 김일중에게 패배한 사람이다.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아직도 그의 눈에는 정치를 향한 열정이 가득하다.
“회장님께 안부 인사차 방문했습니다.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라도 회장님의 손을 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아무리 지지율을 올린다고 해도 내가 나서서 펀치를 먹이면 답도 없다.
내가 맘먹고 털기 시작하면 노현우, 이창석을 동시에 날려 버릴 수 있는 구린 것들을 전부 다 잡아낼 수 있다. 없으면 만들어내도 된다.
언론이 내 손아귀에 있지 않던가?
언론으로 국민을 선동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대통령이 되고 싶다, 이겁니까?”
노골적인 내 물음에 이창석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예, 회장님.”
“괜찮겠습니까? 지금 대통령도 내 손짓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데.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자리가 아닐 수도 있어요.”
이번에도 아주 노골적이었다. 그럼에도 이창석은 변함이 없었다.
“똥통에 굴러도 속세가 낫다고 했지요. 아무리 더러운 자리라고 해도 대통령이라면 국무총리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대선에 출마하시 전,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양반이다.
어차피 똥통에 구를 거, 대통령이 되어 구르겠다는 건가.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럼, 아들 군 문제부터 해결을 해야겠습니다.”
군 문제를 들먹이니 이창석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창석은 15대 대선 때 2위로 김일중에게 패배했고, 곧 다가오는 16대 대선에도 2위로 노현우에게 패배한다. 또한 17대 대선에서도 3위로 패배하면서 그동안 실패를 모르고 질주해 오던 그의 정치 인생에 쓰디쓴 패배만 기록되었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일단 아들들의 군 문제였다.
두 아들이 모두 신체 등급을 핑계로 군 복무를 하지 않아 젊은이들의 공분을 산 것이 치명적이었고 이를 크게 부풀려 내보낸 언론 플레이도 그의 패배에 일조했다. 그리고 시대 상황도 잘 따라주지 않아 패배한 것도 적잖아 있었다.
“그냥 보내지 그랬습니까. 젊은이들이 거기에 민감하다는 걸 뻔히 아시면서.”
내 핀잔에 이창석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들들이 워낙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면목 없습니다.”
그래도 모든 게 오해라는 변명은 하지 않는다.
“의원님.”
“예, 회장님.”
“저는 두 번 명령 내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항상 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이 진행되는 것을 원하지요. 그런 사소한 것으로 둘 사이에 마찰이 생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만일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다면 현 정권처럼 의원님의 정권도 식물 정권으로 전락하게 될 겁니다.”
나의 말에 이창석은 인상을 찡그리기 보다는 환하게 폈다.
방금 내 말이 곧 허락이라는 것을 알고 있게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만 돌아가십시오. 주변에서 좋게 보지 않을 겁니다.”
“아, 예. 그럼, 한국에서 뵙겠습니다.”
이창석은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밖을 나섰다.
똥통에서 구르겠다는데, 굳이 말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창석 다음으로 날 찾아온 사람은 좀 의외였다.
“의원님도 오셨습니까?”
노현우 의원이었다.
그는 조금 불편한 얼굴로 내게 대꾸했다.
“이창석 의원님이 다녀갔습니까?”
“하하, 예. 그렇습니다. 노현우 의원님도 여기 오셨다는 건 같은 이유겠군요.”
이 사람도 대통령이 되고자 날 찾아온 것인가.
“제 의지는 아니었습니다. 당에서 무조건 회장님을 찾아가 빌라고 하더군요.”
아직 내가 보수당의 손을 들어줄지, 아니면 진보당의 손을 들어줄지 결정을 내리지 않아 당 수뇌부들은 골치가 아플 것이다. 그래서 앞다투어 노현우와 이창석을 내게 보낸 것이리라.
“그래서, 제게 빌 겁니까?”
“아뇨.”
“의외인데요. 대통령이 되시려고 한 게 아니었습니까?”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어떻게요?”
“대통령이 되어봤자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깨달으니, 욕심이 버려지더군요. 그래서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독재에 항쟁할 생각입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재밌는 양반이다.
독재에 항쟁을 하겠다라.
당찬 발언이면서도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다.
“그건 저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얘기로밖에 들리지 않는군요.”
“제 꿈은 대통령이 되어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다고 한들 바뀌는 건 없겠더군요. 차라리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이 나라를 바꿀 겁니다.”
“참 어려운 길을 택하셨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를 총으로 쏴 죽이지 않는 한, 이미 대한민국은 제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당당한 나의 대답에 노현우는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어차피 누가 그 자리에 올라간다고 한들 이 나라는 쉽게 바뀌지 않아요. 다수 국민의 결정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나라의 운명입니다. 이것보다 어리석은 게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차라리 저와 같이 세계를 주무르고 있는 사람이 한국을 다스린다면 그 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 강성해질 것이 아닙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예, 제 얘기가 진짜인지 아닌지는 앞으로 지켜보십시오. 저는 대한민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만들 겁니다. 그 어떤 나라도 무시하지 못하게 말이지요. 그 선두에는 제가 있을 것이며 역사는 저를 영웅으로 기록하게 될 겁니다. 언제까지 강대국에 쩔쩔매며 살아야 합니까? 언제까지 저 섬나라 놈들에게 멸시를 당하며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노현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예전 독재자들은 개인의 이득만을 위해 달려왔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난 그들과는 차원이 달라요. 더욱 지독하게 이 나라의 독재자가 될 것이고 이 나라를 그 무엇보다도 위대하게 만들 겁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고 말입니다.”
여전히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노현우였다.
“전 개인적으로 의원님을 좋아합니다. 그나마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청렴하신 분이니까요. 그래서 그런 분이 제 앞에 반기를 든답시고 발버둥을 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차피 세상은 의원님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잘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설령 의원님과 의원님의 가족들을 전부 몰살하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죠.”
그제야 노현우의 말문이 열렸다.
“저를 협박하시는 겁니까?”
“예, 모르셨습니까? 전 단순히 협박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항상 실행에 옮기지요. 제가 얼마나 행동이 빠른 사람인지 보여 드릴까요?”
난 핸드폰을 들고 노현우 앞에 흔들어 보였다.
“여기 단축번호 4번을 누르고 전화를 건 다음 목표물의 이름만 말하면 됩니다. 그럼, 여기 너머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모든 것을 해결하지요. 지금 우리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 보고 싶으시다면 직접 눌러보십시오.”
노현우는 내가 건네는 핸드폰을 잡지 못했다. 난 씩 웃으며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조용히 사십시오. 그리고 의원님은 어차피 더러운 대통령 자리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혼자 깨끗하게 사세요. 이 똥통 같은 정치판으로 더 이상 눈 돌리지 말고.”
내 말에 노현우는 굳은 얼굴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래, 차라리 이러는 게 낫다.
깨끗한 정치인은 더러운 똥통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정치인은 결코 깨끗해서는 안 된다. 정치인이 깨끗하려다 보면 끝내 더러운 자들의 아가리에 속으로 들어가게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