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회초리 (3)
다섯 번 정도 걸려온 청와대의 전화를 전부 거절해 버렸다.
이 정도 거절했으면 눈치를 깠을 것이다.
전화 따위로 사과를 한다거나, 나를 청와대로 불러 대화를 나누려는 것이라면 집어치우라는 무언의 압박을 말이다.
결국 김일중은 주도면밀한 경호 속에 은밀히 나를 찾아왔다.
“이 나라에서 가장 바쁘신 분이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김일중은 기가 찬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제게 앉을 자리도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 자리, 대통령님이 시원하게 발로 차지 않았습니까?”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래도 살려 달라고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인데, 문전 박대 하는 건 안 좋게 보이지 않겠는가.
“들어오십시오. 그리고 경호원들은 전부 물리시고요. 거슬립니다. 제가 설마 여기서 대통령님께 무슨 짓을 하기야 하겠습니까?”
“…예.”
김일중은 뒤에 있던 경호원들을 전부 물린 다음,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에게 물 한 잔 주지 않고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뻔히 알면서도 물어보는 내가 참 얄밉게 보일 것이다.
김일중은 이를 앙다물며 말했다.
“북한과 미국. 이 둘을 계속 방관할 작정이십니까?”
“그럼요? 제게 무슨 힘이라도 있나요? 아무 힘도 없으니까 대통령님이 공권력을 이용해 저를 압살시키려는 거 아니었습니까?”
되레 약한 소리를 하자 김일중은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용기가 생긴 건지 속 이야기를 전부 풀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민주화 운동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이오. 항상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싸워온 투사라고! 그래서 이 나라가 고작 단 한 사람에게 휘둘리는 꼴을 못 보겠어서 나선 것이오. 박 대통령이 군부 독재로 나라를 뒤흔들 때도 내가 그것에 맞서 싸워온 것처럼 지금도 그리했다는 것이지.”
“그러니까 독재자를 타도하기 위해 그런 개수작을 부렸다, 이 말씀이죠?”
노골적인 나의 대꾸에 김일중은 살짝 당황한 듯 보였다.
난 피식 웃으며 그에게 서류 하나를 던져놓았다.
“읽어보시죠.”
내 말에 따라 한 장씩 서류를 넘기던 김일중의 안색이 차츰 어두워졌다.
“이건…….”
“불법대북송금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대통령님께서 그 자리까지 올라오는 동안 저지른 비리에 대한 내용입니다. 서류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세상 사람들 중에 먼지 안 묻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장 스스로는 떳떳하다고 해도 주변 사람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죠. 더 엿 같은 건, 내가 저지른 잘못도 아닌데 고스란히 다 뒤집어쓴다는 겁니다. 주변 사람들 때문에요.”
김일중이 저지른 비리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김일중을 지금의 자리까지 끌어 올린 사람들이 문제였다. 그들은 온갖 비리를 저지르며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이들의 잘못에 대한 책임은 전부 김일중이 져야 한다.
특히 대북송금에 관한 내용이 언론에 밝혀지면 그동안 주춤해 있던 보수 정당이 힘을 얻어 목소리를 높이게 될 터.
“이 서류들이면 가능하겠죠?”
“…뭘 말입니까?”
“탄핵 말입니다.”
탄핵이라는 말에 김일중이 몸을 들썩였다.
“제가 그런 끔찍한 선택을 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래도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온몸을 불태우신 분인데, 제가 그런 짓을 하면 쓰겠습니까?”
“다, 당신 정말로 나를…….”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언론을 움직여 국민들을 선동하면, 그동안 대통령님을 지지해 준 유권자들이 어떻게 등을 돌릴까요? 한 달도 안 걸려 모두 대통령님께 돌을 던진다에 제 모든 걸 걸겠습니다.”
처음에는 충격. 그다음으로는 이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본능이 생겨난다.
현실과의 타협이 그 출발선이다.
김일중은 서류를 내려놓고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이번에는 그냥 정권에 대한 위협이었습니다. 감히 주재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놈들에게 따끔한 회초리를 든 것뿐이죠. 하지만 시정된 부분이 하나도 없다면 다시 한번 회초리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도 아주 매섭게 말입니다.”
이번 한 번은 위협으로 넘어가지만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사정없이 내려치겠다는 경고였다. 하지만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라는 말에 자존심이 굉장히 상했는지, 김일중의 안색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아무튼,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대통령님께서도 성의 있는 사과를 위해 여기까지 오셨고, 저도 더는 아름다운 이 나라를 짓밟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조만간 북한과 미국이 오해를 풀었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예, 다시는 간신 같은 놈들의 혀에 속아 이런 파국이 없었으면 합니다. 저야말로 이 나라를 강대하고 부유한 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애국자가 아닙니까? 상을 줘도 모자를 판에 모함이라니요. 억울합니다, 대통령님.”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없다고 하지만, 김일중의 표정을 보니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인 것 같다.
“회장님의 말씀. 잘 알았습니다. 그럼, 이만…….”
“예, 대통령님이 청와대를 비우시면 안 되죠.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말은 정중하게 했어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다리를 꼬고 있었다.
알아서 고개 숙이고 나가라는 내 몸짓에 김일중은 입술을 꾹 깨물며 문 밖을 나섰다.
이제 김일중은 해결이 됐고, 다른 사람을 만날 때가 됐다.
* * *
“죄송합니다, 회장님.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집무실에 들어오기 무섭게 머리를 박고 있는 것은 이영학이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내려다만 보았다. 그러자 이영학이 슬쩍 내 눈치를 보았다.
“그게 답니까? 고작 한번 머리 박은 걸로 목숨을 퉁치시겠다?”
그러자마자 이영학은 연신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죄송하다는 말을 수십 번 반복했다.
어느덧 그의 이마가 찢어지고 붉은 피가 흐를 때쯤.
“그쯤했으면 됐어. 일로 와서 앉아.”
“…가, 감사합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이영학은 소파에 앉으려 했다. 나는 무섭게 도끼눈을 뜨며 호통을 쳤다.
“어디서 감히 그 더러운 몸으로 소파에 앉으려고 해!”
그 말뜻을 알아들은 이영학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래, 우리 잘나신 이영학 양반.”
“예. 회, 회장님.”
“외국으로 도망가려다가 우리 애들한테 붙잡혔다며?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려고 하셨나?”
“회, 회장님. 그게 아니라 저는 단지…….”
“단지 뭐? 외국에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
이영학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우리 이영학 씨가 얼마나 잘살기에 언론사들에게 돈을 뿌리나 하고 알아봤더니, 아주 가관이더구먼. 제대로 된 회사가 하나도 없어. 어떻게 된 게 다 불법 자금 만드는 유령 회사들이야?”
이영학에 대한 뒷조사는 완벽하게 끝냈다.
그가 자금을 빼돌리기 위해 오래전부터 만들어온 유령회사들을 전부 찾아냈고 자금의 출처까지 밝혀냈다. 즉, 검찰에 돌리면 감방에서 수십 년은 썩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친한 친구 중 하나가 검찰청 검사야. 그것도 언론에서 주목받고 있는 스타 검사라고. 장연욱이라는 이름 들어봤지? 재벌들이라면 장연욱 이름 듣고 오금이 안 저리는 사람이 없다던데. 우리 이영학 씨도 그 친구랑 사이좋게 얘기라도 나누고 싶은 거 같아? 소개라도 시켜 줄까?”
“회, 회장님.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제발…….”
“제발 뭐? 둘 중 하나만 선택해. 네 목숨인지, 아니면 네 명예인지.”
“명예… 요?”
“네가 목숨을 택하면 장연욱 검사가 네 사건 담당자가 될 거고. 명예를 택하면 여기서 네 대가리를 내 손으로 직접 날려줄 수 있어. 그러니까 선택하라고.”
이영학은 바들바들 떨며 대답했다.
“모, 목숨입니다.”
똥통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했던가.
이영학은 목숨을 택했다. 하지만 언젠가 저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씨익 웃으며 수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은 다음 스피커폰으로 돌려놓았다.
“그래, 연욱아. 나다. 바쁘냐?”
“바빠, 인마. 무슨 일이야?”
“검사님에게 무슨 일이긴. 정의 구현을 위해 연락드린 거지.”
“뭐? 너 혹시 나한테 자수하는 거냐?”
“쯧, 그런 거 아니고. 여기 재활용 안 되는 놈이 하나 있어서 너한테 던져주려고. 이영학이라고 알지? 내가 이 친구랑 같이 재료도 보낼 테니까 잘 요리해 봐.”
연욱이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이, 이영학이라고?”
“그래, 그 이영학.”
우리가 회귀하기 전에 연욱이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영학에 대해 파고들었던가.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외압에 떠밀려 사건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스피커폰이거든? 인사라도 나눌래? 여기 옆에 있는데.”
“됐고, 30분 안에 잘 포장해서 데리고 와. 직접 면상 보고 얘기하게.”
“그래라, 그럼.”
나는 전화를 끊고 새파랗게 질려 버린 이영학을 바라보았다.
“얘기 들었지? 성실하게 수사에 임하고. 혹시라도 허튼 수작을 부리다 걸리면 그땐 나랑 다시 대면하게 될 거야. 세상 제일 지독한 놈이 누구인지 똑똑히 보여줄 테니까, 알아서 기어. 알겠어?”
“…예.”
“대답이 작네. 알겠냐고!”
“예! 아, 알겠습니다!”
나는 뒤에 서 있던 조직원들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뭐 하고 있어? 검찰청 가서 자수하겠다고 하잖아. 모셔다 드려라.”
“예, 회장님.”
거의 반강제로 끌려 나가던 이영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참함이 표정에 담겨 있었다.
이것으로 결정됐다.
미래의 서울 시장, 미래의 대통령 이영학은 오늘 사라졌다. 그렇다는 건 이제 이 나라를 앞으로 누가 다스릴지 모른다는 것이다.
“대표님들도 잘 보셨지요? 저렇게 남의 뒤통수만 치고 다니며 못된 짓만 하고 다니는 사람은 벌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 계신 분들도 잘 처신하시길 바랍니다.”
줄곧 이 상황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던 각 당의 원내대표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 계신 분들도 다 한패이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내가 이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게 싫었습니까?”
대표들은 안절부절못하며 급기야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으려는 시늉을 했다. 난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쇼하지 말고 앉아요. 당신 무릎 꺾는다고 그게 무슨 가치가 있는 행동인 줄 아나 본데, 웃기지 마요. 당장 미국 대통령도 내 앞에서 무릎을 꺾어. 그런데 당신들 같은 일개의 정치인 따위가 무릎을 꿇는다고 해서 내가 기뻐할 줄 알았나?”
“…….”
무겁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원내대표들을 스윽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까지 하는 건 당신들 때문이 아니야. 이 나라가 어지러워질까 봐 참는 거라고. 그러니까 이영학 하나 희생양 삼는 걸로 끝내는 줄 알아. 만에 하나 또 한 번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땐 여기 있는 당신들 전부 내가 사형대로 보내 버릴 거야. 알겠어?”
“예, 회장님.”
“대답은 잘해. 행동도 대답만큼 하는지 어디 지켜보자고.”
나는 할 말을 마치고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대표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밖으로 빠져나갔다. 당분간 군기 잡힌 모습으로 내게 대항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할 터. 만일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땐 제대로 피를 볼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