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227화 (227/325)
  • 227화. 회초리 (1)

    홈 스위트 홈이라고 했던가.

    오랜만에 한국 땅을 밟은 나는 여유을 만끽할 시간도 없이 임원급 회의를 소집했다.

    화진 그룹 임원들을 전부 소환해 내는 건 꽤 오랜만인 것 같다.

    “안녕하십니까, 부회장님.”

    외국을 나가면 회장님이란 소리를 듣지만 여기서는 아직도 부회장이란 소리를 듣는다.

    언론에 얼굴을 잘 노출하지 않기 위해 연막을 쓴 직책이니, 딱히 불만은 없다.

    무슨 일이 터지면 어떤 회사의 대빵을 손가락질하지, 그 밑에 있는 사람을 욕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던가.

    “신용카드 말입니다.”

    나는 임원들이 가져온 서류를 다 읽은 다음, 임원들에게 말했다.

    “지금도 별다른 제재 없이 발급을 해주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부회장님.”

    IMF로 인해 무너진 경제를 살리고 동시에 세금을 원활하게 징수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정부는 신용카드를 팍팍 밀어주게 되었다. 카드 규제를 없애고 신용카드의 현금 서비스 한도 또한 없애 버리는 등, 그야말로 오늘만 사는 막장 전횡을 보였다.

    그 덕분에 카드사들은 대호황을 이루게 되었는데, 문제는 돈 회수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늘부로 화진 그룹 자체적으로 규제를 만들어 카드 발급을 제한합니다. 그리고 현금 서비스 또한 일정한 수익과 신용등급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무조건 거부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카드사 대표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채 내게 말했다.

    “부, 부회장님. 지금 카드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잘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우리 회사만 자체적으로 규제를 만들어 버리면 다른 경쟁사들에게 고객을 전부 빼앗길지도 모릅니다.”

    “그럼, 그렇게 되라고 놔두세요. 어차피 곧 있으면 터지게 될 폭탄입니다. 우리가 그 폭탄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을 필요는 없지요.”

    “폭탄이요?”

    난 미간을 찌푸리며 카드사 대표를 노려보았다.

    “부채 회수율이 얼마나 됩니까? 내가 듣기로 요즘 사람들은 카드 돌려막기로 빚을 갚고 있다던데. 솔직히 카드를 발급받은 사람들 중에서 빚을 갚을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부채가 산처럼 쌓이게 되면, 그때 그거 다 어떻게 받을 생각이죠?”

    “저 그건…….”

    “카드사가 호황이라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거 잘 파보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라는 거 다들 알고 있지 않나요? 만약 그것도 모르고 그 자리에 마냥 앉아 있다는 거라면 오늘부로 임원들 물갈이부터 해야겠군요.”

    물갈이라는 말에 임원들은 토끼눈을 뜨며 움찔거렸다.

    1년, 혹은 한 달 안에도 잘릴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임원 아닌가?

    “제 말 똑바로 이행하세요. 카드사 규제는 오늘부터 들어갑니다.”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그리고 카드 발급을 늘리기보다는 지금 당장 쌓여 있는 부채부터 해결을 하도록 하죠. 신용 불량자들에게 집요하게 찾아가서 돈을 전부 회수하도록 하세요.”

    “예, 부회장님.”

    이제 1년 남았다.

    2002년에 폭발하게 될 신용카드 대란.

    정부의 무분별한 규제로 인해 생겨 버린 카드 대란은 수백만 명이 넘는 신용 불량자들을 만들어낸다. 당장 TV를 보라.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은 즐겨라’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신용 불량자가 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전혀 체감하지 못한 채 마구잡이로 카드를 긁고 다닌다.

    상환 능력이 없는 대학생부터 월급 120만 원도 넘지 못하는 직장인들까지 무신경하게 카드를 쓰고 다니니, 파국의 징조는 이미 예전부터 보이고 있었다.

    한번 폭탄이 터지게 되면 대한민국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카드사들이 연달아 무너지게 되고 빚을 갚지 못한 신용 불량자들이 돈을 받으러 오는 사람을 피해 도망치게 된다.

    돈 대신 받아드립니다 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전부 조폭들이다.

    정부의 몽둥이 때문에 주춤거리던 조폭들이 카드 대란으로 인해 다시금 성장세를 타게 되는 것이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카드 규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그에 대한 방안을 내놓고, 부채 회수율을 높일 수 있는 방법도 가져와 주시기 바랍니다.”

    “예, 부회장님.”

    임원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자 뒤에서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권오준이 내게 다가왔다.

    “잠깐 말씀 좀…….”

    “아, 그러세요.”

    회장 자리에 앉은 지 좀 돼서 그런가?

    예전과는 다르게 무게감이 느껴지는 권오준이었다.

    하긴, 천성을 누르고 화진 그룹이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하지 않았던가.

    비록 허수아비이지만, 그 정점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무게감을 줄 것이다.

    “연락은 받으셨습니까?”

    “어떤 걸요?”

    “대형 언론 3사에서 말입니다.”

    얘기를 하는 걸 보니 대충 알 것도 같다.

    “외국에 오랫동안 나가 있다 보니 국내 소식을 잘 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방금 전 카드사를 규제하는 것을 보니 누구보다도 국내 사정을 잘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난 싱긋 웃으며 권오준에게 물었다.

    “정부가 대형 언론들에게 칼을 뽑았습니까?”

    “알고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세무 조사부터 시작해 그 외의 것들도 전부 파고들 생각인가 봅니다. 그 일로 인해 대형 언론사 대표들이 저를 찾아와 빌더군요.”

    김일중 대통령은 부정부패 척결을 외치며 대형 언론사를 향한 칼을 뽑아 들었다.

    이 일로 인해 진보 정당과 대형 언론 3사가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조강, 동진, 중동 일보가 정부의 표적에 들었습니다. 제대로 언론과 전쟁을 벌일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그렇지 않아도 요즘 들어 진보 정당에 대해 좋게 말하지 않는 언론사들이다.

    이럴 때는 힘으로 제압하기보다는 살살 구슬리는 게 좋을 텐데, 김일중 대통령은 돈보다 칼을 좋아한다. 그는 단순히 진보 정당의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언론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칼을 뽑아 든 것이다.

    “김일중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빠르게 올라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북한과의 원활한 협력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했으니까요. 이 기세를 몰아 언론사까지 장악해 버리려는 것 같습니다.”

    권오준의 판단이 옳다.

    김일중은 북한과의 관계 개선으로 인해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

    하지만 이 양반, 착각하고 있다.

    북한과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건 정부가 잘해서가 아니다. 바로 내가 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여기서 조금이라도 핸들을 꺾어버리게 된다면 북한은 또 한 번 악착같이 무력도발을 보일 터.

    그럼, 햇볕정책을 찬양하던 진보 정당은 우르르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김일중 대통령의 의도를 어느 정도 알 것만 같았다.

    지금 그는 언론사를 힘으로 장악하려는 것이다.

    왜냐고?

    그래야 내게 몰려 있는 힘을 조금씩 갉아먹을 수 있을 테니까.

    “이는 부회장님을 향한 정부의 반역입니다. 언론사를 억눌러 우리 화진 그룹을 견제하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리고 차기 정권까지 문제없이 이양하려는 것이고요.”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 총리가 내게 무슨 꼴을 당했는지 김일중도 어렴풋이는 알 터. 그 때문에 위기감을 느낀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별다른 이유 없이 부패 언론을 억압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굳이 나 때문이 아니더라도 역사적으로 일어날 일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뭔가 냄새가 난다.

    이질적인 냄새가.

    “일단 그건 제가 따로 알아보겠습니다, 회장님.”

    “아, 예.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회장까지 자리를 비우자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수화기를 들었다.

    오늘 오랜만에 그 양반을 만나봐야겠다.

    * * *

    “아이고, 부회장님. 이게 얼마만입니까?”

    성일환은 여전한 얼굴과 인사말로 내게 달려왔다.

    그는 나와 포옹을 나눈 다음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재수 없게 잘생긴 건 똑같구먼! 요즘 미국 물 좀 먹어서 살이라도 찌겠다 싶었더니.”

    “워낙 바쁘게 움직여서 살이 찔 시간도 없었습니다.”

    “허허, 그래. 일단 앉자. 오랜만에 우리 태산이랑 술이라도 걸쳐야지.”

    예전에 성일환과 자주 오던 소고기집에서 우리는 술잔을 기울였다.

    어느 정도 신변잡기로 시간을 보낸 다음, 술 두 병을 해치우고 나서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정부가 언론사를 공격한다는 거, 알고 계십니까?”

    성일환은 꺾던 손을 멈추고 잔을 내려놓았다.

    “너도 알고 있구나. 그래, 네 말대로 정부가 아주 칼을 갈고 나온 것 같다.”

    “그만큼 심하게 잡을 생각인가 봅니다.”

    “아예 박살을 낼 작정인 거 같더라고.”

    박살을 낼 정도의 강도라.

    역시 이상하다.

    원래대로라면 정부는 대형 언론 3사를 위협하기만 하지, 완전히 짓밟아 버리진 않는다.

    “잘하면 대형 언론사 세 개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겁니까?”

    “내가 볼 땐 그래. 김일중, 그 양반이 아예 언론 시장을 재편해 놓을 생각인 거 같더라고.”

    언론 시장을 재편할 정도라니.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김일중이 단단히 각오를 한 것 같다.

    “왜? 정부가 언론사를 강압적으로 정복하는 거 같냐?”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너무 강도가 세서요.”

    “흐흐, 이제 질린 것일 수도 있지. 네 그늘에서 정부가 벗어나질 못하고 있으니까. 당장 북한과의 관계를 봐라. 너 아니었으면 그 정도로 관계가 진척되지도 않았을 거야. 그런데 이놈들이 은혜도 모르고 개기는 거지.”

    난 잔을 비운 성일환에게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대통령의 지시입니까? 아니면 여당 쪽?”

    “둘 다야. 대통령도 은밀히 지시를 내렸고, 여당 쪽에서도 슬그머니 움직이는 거지. 그리고 이 일에 뜬금없는 사람 하나가 개입되어 있어.”

    “뜬금없는 사람이요?”

    “그 있지 않냐.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대마 그룹 회장까지 되었던 양반.”

    아, 누군지 알 것 같다.

    설마, 그 사람인가?

    “이영학 회장이요?”

    “그래. 그 양반. 지금은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의원 도전했다가 험한 꼴 보지 않았냐.”

    대마 그룹 전 회장 이영학은 정치계에 출범했다가 불법 선거자금으로 인해 자격이 박탈되었다. 하지만 몇 년 후에 그는 서울 시장으로 당선되어 화려하게 복귀를 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이 흐르고 난 뒤에는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그 사람이 왜요?”

    “그 양반이 정부와 손을 맞추고 있는 것 같아. 그래도 그 양반이 가지고 있는 돈은 많지 않냐? 그걸로 언론사에 뿌리면서 자시 편으로 끌어들이는 거지.”

    대충 각이 나온다.

    이영학은 정부와 함께 언론을 장악해 영향력을 늘리려는 것이다.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언론이 아니던가?

    언론에서 어떤 말이 나오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미래가 달라진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어떡할래?”

    “어떤 걸요?”

    “다 뒤집어 깔 거냐? 이건 사실상 정부가 너한테 도전장을 내민 거야. 그동안 쥐 죽은 듯이 살다가 어느 정도 힘을 가졌으니까 한번 해보자는 거지. 여기서 삐끗 잘못하면 포토 존에 설지도 모른다, 흐흐.”

    검찰청 포토 존이라.

    성일환은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그가 웃을 수 있는 건 결코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화진파의 모토가 뭐였습니까. 덤비는 놈은 그 자리에서 박살 낸다, 아닙니까? 슬슬 빠지고 있는 군기를 다시 채워줄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내 말에 성일환은 좋아 죽는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내가 외국에 가 있는 동안 터치를 하지 않았더니 정부가 슬그머니 내 머리 위로 올라서려 한다. 이들에게 한 번쯤 회초리를 들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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