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나라의 주인 (2)
부시는 이 기분을 이루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백악관에서 생활할 때부터 꿈을 키워왔다. 나도 언젠가 아버지처럼 이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른 것도 아닌, 미국의 대통령이지 않은가.
세계 최강이며 세계 최고로 부유한 국가가 바로 미국이다.
이 자리까지 올라오기 위해 부시는 많은 일을 겪어야 했다.
돈으로 세계를 주무르고 있는 재벌들에게 굽실거려야 했고 자존심을 버려야 했다.
정적을 제거하는 데에 있어서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똥과 피를 묻혀가며 얻은 자리.
고생은 끝났고, 이제 자신의 시대를 열어갈 일만 남았다.
그동안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던 재벌들이 자신 앞에 허리를 접게 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들뜨고 있었다.
빌어먹을 재벌 놈들.
이제부터 누가 이 나라의 최강이며, 주인인지를 똑똑히 보여줄 참이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지? 여긴 백악관 방향이 아닌 것 같은데.”
타고 있던 차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 수행원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통령님께서 만나 뵐 분이 계시기에,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만나 뵐 분?”
“예, 역대 대통령들께서 관례처럼 하는 일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역대 대통령들이 관례처럼 하는 일이라니?
“난 그런 게 있다는 걸 들어본 적이 없는데?”
“저도 그런 게 있다는 걸 최근에 알았습니다. 성서에 손을 올리고 맹세를 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하더군요. 물론, 국민들 중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지만요.”
부시는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리무진에 타고 있는 수행원들을 살펴보았다.
저들은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고 있다. 부시 혼자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보게들. 말을 좀 해봐. 내가 지금 누굴 만나러 가는 거야?”
“도착하면 알게 되실 겁니다, 대통령님.”
“아니, 미국 대통령이 누굴 만나려고 이렇게 직접 차까지 타고 간다고? 정 보고 싶으면 그쪽이 오면 될 거 아니야.”
“대통령님보다 높으신 분입니다. 당연히 대통령님께서 찾아가셔야죠.”
“뭐, 뭐야? 대통령보다 높아?!”
부시는 눈을 희번덕하게 뜨며 언성을 높였다.
“이 나라에서 대통령보다 높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아니, 전 세계를 통틀어 미국 대통령보다 높은 놈은 없다고! 그런데 그게 무슨 개소리야!”
부시가 발악을 하며 난리를 피워도 수행원들은 계속 저 자세였다.
이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서 차 돌려! 당장 멈추라고!”
“그럴 수 없습니다.”
“뭐야? 난 이 나라의 대통령이야! 감히 내 명령을 거부해?”
“그분의 뜻을 거역할 순 없으니까요.”
“이, 이것들이!”
부시가 강제로라도 차를 돌리려 하자 옆에 있던 수행원이 권총을 꺼내 그의 관자놀이에 겨누었다.
“뭐, 뭣…….”
“부디 진정해 주십시오, 대통령님.”
어찌 이런 일이!
천하의 미국 대통령에게 총을 겨누다니. 그것도 몸을 던져서라도 자신을 막아야 할 수행원이 말이다!
“이, 이봐. 난 이 나라의 대통령이야. 총을 겨누는 건 중죄에 해당한다고.”
수행원은 부시를 매섭게 노려보며 겨누던 총을 거두지 않았다.
결국 부시는 찍소리도 못 하고 차가 도착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야 했다.
이윽고 차가 도착하면서 부시는 뜻밖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아니, 당신들도 온 겁니까?”
“어서 오십시오, 대통령님.”
공화당 대표를 시작으로 부시의 수뇌부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거기에는 부시가 가족처럼 여기는 가까운 사람들도 섞여 있는 게 아닌가?
“당신들도……?”
“대통령님, 안으로 드십시오.”
어제만 하더라도 자신 앞에서 꼬리를 살랑거리던 사람들이 오늘은 매우 강압적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혹시 이거 서프라이즈 파티, 뭐 이런 건가? 그런 거라면 여기서 그만들 해. 재미없으니까.”
부시는 딱딱한 이 분위기를 헤쳐 나가려 했지만, 누구 하나 그의 장단에 맞춰주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모두 장난이나 치려고 모인 게 아닙니다, 대통령님. 어서 들어가십시오.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다려? 누가?”
“들어가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도대체 누가 미국의 대통령을 오라 가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부시는 반쯤 겁에 질려 있는 간부들의 손에 떠밀려 억지로 안에 들어가야 했다. 마치 지하 감옥처럼 어두컴컴한 계단을 따라 내려가 다다른 곳은 핵전쟁을 대비해 만들어진 벙커였다.
끼익-
굳게 닫혀 있던 벙커 문이 열리고 부시는 수행원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쪽입니다.”
마침내 도착했는지, 문 하나를 두고 수행원들은 뒤로 물러났다.
여기서부터는 부시 혼자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문고리를 잡았다.
과연 어떤 놈이 감히 이런 짓을 꾸몄는지 똑똑히 봐줄 생각이다. 그래야 다음에 보복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반갑습니다, 대통령님.”
문이 열리고, 부시는 익숙한 목소리와 얼굴에 깜짝 놀랐다.
“다, 당신은…….”
“설마, 제 얼굴을 잊으신 건 아니겠죠?”
전 세계의 부와 정치를 관장하고 있다는 미스터 블랙.
그가 거만한 자세로 집무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 * *
부시는 자신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공화당 대표와 수뇌부 사람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도대체 이게 다 뭐 하자는…….”
“차에서 수행원들이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대통령이 되셨으니, 관례상 만나 뵈어야 할 분이 있다고. 바로 저분이십니다.”
“뭐, 뭐요? 그런 관례가 있다는 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
고성을 지르는 부시에게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런 식은 아니었지만, 대통령님의 아버님께서도 저를 만나 많은 얘기를 했었죠. 클린턴 전 대통령도 여기서 저를 만났고.”
“크, 클린턴도?”
“뭐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미국이라는 영지를 맡은 영주가 되었으면 당연히 왕에게 달려와서 인사를 올리는 게 예의 아닌가요?”
“영주? 거기다가 왕이라고? 이보시오! 말을 할 게 있고 가려서 해야 할 게 있지. 감히 어디서 그딴 소리를!”
아직도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건가.
난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어지간히 꼴통이네. 뭐,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그 자리에 올린 거긴 하지만.”
“……!”
“기억 안 나? 네가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해서 우리한테 쪼르르 달려와 빈 거였잖아. 그래서 지금 대통령 자리까지 우리가 밀어준 거고. 만약 골든 연합의 도움 아니었으면 너 같은 새끼한테 그 자리가 가당키나 한 거 같아?!”
나도 똑같이 언성을 높이니, 부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안색을 굳혔다.
“너는 내 돈과 내 힘으로 그 자리에 앉은 거야. 그럼 감사하다고 백 번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어디서 감히 개새끼가 주인을 보고 짖나!”
모욕적인 언사에도 부시는 이미 겁을 잔뜩 먹어 압도되었는지 뭐라 반발을 하지 않았다.
난 술잔을 들이켠 다음 말을 이었다.
“미국 대통령이 되면 세계를 다 가진 것 같지? 아니야. 내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널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어. 명심해. 내가 널 거기로 보낸 건 충실히 내 개 노릇을 하라는 뜻이야. 만에 하나 딴짓을 하기라도 한다면 내가 널 가만두지 않아. 대통령 된 지 하루 만에 잘리고 싶지 않으면 행동 잘하라는 거야.”
그래도 대통령이 주는 무게감이 조금은 남아 있는 것일까.
부시는 애써 말문을 열었다.
“나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오. 함부로 날 끌어내릴 수는…….”
하지만 나는 그 실낱같은 희망을 철저히 부숴 버렸다.
“닥치고 그거나 읽어, 이 한심한 사람아.”
부시는 붉어진 얼굴로 내가 던진 서류를 받아 한 장씩 넘겨가며 보았다. 차츰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경악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잘 봤지? 네 동생 놈이 주지사라는 힘을 이용해 플로리다에서 부정선거를 했다는 증거들이야. 가뜩이나 지금 국론이 분열되고 있잖아. 네가 부정선거를 했다면서. 그런데 그게 터지면 어떻게 될 거 같냐?”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건 다 날조된 증거입니다!”
“날조? 정말 날조라고 생각해?”
“그건…….”
선뜻 답을 하지 못한다.
본인 스스로도 께름칙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거 터지면 탄핵은 물론, 네가 영원히 연방 감옥에서 썩는 건 일도 아니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무슨 뜻인지 알지?”
“…….”
꿀 먹은 벙어리처럼 부시는 넋을 잃은 채 서류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똑똑히 기억해. 내가 널 거기로 보낸 건 어깨에 힘주라는 뜻이 아니야. 네가 거기 있는 건 내 명령대로 이 미국을 다스리기 위함이라고. 이미 도처에 내 사람들로 깔려 있어. 당장 너를 지키는 경호원들부터 시작해 저 수뇌부들까지.”
부시는 자신의 뒤로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그를 보필하던 사람들도 섞여 있으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막대한 돈과 힘 앞에서는 가족도 눈에 보이지 않는 법.
하물며 정치를 하는 사람들에게 의리라는 것이 있겠는가?
이들은 철저히 강한 사람들 곁에 다가가 붙는 습성이 있다.
“저 사람들이 앞으로 당신을 철저히 감시할 거야. 허튼짓하나 안 하나 지켜보려고. 알겠어? 괜한 짓 하다 걸려서 험한 꼴 보지 말고, 내가 던져 준 그 자리에 감사하며 지내. 내가 시키는 건 뭐든지 하고. 안 그러면 그 서류가 미국 언론사 전체에 들어가게 될 거야.”
저 서류가 넘어가면 부시의 정치 인생은 거기서 끝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부정선거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가장 치명적인 실수를 부시가 저질렀다는 것이 국민들에게 알려진다면?
미국 전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날 건 불을 보듯 뻔하다.
“하지만 내 말에 따라서 잘만 행동한다면 앞으로 8년 동안은 그 자리 지킬 수 있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4년도 아니고 8년이라고 말했다.
그 뜻은 재선에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부시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비록 허수아비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미국 대통령이다.
“왜 대답이 없지? 침묵은 긍정을 뜻한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꼭 반항을 하는 것 같아서. 혹시 대통령 자리가 질려 버렸나?”
“아, 아닙니다.”
“그럼 어서 대답하지 않고 뭐 해? 내가 여기서 시간을 축내고 있어야겠어?!”
“아,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잘하겠습니다.”
얼떨결에 대답한 부시는 얼굴에 수치심이 가득해 보였다.
미국 대통령이 된 순간, 세상 모든 걸 가졌다고 생각했을 텐데 막상 현실은 허수아비 노릇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허탈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가 원하던 길이 아니던가?
미국 대통령이 되는 일.
이것이 그가 젊은 날 평생토록 원하던 일이다. 하지만 언제나 꿈과 현실은 다른 것이 세상사. 부시는 지금이라도 그 냉혹한 현실을 깨달아야 한다.
“난 두 번 기회를 주는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실수하지 않게 조심해. 물론, 내가 사사건건 간섭하진 않아.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해. 대신, 뭔가 사고를 치려면 내게 미리 말을 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내가 오해해서 칼을 잘못 휘두를 수도 있으니까.”
하고 싶은 걸 하라고는 했지만, 허락은 맡아야 한다.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독단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시는 체념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제 나가 봐. 앞으로 우리가 단둘이 볼 일은 거의 없을 거야. 네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없는 한.”
“예…….”
부시가 밖으로 나가면서 공화당 대표와 수뇌부 인사들이 남게 되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들의 활약을 기대하겠습니다. 부디 이 나라를 위해 열심히 봉사해 주시길. 그럼, 그에 따른 보상이 있을 겁니다.”
내 말대로만 잘 한다면 충분한 돈이 내려진다는 것이었다.
줄곧 굳어 있던 그들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졌다.
이제 부시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