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223화 (223/325)

223화. 거부할 수 없는 거래 (1)

“그놈이 그렇게 말했다고?”

“예, 총리님. 면목 없습니다.”

SVR 국장은 푸틴의 오른팔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앞으로의 독재정치를 위해서라면 피를 흘리는 일이 많지 않겠는가?

과거에도 SVR은 푸틴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며 수많은 피를 묻혔다. 그렇기에 항상 푸틴 앞에서는 당당했다. 그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으니까.

하지만 오늘만큼 수치스러운 날이 없다.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겠다.

“역시, 보통이 아니군.”

푸틴은 휘파람을 불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라도 요원들을 보내 그놈을…….”

“쓸데없는 짓이야. 그놈은 미국 대통령보다 더 삼엄한 경호를 받고 있어. 철저히 대비를 하고 있는 거지. 설사 우리가 성공했다고 해도 그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거야.”

대놓고 핵폭탄을 터뜨리겠다고 협박을 한 놈들이다.

정상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내가 너무 그놈을 무르게 봤어. 한낱 마피아 보스라고만 생각한 게 큰 오산이었지. 사람들이 미스터 블랙, 미스터 블랙 하고 말할 때 경계하지 않은 게 내 실수야.”

“총리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면? 자네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뾰족한 수라도 있나?”

“그게…….”

“한동안 올라가 있던 내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있어. 내가 한 짓도 아닌데, 마치 내가 한 일처럼 저놈들이 몰아가고 있으니까. 뭐, 지지율로 문제를 삼진 않겠지만 경제가 파탄 날 지경에 이른 건 빨리 수습을 해야 돼. 안 그러면 소련 붕괴가 다시 한번 재현될 수도 있으니까.”

제2의 소련 붕괴라.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소련이 붕괴되고 나서 얼마나 크고 작은 내전이 일어났던가.

같은 동족끼리 총칼을 맞대고 싸우는 것만큼 고역인 게 또 없을 것이다.

“그럼… 미국으로 건너가실 겁니까?”

“한 남자의 개인사라면 충분히 자존심을 내세울 수 있어. 하지만 지금 나는 이 나라를 대표하는 총리다. 나라가 위기에 빠졌고 국민들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어. 그들을 위해서라면 이깟 자존심, 필요하지 않아.”

“초, 총리님.”

“고개를 숙여야 하면 고개를 숙인다. 그것이 이 나라와 국민을 위한 일이라면 몇 백 번이고 난 할 수 있어. 물론, 내 이 수모는 결코 잊지 않을 거야. 자네도 잊지 마.”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모든 건 총리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고개를 숙인 국장의 어깨를 푸틴이 두드려 주었다.

“아니야,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내 잘못이지. 처음부터 그놈들을 먼저 도발한 내 잘못. 자네는 아무 잘못 없어.”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오며 수많은 정적을 제거한 푸틴이다.

항상 당당했고, 그 당당한 만큼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오늘 집무실을 떠나는 푸틴의 뒷모습은 한없이 작아 보였다.

* * *

위대한 미국을 만들기 위한 초석.

그것은 부시가 대통령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라며 언론사들이 떠들어댔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 이후 민주당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은 상태.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공화당이 승기를 잡아 몰아치는 중이다.

이미 재벌들도 부시에게 표를 몰아주고 있으니, 당선은 확실시될 터.

“임기 말입니다. 임기 초도 아니고 임기 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러시아 총리의 방문이라니요?”

하원의장 피터 와슨은 열변을 토하며 내게 성토했다.

러시아 총리, 푸틴의 갑작스러운 미국 방문 일정이 잡히면서 급히 내게 달려온 것이었다.

“맞습니다. 곧 있으면 대선이고, 백악관의 주인이 바뀔 텐데 러시아 총리가 급작스럽게 방문을 하는 것은 좀…….”

한 명은 빌 클린턴의 사람인 하원의장. 다른 하나는 부시를 뒤에서 밀어 주고 있는 공화당 대표 빌리 오스밀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뉴스에서 서로 까기 바쁘던 양반들이 지금은 손을 잡고 단합해 내게 따지고 있었다.

난 피식 웃으며 공화당 대표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봐요, 대표님.”

“예, 회장님.”

“지금 러시아 총리가 왜 오는지 몰라서 묻는 거요?”

“그게…….”

“이번에 당신들도 잘 알고 있겠지. 지금 러시아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전 세계의 개미들이 모든 분노를 러시아에게 풀고 있어. 푸틴은 그걸 풀려고 오는 것이고. 솔직히 그 사람도 억울하지 않겠어? 내가 일방적으로 때린 건데 욕이란 욕은 혼자 다 먹고 있으니까.”

내가 일방적으로 때렸다는 걸 분명히 밝혔다.

러시아가 내 손에 놀아났다는 걸, 아니, 전 세계가 내 손에 놀아났다는 걸 밝히는 셈이었다.

모든 개미들이 나의 장단에 맞춰 돈을 쏟아붓지 않았던가?

단순히 개미들만이 아니다.

각 국가에 있는 투자사들도 뭐 모르고 돈을 투입했다가 큰 낭패를 보았다.

이것이 내 작품이라는 것을 이들이 모르겠는가?

“난 지금 당신 후보님을 도와드리는 거요.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데 러시아 총리가 떡하니 나타나서 언론 플레이 몇 번 해봐. 미국의 위상도 올라가고 부시 후보의 위상도 함께 올라가지 않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빌리 오스밀이 말을 끌기 무섭게 내가 선수를 쳐버렸다.

“똑바로 생각해서 말해. 당신이 말 한마디 잘못하는 순간 빌 클린턴처럼 부시도 내가 가만두지 않아. 내가 대선 막판에 판도 한번 뒤집어볼까?”

“회, 회장님!”

두 사람의 표정이 순간 뒤바뀌었다.

한쪽은 혹시 모르는 희망감에.

다른 한쪽은 크나큰 두려움에.

“빌 클린턴 스캔들이 내 손 안 거쳤으면 터지지도 않았어. 그런데 내가 그걸 왜 그냥 터지도록 놔둔 줄 알아? 민주당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어댔기 때문이야. 그래서 이번에는 기회를 공화당에게 던져 준 거라고. 그런데 앞뒤 분간할 줄도 모르는 놈들이 감히 내 앞에서 따지고 들어?!”

빌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은 언론에 타기 전에 이미 오래전부터 내 재가를 기다려 왔다.

난 정권을 잡고 있던 민주당의 동향을 보다가 적절한 시기에 터뜨린 것뿐이고.

솔직히 내가 허락을 하지 않았더라면 민주당은 그대로 다음 정권을 이양할 수 있었을 터. 그러나 골든 연합의 영향력을 자꾸만 끊어놓으려 하는 민주당의 수작 때문에 나는 역사의 흐름대로 다음 정권을 부시에게 넘기는 것이다.

“회, 회장님.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당신은 일단 입 닥치고 있어. 그리고 하원의장.”

“아, 예. 회, 회장님.”

“대통령한테 잘 말해. 정권 다 끝나가는 끝 무렵에 나대지 말라고. 아무리 대통령 자리가 주는 권한이 많다고 하지만, 내가 민주당을 지금의 자리까지 끌어왔어. 내 돈과, 내 힘으로 말이야! 주인을 몰라보고 개겼을 땐 애교로 넘어갔지만 내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면 정권 끝나고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고.”

이들은 내 힘을 잘 알고 있다.

차곡차곡 쌓아온 힘이지 않은가?

이미 공권력은 골든 연합의 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한다. 그것을 알기에 민주당은 오래 전부터 조금씩 검찰과 경찰 내부의 사람들을 바꿔왔다. 또한 군부 쪽도 개편을 시작해 골든 연합 소속이 아닌 자들을 걸러내는 작업까지 은밀히 진행했다.

물론, 그건 귀여운 발버둥에 불과하다.

다니엘 로페즈는 포괄적으로 영향력을 쌓아왔다.

촘촘한 그물망처럼 미국을 덮어버린 골든 연합의 영향력은 단순히 직책 몇 개 바꾼다고 해서 벌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재벌들의 모임까지 주도하고 있는 골든 연합이다. 아무리 직책을 바꾼다고 한들 그들이 돈의 힘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민주당도 포기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민주당 내부에도 골든 연합의 충견들이 참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막대한 자금이 공화당과 민주당에 들어갔다. 어디 하나라도 터지면 당 자체가 폭발할 정도로 말이다.

“뭘 그렇게 멍청하게 앉아 있어? 얼른 가서 국빈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지. 싫으면 싫다고 나한테 말해. 대신, 너부터 그 밑에 있는 놈들까지 전부 연방 감옥에 갇힐 준비하고. 죄가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내가 처넣어줄 테니까.”

“…….”

하원의장은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밖을 나갔다.

이제 남은 건 공화당 대표였다.

그는 잔뜩 긴장한 자세로 뻣뻣하게 허리를 폈다.

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대표님.”

“예. 회, 회장님.”

“시작 전부터 이렇게 삐걱거리면 앞으로 재선은 어떻게 하시려고? 임기 시작부터 레임덕 걸리는 건 후보님도 싫지 않겠습니까?”

“무, 물론입니다.”

“이런 말하면 치사한 건 알겠는데, 내가 갖고 있는 자료 하나만 밖으로 유출돼도 부시 후보는 백악관 못 갑니다. 그러니까 똑똑히 전하세요. 내가 깔아놓은 꽃길만 잘 걸으라고. 그럼 문제없이 임기 잘 마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언제 사사건건 대통령이 하는 일에 끼어든 적 있습니까?

정경유착이 심하다고는 하지만, 나는 정권이 하는 일에 크게 반대를 하거나 끼어든 적은 거의 없다. 어차피 그들도 내가 하는 일에 반대하거나 끼어든 적은 없으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문제를 삼으면 나도 가만있을 순 없다.

그래서 내가 경고를 주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끼어들면 앞으로 부시가 하는 모든 일에 내가 끼어들겠다고.

빌리 오스밀도 오랫동안 정치판에서 구른 사람이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알아들었을 터.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회장님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그럼 다행이군요. 잘 전해주십시오. 차라리 이번 기회를 잘 이용해서 더욱더 지지율을 높여놓으라고 말입니다.”

“예, 회장님. 그럼…….”

공화당 대표까지 수긍하고 나갔으니, 이제 푸틴은 정상적으로 미국까지 날아올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언론의 눈 때문에 클린턴 대통령과 악수도 나누고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긴 하겠지만, 언론의 눈이 없는 밤에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땐 우리 둘만의 거래가 시작될 예정이다.

* * *

“방문을 환영합니다, 총리님.”

“반갑게 맞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총리만 오기에는 모양새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러시아 대통령이 푸틴과 함께 미국 땅을 밟았다.

냉전 시대 종결 이후 좀처럼 미국으로는 방문하지 않았던 두 정상이 클린턴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며 반갑게 인사를 하는 장면이 TV를 타고 중계되었다.

몇 달 후면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오게 될 양반이 어쩌면 끝 무렵에 좋은 일 하고 가는 것일 수도 있다.

줄곧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던 미국과 러시아이지 않은가?

이 둘이 서로 원만하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걸 보인다면 빌 클린턴으로서는 썩 나쁘지 않은 평가로 남게 될 것이다.

그걸 모르고 하원의장을 보내 징징대는 꼴이라니.

나는 TV에 중계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언제쯤 출발하실 예정입니까?”

“조금만 더 있다가요. 어차피 두 사람도 할 얘기가 그리 많진 않을 텐데. 얼른 제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클린턴이 푸틴과 나눌 이야기가 뭐 있겠는가?

이제 뒷방 늙은이로 밀려날 신세인데.

그에 반해 푸틴은 아주 할 말이 많다.

물론, 클린턴에게 아니라 바로 내게 말이다.

난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렸다.

저녁 만찬이 끝나면 그때 내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자, 푸틴 저놈을 이제 어떻게 삶아줘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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