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월가의 신 (1)
라노프 샤이에르가 붙잡혀 있는 곳은 우습게도 널찍한 스위트룸이었다.
그래도 러시아 3대 레드 마피아 중 하나를 이끌고 있는 수장이니, 나름 격식은 차려주었다고 봐야 하나?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라노프 샤이에르의 망가진 몰골을 보니 그냥 던져놓을 곳이 없어 이런 곳에 던져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야? 이 정도면 죽은 거 아니야?”
로이의 물음에 조직원들은 애써 눈을 피했다.
“그래도 말은 할 수 있겠지?”
“예, 카포.”
“좋아, 그럼 진득하게 대화나 좀 해보자고.”
로이가 자리에 앉아 잔에 술을 따랐다.
“영어는 할 수 있나?”
“…….”
로이의 눈초리를 받은 조직원 하나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라노프 샤이에르의 뒤통수를 때렸다.
“하… 할 수 있소.”
“그래, 그런데 어떻게 산 거야? 내가 아주 거하게 갈겨 버렸는데. 그 지옥 불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나?”
“…그때 다른 층에 있어서 살았소.”
대충 각이 나온다.
꼭대기 층에서 논 게 아니라 다른 층에서 여자들을 끼고 놀다가 목숨을 건진 것이었다.
“그럼, 그때 빨리 도망갔어야지. 이렇게 붙잡혀 오면 어떡해?”
“…….”
할 말이 없는지 라노프 샤이에르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꼴을 보니 호텔 위로 올라오던 조직원들과 한바탕 싸운 모양이다.
로이는 들고 있던 잔을 깨끗이 비운 다음, 말을 이었다.
“여기서 죽는 건 바라지 않을 테지?”
“…그렇소.”
“나도 여기서 피 볼 생각은 없어. 이런 좋은 룸에서 피 튀기는 건 여기 호텔 지배인한테도 실례잖아. 이런 방에서 자게 될 사람들은 또 무슨 죄야? 레드 마피아 수장의 귀신이 든 스위트룸이라고 하면 다들 질겁할 걸?”
“할 말 있으면 해보시오. 어차피 내 목숨 줄 쥐고 있는 건 그쪽이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최대한 맞춰보겠소.”
라노프 샤이에르는 이미 전세가 기울었다는 걸 알고 있다.
장기의 룰처럼 왕이 잡히면 끝이 아닌가?
“워커, 이제부터 네가 말해. 이런 쪽은 네가 전문이잖아.”
로이가 내게 바통을 넘겼다.
나는 참혹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라노프에게 말했다.
“목숨을 건지고 싶다면 그에 대한 대가는 있어야겠죠. 제가 알고 싶은 건 체첸 마피아의 핵심이 되는 간부들의 명단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위치까지요.”
“그걸 지금 바로 준비해 달라는 거요?”
“예, 그러나 잠깐이라도 풀어드릴 순 없습니다. 다 잡은 대어를 다시 바다에 풀어놓는 미친 짓을 제가 할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럼 내가 무슨 수로 그 명단을 줄 수 있다는 거지?”
“다는 못 받아도 됩니다. 알고 있는 것만 받겠습니다.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하죠. 그동안 당신은 여기서 푹 쉬면 됩니다.”
모든 명단을 받을 순 없어도 일부분만 알고 있으면 나머지는 계속 캐나갈 수 있다.
한 놈을 잡아서 캐묻고, 다시 한 놈을 잡아서 털어가다 보면 깨끗하게 정리가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날 죽일 속셈이겠지? 내가 살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데 왜 그걸 말해야 돼?”
라노프는 지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가 언제든 목숨을 끊어놓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체첸 마피아의 수장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주다니. 조금은 실망이다.
“당신 목숨은 제가 보장합니다.”
“네가 뭐라고 내 목숨을 보장하지?”
“미스터 블랙이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순간 라노프의 얼굴이 굳어졌다.
침묵은 곧 긍정을 뜻한다.
“그게 바로 접니다. 골든 연합의 이름을 걸고 당신 목숨은 제가 보장하죠. 그리고 어차피 전 처음부터 당신을 죽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우리 연합이 러시아를 장악하게 되면 이 드넓은 땅을 어떻게 혼자 관리한단 말입니까?”
“바지 사장으로 나를 세우겠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관리인으로서 대우를 해드리겠습니다. 중국에도 그런 역할을 하는 분들이 여럿 있으니까요. 결코 나쁜 제안은 아닐 겁니다.”
“거절한다면?”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제가 좀 지독한 구석이 있어서요.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당신을 고문하고 또 고문하겠죠. 그 과정 속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사람이 없었어요.”
라노프는 내 뒤에 있는 조직원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저들의 눈에 담긴 광기를 읽은 모양인지, 그는 입술을 꾹 깨물다 말문을 열었다.
“세바스첸코 베로스키. 내 오른팔이오. 웬만한 정보는 이자한테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그래도 고문을 받아가며 버텨낼 줄 알았는데, 자기 살길부터 연다.
하긴, 솔직히 누가 고문을 버텨내며 남을 지키려 들겠는가?
자신의 피가 섞인 가족이 아닌 이상 그런 큰 결정을 내리는 건 쉽지가 않다. 그리고 이놈은 지금 라인을 아주 잘 탄 거다.
그 끔찍한 고문을 피한 것만으로도 평생 감사해야 할 터.
“잘 알겠습니다. 여기 있는 조직원들에게 정확한 위치를 넘기시면 됩니다. 그 사람을 한번 털어보고 나오는 게 있는지 보도록 하죠.”
라노프는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죄책감보다는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안도감이 훨씬 커 보였다.
“로이, 이대로 진행하면 될 거 같은데요?”
“정말? 저 새끼 죽이는 거 아니었어? 우리가 저 새끼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밖으로 끌려 나가는 라노프를 가리키며 로이는 분통을 터뜨렸다.
원래 계획은 산 채로 잡아서 살과 뼈를 분리하려 했던 모양이다.
“놔두세요. 이 일을 잘 끝내놓는다고 해도 수습을 하는 데에 시간이 꽤 걸릴 거예요. 그때 저놈을 잘 활용하면 되잖아요.”
“그리고 쓸모가 없어지면 그때 복수를 하면 된다?”
“예, 그렇죠. 그땐 칼로 찔러 죽이든 삶아 죽이든 로이가 맘대로 하세요.”
“흐흐, 아주 기쁘게 기다려 주지.”
목숨을 위협했던 놈이다.
써먹을 대로 써먹은 다음 그 후에 복수를 할 것이다.
한번 쌓인 한은 풀 때까지 묵혀놓는 것이 골든 연합의 뒤끝 아니겠는가?
“이건 이거대로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그 오른팔이란 놈부터 잡아서 족치면 되겠지. 그나저나 슬슬 너도 정부에 압박을 줘야 하지 않겠어?”
“러시아 정부에요?”
“그래, 푸틴 그 새끼가 너무 기세등등한 게 마음에 안 들어. 우리 자본 있는 거 다 때려 박아서라도 골든 연합에 협조를 하도록 만들어야지.”
그렇지 않아도 나도 그럴 생각이었다.
단지, 준비하는 시간이 좀 필요했을 뿐.
“대통령 선점하는 것도 끝났으니 미국 쪽은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을 겁니다. 슬슬 러시아 쪽에 외국 자본을 투입할 때가 되었죠.”
“흐흐, 미국에 있는 자본이면 푸틴 그놈도 후들대겠지?”
“어마어마한 투기 자본이니까요. 후들대다 못해 간담이 서늘할 겁니다.”
내가 최대한 외국 자본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놔둔 것은 일단 미국 월스트리트부터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다니엘 로페즈와 미국 리턴 컴퍼니를 총괄하고 있는 김아름.
리턴 컴퍼니는 아예 금융 쪽으로 방향을 돌려 리턴 쉐어즈를 운영하는 중이다. 그리고 다니엘 로페즈가 은밀히 도움을 주어 월스트리트는 리턴 쉐어즈의 세상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자본력을 키워놓았다.
골드만삭스, J.P 모건, 모건 스탠리,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원래대로라면 월스트리트를 주름잡아야 할 투자 은행들이 지금은 모두 리턴 쉐어즈 발아래 놓여 있다.
골드 마피아의 압박도 압박이지만, 미국 정치계를 주름잡고 있는 골든 연합이 리턴 쉐어즈의 뒤를 봐주고 있으니 누구도 대항할 생각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끽하다가는 목숨도 날아가고 회사 전체도 공중분해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골든 연합에게는 충분히 있으니까.
이미 미국을 점령하고 아시아까지 세력을 뻗친 곳이 아닌가?
추월하기에는 너무 큰 격차가 놓여 있다.
“푸틴, 그 사람은 강단이 있는 사람입니다. 절대 자존심을 굽히려 하진 않을 거예요.”
“나라 전체가 흔들려도?”
“자존심은 끝까지 지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합니다. 자본으로 흔들어놓고 푸틴과 동등한 위치에서 다시 거래를 하는 거죠.”
“동등한 위치라……. 하긴, 그놈은 너무 우리 위에서 놀려고 했어. 끌어내려 줄 때가 되긴 했지.”
우리가 힘이 없어서 푸틴에게 고개를 푹 숙였겠는가?
적당한 타이밍이 오기를 기다렸고 체첸 마피아를 전복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 지금이 바로 그 시기라고 여긴 것뿐이다.
“이건 제가 알아서 해결을 보겠습니다. 그동안 로이는 힘 좀 써주세요.”
“걱정 마. 이 기세를 몰아서 아예 체첸 마피아를 다 불태워 버릴 테니까.”
힘으로 하는 일은 로이에게 맡겼다.
이제 진짜 무서운 힘을 사용하는 건 내 차례다.
어마어마한 외국 자본이 러시아에 투입되었을 때 과연 푸틴이 어떤 얼굴을 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 * *
“이거,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괜히 미안하네요. 김아름 씨.”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리턴 컴퍼니의 CEO로 이 거대한 제국을 운용하고 있는 김아름.
예전에는 이 정도로 그녀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걸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있다.
이 여자가 아니었다면 리턴 컴퍼니가 이 정도로 크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나와 다니엘 로페즈의 전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능력이 없으면 감당할 수 없는 크기다.
“안으로 드시지요.”
이번에 뉴욕으로 사옥을 옮겼다고는 보고를 받았는데, 이 정도로 높은 빌딩에 고급스러움을 담아낼 줄은 몰랐다.
벽 곳곳에 걸린 액자들과 로비를 장식하고 있는 조형물들은 결코 푼돈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폼에 살고 폼에 죽는 곳이 바로 월스트리트 아니던가?
월가를 장악하는 회사인 만큼 상당한 돈을 들여 인테리어를 했을 것이다.
“여기가 회장실입니다.”
태혁이 경기 때문에 몇 번 미국을 방문하긴 했지만, 그때까지는 아직 공사 중이라 새로운 회장실을 구경하지 못했다. 나는 기대감을 품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이건 뭐… 거의 7성급 호텔 스위트룸 수준 아닙니까?”
“그것보다 더 좋게 만들어놓았습니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실 때에는 이쪽 버튼을 누르시면 됩니다. 비밀번호를 누르시면 여기 서재가 열리게 되는데, 프라이빗 룸이라 전자 기기는 절대 쓸 수가 없도록 철저히 막아놓았습니다.”
도청이 절대 통하지 않는 프라이빗 룸.
꽤 유용한 곳이다.
나는 상상 이상으로 잘 꾸며져 있는 회장실을 구경하며 어느 정도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차 한 잔을 다 비울 때쯤 김아름이 일 이야기를 꺼냈다.
“러시아로 진출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언질을 준 적이 없지만, 소문이 빠르다.
월가 최고의 회사라서 그런가?
“예, 알고 계시는군요.”
“월가에서는 이미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다른 투자사들이 경계를 하고 있고요”
“리턴 쉐어즈가 월가를 어느 정도 장악하고 있습니까?”
“65%입니다.”
대단한 수치다.
수천수백조 원의 돈이 굴러다니는 월가를 65%나 장악하고 있다니.
이 정도면 월가의 드래곤이 아니라 월가의 GOD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
“그 정도 수치면 아시아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겠군요.”
외국인 투자에 의존하고 있는 아시아 시장이다.
월가가 작정하고 나선다면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전체가 무너진다.
그만큼 돈이 무섭다.
돈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니까.
“아시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러시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김아름은 이미 내 마음을 알고 있다.
내가 원하는 건 아시아의 멸망이 아니다.
돈이라는 무기로 러시아를 찌르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