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구사일생
“안 돼!”
타앙-!
진한 총성이 호텔 로비 안을 가득 채웠다. 이렇게 로이의 목숨이 끝나는 건가 싶었지만, 아직 로이는 멀쩡해 보였다. 물론, 하도 맞아서 꼴이 영 말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방금 전 총성은 뭐란 말인가?
“…뭐야?”
방금 전까지 로이의 머리통을 시원하게 날려 버리려고 한 남성은 되레 자신의 총이 바닥에 뒹굴고 있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가가 총을 쏴 맞춘 것이었다. 그것도 저 남자가 들고 있던 총을 말이다.
“키키킥-”
로이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너는 이제 뒤졌다. 흐흐.”
“뭐?”
로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성의 주변을 지키고 있던 조직원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타타탕-!
한 발에 한 명씩.
무차별적인 난사가 아니라 정확한 조준에 이은 격발이었다. 모두 머리통이 날아가는 것으로 보아 스나이퍼들이 사방에 깔린 게 분명했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모두 피할 새도 없이 총알이 날아온 터라 한 번에 당한 것이었다.
결국 남은 건 이 남성 하나였다.
“봤냐? 이게 네가 건드린 메데인 카르텔이야. 건드릴 걸 건드려야지, 새끼야.”
기절할 정도로 맞았으면서도 입은 끝까지 쉬지 않고 놀려댄다.
로이의 도발에 남성은 욕설을 내뱉으며 허리춤에 있던 다른 권총을 꺼내려 했다.
타앙-!
“크아악-!”
하지만 그걸 가만히 보고 있겠는가?
또 다른 총성이 울리면서 남성의 오른손이 터져 버렸다.
그가 울부짖으며 비명을 지를 동안, 메데인 카르텔의 조직원들이 안으로 모두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카포.”
동양인으로 보이는 조직원 하나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며 쓰러진 로이를 일으켰다.
그는 내게도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회장님.”
유창한 한국어다.
그렇다는 건 한국인?
“한국계 미국인이야. 영어, 한국어, 러시아어, 중국어 등 언어도 잘하고 이런 실력도 좋아. 잘 뽑았지?”
아직 말할 힘이 한참은 남아 있는지 로이가 친절하게 설명도 해주었다.
“김민재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새로운 인연인가.
아무튼,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로이는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김민재에게 명령을 내렸다.
“일단 위에 있는 놈들도 싹 다 처리해. 그리고 강철중 알지? 그 친구도 지금 간당간당하니까 어서 가서 구하고.”
“예, 카포.”
김민재는 조직원들에게 손짓해 경호 인력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위로 올려 보냈다.
“이놈은 이제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로이는 한껏 여유로운 표정으로 괴로움에 신음을 터뜨리고 있는 남성에게 다가갔다.
“크으으… 주, 죽여라.”
“죽여? 내가 너를? 하하. 웃긴 놈이네, 이거.”
남성은 죽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로이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남성의 얼굴을 추켜올리며 음산하게 말했다.
“감히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마음 편히 죽기를 바라는 건 너무 욕심 아닌가? 딱 죽기 직전까지만 고문하면서 평생 굴려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로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남성도 그의 눈에 담긴 살기를 느꼈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어.”
그런데 로이가 다른 옵션을 제시했다.
“선글라스, 널 보낸 보스가 있을 거 아니야. 그 새끼가 어디 있는지 말해. 그럼 살려는 줄게. 네가 원한다면 나를 위해 일하게 해줄 수도 있어.”
선글라스 남자는 눈을 깜빡이며 로이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저게 과연 진심인지, 아니면 미끼를 던지는 것인지 혼돈이 왔기 때문이다.
“뭘 그렇게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어? 그 새끼가 어디 있는지만 말하라니까? 아니면 이대로 우리 조직원들 손에 끌려가서 지옥 체험 한번 해보시든가.”
“그, 그건…….”
“안 되겠네. 야, 스티브.”
“예, 카포.”
김민재의 영어 이름이 스티브인가 보다.
로이는 선글라스 남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딱 죽지 않을 정도로 고문해. 네 마음대로 해도 좋아.”
“알겠습니다, 카포.”
김민재가 완력으로 끌고 가려 하자 선글라스 남성은 발버둥을 치며 얼른 태세를 전환시켰다.
“마, 말하겠습니다!”
“말한다고?”
“예, 그리고 카포를 위해 충성을 다할 생각도 있습니다!”
완벽한 태세 전환이다.
로이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주 마음에 들어. 나는 학연 지연 이런 거 안 따지는 사람이야. 능력만 좋으면 누구든지 활용을 한다는 거지. 그러니까 어서 말해봐.”
남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알고 있는 모든 걸 술술 내뱉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 새끼가 모스크바 펠리스 호텔에 있다는 거지?”
“예, 거기가 체첸 마피아의 숨겨진 아지트입니다. 거기 꼭대기 층이 보스의 것인데, 자주 그곳에 들락날락거리며 명령을 전달하곤 합니다.”
로이는 처음 들어보는 호텔 이름인지 김민재에게 시선을 옮겼다.
“모스크바 펠리스 호텔은 5성급으로 유명한 호텔입니다. 체젠 마피아가 운영하는 곳 중에 하나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거기 꼭대기 층에 그 새끼가 있다는 거지?”
로이의 물음에 남성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혹시 나를 속이려 하는 거라면…….”
“제가 어찌 감히 카포를 속이겠습니까! 이 목숨을 걸고 맹세합니다. 혹시라도 제 말이 거짓이면 언제든 죽여주십시오.”
“음, 좋아. 그럼, 이번에는 살려줄게.”
남성의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로이의 말에 김민재가 나섰다.
“카포, 안 됩니다. 감히 카포를 이 지경으로 만든 놈입니다.”
“응?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잖아. 살려줘야지.”
“그래도 이런 놈을…….”
김민재의 반대에 남성은 마른침을 삼키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죽이지 마. 대신, 살가죽을 다 벗겨 버려.”
“…예?”
남성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반문했다. 그런 그를 로이가 음흉하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네 살가죽을 다 벗겨 버릴 거야. 날 때렸으면 그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하, 하지만 분명히 살려준다고…….”
“내가 언제 죽인다고 했어? 살갗 벗긴다고 해서 사람 쉽게 안 죽어. 내가 그런 거 한두 번 해보는 줄 아나. 물론, 차라리 죽는 게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겠지. 그런데 약속은 약속이잖아. 살려는 줘야지.”
말을 마친 로이는 김민재에게 다시 명령을 내렸다.
“뭐 하고 있어. 이 새끼 데려가다 벗겨놔.”
“예, 카포.”
김민재는 한껏 신이 난 얼굴로 조직원들을 시켜 선글라스 남성을 끌고 가게 했다.
그는 발버둥을 치며 러시아어로 알 수 없는 말들을 쏟아냈지만, 우리는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모스크바 펠리스 호텔이라…….”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한 로이는 내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저녁이라도 먹을까?”
* * *
우리가 머물던 호텔 안은 그야말로 살육의 현장이었다.
우릴 기습하기 위해 몰려온 체첸 마피아 소속 조직원들은 전부 사살당했고 투숙객들도 난리에 휩쓸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한 가지 웃긴 점은 우리가 떠날 때까지 공권력 투입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체첸 마피아가 미리 손을 쓴 것일 수도 있지만, 아직 러시아가 마피아들의 나라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푸틴이 제대로 집권을 하면서부터 공권력의 힘이 강대해지는데, 그전까지는 마피아들이 거리를 점령해 공권력도 투입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죽은 줄 알았더니, 아직 안 죽었네.”
“제가 목숨 하나는 질깁니다.”
로이의 농담에 강철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관통상을 입고도 조직원 일곱 명을 칼로 죽이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참 대단한 양반이다.
“괜찮습니까?”
“괜찮습니다, 사장님.”
그다지 괜찮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총알이 급소를 뚫고 가진 않아서 목숨을 건진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몇 달은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 할 터.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강철중이 빠지는 것 같아 아쉬웠다.
“김민재, 그 친구 보셨죠?”
“아, 예. 봤습니다.”
“아주 능력 있는 친구입니다. 옆에 잘 두시면 저보다 훨씬 더 성과를 많이 낼 겁니다.”
“강철중 씨의 후임이었습니까?”
“유망주라고 하는 게 맞겠죠. 저도 언제 이런 일이 또 있을지 몰라 미리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메데인 카르텔의 소속인 줄 알았더니, 강철중이 스카우트해서 데려온 조직원이었나.
이런 일을 대비해 준비까지 해두고.
생긴 것과는 다르게 꼼꼼한 사람이다.
나는 강철중을 치료받게 한 후 로이에게 다음 행보를 물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긴. 가서 쓸어버려야지.”
“모스크바 펠리스 호텔을요? 아까 그 호텔도 그 난리가 났는데……. 이러다가 공권력이 투입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돌이킬 수가 없어요.”
“음… 그건 우리 워커가 해결하면 돼.”
순간 난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라고요?”
“우리 워커가 그 대단한 러시아 총리랑 그렇고 그런 사이잖아. 잘 합을 맞춰봐.”
“…뭔 합을 맞춥니까.”
“흐흐, 잘 말해서 해보라는 거지. 그러니까 해결을 말이야.”
결국 내가 푸틴을 만나 담판을 지으라는 건가.
일이 골치 아프게 흘러간다.
“제가 만난다고 해서 막 만날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아닌…….”
“아, 연결됐다. 자, 여기 있어.”
“예?”
나는 얼떨결에 로이가 건넨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지?”
젠장, 로이가 어떻게 푸틴한테 직통으로…….
“안녕하십니까, 총리님. 워커 김입니다.”
“음? 그 주제 모르고 날뛰는 메데인 카르텔의 카포가 아니었나?”
“그게… 저도 갑자기 전화기를 건네받은 터라… 죄송합니다.”
“저번에 핵으로 협박할 때도 이 라인으로 전화하더니. 누가 보면 옆집 이웃한테 하는 전화인 줄 알겠군. 아무튼, 무슨 일이지?”
저번날 로이가 푸틴한테 직통으로 걸었던 전화가 이거였구나.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체첸 마피아가…….”
“그렇지 않아도 보고는 들었어. 그놈들이 습격을 했다면서? 죽지 않고 잘만 전화를 하는 걸 보니 어떻게 막았나 보군.”
저 말은 푸틴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가.
체첸 마피아가 나와 로이를 노린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다는 건 무슨 뜻일까?
내 침묵의 뜻을 이해했는지 푸틴이 말을 이었다.
“나는 그쪽의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체첸 쪽 편도 아니야. 어차피 그쪽이랑 나는 단순히 거래를 했을 뿐이라고. 내가 손수 나서서 도와줄 의무까진 없는 거 같은데. 그쪽 일은 그쪽이 알아서 해야지.”
둘 중 하나가 살아남을 때까지 방관하겠다는 건가.
어쩌면 푸틴은 여러 마피아들을 한곳에 모아 치킨 게임을 벌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중 살아남는 조직의 손을 들어준다라.
썩 나쁘지 않은 일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총리님. 그래서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저희는 이 길로 체첸 마피아의 보스를 죽이러 갑니다. 아까 저희가 머물렀던 호텔이 그 지경이 된 것처럼 거기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요.”
“공권력 투입을 말하는 것 같은데……. 최대한 조용히 끝낼 순 없나?”
“예,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저희가 원하는 건 호텔 꼭대기 층에 있는 놈이니까요.”
“말이 편해서 좋네. 하지만 적정선을 넘어 버리면 경찰이 아니라 특공대가 파견돼서 동시에 다 쓸어버릴 수도 있어.”
한다면 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마피아를 제거하는 일은 좀처럼 쉽지가 않다.
공권력을 투입해서 청소가 될 정도였다면 진작 러시아에는 마피아가 뿌리째 뽑혔을 것이다. 즉, 한 번에는 못하더라도 차근차근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그가 나와 거래를 맺은 것이 아니겠는가?
어차피 다 청소해 내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통제가 가능한 조직으로 통합시켜 놓겠다는 게 푸틴의 작전이다. 물론, 그대로 내가 놀아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잘 알겠습니다, 총리님. 그럼, 다음에 또 뵙도록 하죠.”
“그래.”
나는 푸틴과의 통화를 끝내고 로이에게 전화기를 돌려주었다.
“뭐라고 해?”
“잘 해결됐습니다. 근데 다음부터는 좀 말을 하고…….”
“하하. 역시, 우리 워커야. 아무튼, 다 됐다는 거지?”
“…그렇죠.”
“그럼 얼른 가자. 그 새끼가 소문 듣고 튀기 전에.”
로이는 퉁퉁 얼굴이 부었는데도 여전히 활기가 넘친다.
난 그의 뒤를 따라 가며 로이가 들고 있는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내가 푸틴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가 내 앞에 무릎 꿇을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