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최고의 독재자 (1)
허튼짓을 하면 바로 죽이겠다는 위협과는 달리 이들은 나를 거칠게 다루지 않았다.
러시아가 워낙 공권력이 강한 곳이고 저돌적인 곳이라 범죄자들이 한번 잡히면 구타를 많이 당한다고 들었다. 근데 이건 수갑만 채웠지, 마치 귀중한 손님을 안전한 차에 태워 데려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나는 이 작품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내심 기대하며 말없이 이들에게 몸을 맡겼다.
“내리십시오.”
나를 잡아왔던 사람이-아마도 이들의 대장인 것 같다-사뭇 정중하게 말하며 FSB 트럭에서 내리게 했다. 훨씬 더 점잖게 날 대하는 것을 보니,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쇼에 불과하다.
애초에 내가 범죄자라서 잡으려는 게 아니었다. 이것은 누군가가 나를 만나기 위한 극적인 쇼였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이 방 안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들어가십시오.”
철문이 열리고, 나는 천천히 안으로 발을 들였다.
취조실처럼 생긴 곳이지만, 그런 건 별로 상관이 없었다. 왜냐하면 내 앞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내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미스터 블랙을 이렇게 보게 되다니. 러시아에 온 것을 환영한다.”
러시아어로 말을 하자, 옆에 있던 사람이 그대로 통역해 주었다.
“그렇군요. 누가 저를 여기까지 초대한 건지 궁금했는데, 총리님이셨습니까?”
“날 알고 있군.”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곧 있으면 러시아 최고의 통치자가 되실 분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님.”
역사상 최고, 혹은 최악이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게 될 독재자, 블라디미르 푸틴.
사진에서 봤던 대로, 그리고 과연 듣던 대로 그는 날카로운 인상과 더불어 강렬한 기운을 풀풀 풍겨냈다.
카리스마 하나는 가히 압도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다.
“러시아 최고의 통치자라… 난 총리일 뿐이야. 통치자는 대통령이지.”
“그런 대통령마저 허수아비로 세워놓은 분이 바로 총리님이시지 않습니까. 앞으로도 그 권력을 계속 유지하실 거고요.”
내 대답에, 푸틴은 슬쩍 나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아는 게 많군.”
“정보에 민감한 직업이라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나올 줄은 미처 몰랐나 보지?”
“이런 서프라이즈는… 솔직히 아주 의외였습니다.”
푸틴이 매우 저돌적인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하지만 단순히 나를 체포해서 법의 심판을 받게 하려고 온 것 같진 않다.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
“절 이곳까지 잡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흠, 단순하지. 세계 최고의 범죄자를 잡는 일인데, 내가 못할 일이 있나?”
“범죄자요? 증거는 있으시고요?”
“하하, 증거라는 건 만들면 되는 거야. 자네 말대로 나는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세워놓는 사람이 아닌가? 그리고 미스터 블랙이라고 하면 무슨 증거가 필요한가? 세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범죄 집단의 최고 수장인데.”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어차피 지금 우위를 점지하고 있는 것은 푸틴이다.
무슨 말을 꺼내든, 내가 불리하다. 지금 나는 이 사람과 동등한 입장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뒤집을 한 방이 필요하다.
과연 그 한 방이 무엇일까…….
나는 얼굴에서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표정 관리를 하며 한쪽으로는 무슨 방법이 있을까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내가 너무 심각한 얘기를 꺼냈나? 심각하게 고민을 하는 것 같군.”
표정 관리를 했음에도 푸틴은 완전히 나를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말했다.
러시아 안에서만큼은 푸틴이 곧 왕이다. 또한 그 외 나라에서 절대 간섭을 하지 못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워낙 저돌적이고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라 그런지 누군가에게 간섭받는 걸 극도로 꺼린다.
그래서 중국이나 미국이 러시아의 만행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이 폴란드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고 할 때, 푸틴은 설치하는 순간 핵전쟁이라며 진짜 핵을 발사시킬 준비까지 시킨다.
이 일로 미국은 꼬리를 내리게 되고 러시아는 미국조차도 간섭하지 못하는 나라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다.
푸틴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나를 붙잡으면 아무리 다른 나라에서 풀어달라고 아우성을 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세계 최고의 범죄자를 잡는 것. 오직 목적은 그것뿐이다라는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 그런 셈이지.”
오늘 잘못 걸렸나.
하필이면 이런 사람한테 걸리다니.
그러나 정말로 단순히 나를 붙잡기 위해 이곳까지 끌고 왔다고는 볼 수가 없다. 거기다가 푸틴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도 중요한 단서다.
이 사람은 나를 잡으려는 게 아니다.
나를 이용해 뭔가를 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그리고 지금 이 상태로 대화를 해봤자, 밀리는 건 결국 나다.
무언가 이 상황을 역전시켜 줄 한 방이 아주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런데 과연 그런 게 있을까?
“초, 총리님.”
푸틴의 비서로 보이는 사람이 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자신의 대화를 방해한 부하 직원에게 푸틴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지만, 상대는 아주 큰일이 났다는 듯 다급한 표정이었다.
“스스로를 메데인 카르텔의 카포라고 밝힌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만일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핵무기를 모스크바에 터트리겠다고…….”
메데인 카르텔의 카포?
그건 로이 루스테밖에 없지 않은가.
푸틴은 나를 힐끗 나를 쳐다보더니, 스피커폰으로 돌려놓고 대화를 이어갔다.
“러시아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당신이 푸틴이야?”
역시나.
로이 목소리였다.
“당신이 지금 누굴 잡아놓고 있는지 알기나 해? 누구 마음대로 우리 보스를 붙잡아놓고 있는 거야!”
“세계 최고의 범죄자를 잡는 일인데, 내가 마다할 일이 있겠나?”
“그래, 맞아. 세계 최고의 범죄자지. 그만큼 너도 각오를 했다는 거겠지?”
“각오라. 어떤 각오?”
“우리 메데인에서는 핵잠수함 세 대와 소형화된 핵탄두를 다섯 개나 가지고 있다. 당장 우리 보스를 풀어주지 않으면 러시아 전역이 체르노빌이 될 줄 알아.”
푸틴의 안면 근육이 꿈틀거렸다.
핵잠수함 세 대에 핵탄두 다섯 개면 나라 하나를 능히 망하게 할 수 있는 화력이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현재 메데인 카르텔에는 저 정도로 많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핵잠수함 하나와 소형화 핵탄두 한 개가 전부일 터. 그러나 그중 하나라도 모스크바에 떨어지게 되면 그 땅은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없는 불지옥이 된다.
체르노빌보다 더한 결과를 낼 수도 있다는 것.
“어디 한번 해봐.”
“…뭐야?”
“자신 있으면 한번 해보라고. 나 푸틴은, 그리고 러시아는 절대 테러리스트와 협상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날리고 싶으면 얼마든지 날려봐라. 하지만 너도 각오는 해야 할 거야. 네가 핵무기를 발사하는 순간, 나도 러시아에 있는 모든 핵무기를 발사시켜 세계 곳곳에 터뜨릴 테니까.”
잠깐만.
이건 또 무슨 미친 소리인가?
“너희들이 한곳에 모여 있지 않고, 점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리고 세계 전역에 퍼져 있지. 그런 너희들을 제거하려면 지구 전체를 갈아엎는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아. 그래서 하는 말이다. 우리 러시아에는 수천 개의 핵무기가 있다. 그중 10분의 1만 써도 인류 전체를 말살시킬 수 있지. 그리고 핵무기를 발사할 수 있는 권한은 대통령이 아니라 총리인 내게 있어.”
로이가 제대로 된 한방을 터뜨려 주긴 했지만, 푸틴이 저렇게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테러리스트와는 협상을 할 수 없다는 건가.
“얼마든지 쏴봐. 나도 마음껏 핵무기를 발사해 줄 테니까. 우리 셋이서 인류의 종말을 만들어내는 거야. 어떤가?”
어떻긴 뭐가 어떻단 말인가.
핵무기를 발사하겠다고 협박을 하는 로이도 로이지만, 그걸 그대로 받아치는 푸틴도 참 대단한 양반이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나섰다.
“로이.”
“어? 워커,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예, 덕분에 아직은 없습니다.”
“말만 해. 내가 아주 다 끝장을 내버릴 테니까!”
내가 잡혀갔다는 소리를 듣고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원래 이렇게 흥분할 사람이 아닌데…….
“일단 진정하세요, 워커. 그리고 핵무기는 그렇게 함부로 쓰는 게 아닙니다. 저희들 때문에 죄 없는 사람 수천만 명이 죽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갑자기 저쪽에서 먼저 워커를 데려갔잖아.”
“제가 볼 때 저를 러시아 감옥에 처넣으려고 잡아온 것 같진 않아요. 여기 계신 총리님도 저와 진득하게 대화할 것이 있어서 그러신 거겠죠.”
나는 일부러 푸틴이 들으라고 또박또박 말을 했다. 그러자 로이도 흥분을 가라앉히며 사그라들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근데 혹시라도 뭔 일 있으면 알지? 워커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지구가 멸망하든 말든 난 상관하지 않을 거야.”
“아……. 예. 그럼, 이따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래, 기다릴게.”
나는 로이와의 통화를 끊고 나서 푸틴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음, 몰랐군.”
“…뭘 말입니까?”
“자네가 메데인 카르텔의 카포와 연인 사이였다는…….”
“절대 아닙니다.”
“아까 들은 대사는 커플이나 할 법한…….”
“절대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하, 그리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야. 러시아에서도 그런 건 문제를 삼지 않으니까. 뭐, 남자를 좋아하든 여자를 좋아하든 그건 사람 마음이지.”
아니라니까 그렇네.
한국에 예쁜 와이프도 있는 사람한테 저게 할 소리인가.
“그나저나 아주 인상 깊은 장면이군. 보스를 살리겠다고 핵무기까지 꺼내 와서 협박을 할 줄이야. 자네 참, 밑의 사람들을 잘 관리했나 본데.”
“밑의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그냥… 파트너죠.”
“그렇군. 덕분에 대단히 인상 깊은 장면을 보았네.”
이제 푸틴은 어떻게 나올까.
여전히 저 자세로 나올까, 아니면 다른 모습을 보여줄까.
“그런데 방금 자네가 메데인 카르텔 카포에게 말했던 거. 정말로 내가 진득하게 앉아서 대화를 하려고 데려온 거라 생각했나?”
“예,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면 저를 여기까지 잡아오고, 또 직접 행차를 하시는 일도 없었겠죠.”
내 말이 맞을 것이다.
푸틴이라면 절대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는다.
과연 내 예상대로 그는 힐끗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야. 그냥 이건 단순히 기선 제압이랄까? 어쨌든, 어느 정도 기선을 제압하고 대화를 하려 했는데, 이것으로 서로 비긴 셈이군.”
로이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나는 줄곧 푸틴의 기에 눌려 있어야 했을 터. 하지만 상황은 역전되었다. 내가 원하는 한 방이 나온 것이다.
비록 로이에게 강한 입장을 나타내긴 했지만, 설마 푸틴이 러시아가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하겠는가?
이제야 우린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총리님께서 저를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일단… 도예코프 베샤스트를 어쩔 셈이지?”
“그를 노리고 오신 겁니까?”
“아니, 정말 노렸다면 진작 사살했겠지.”
그렇다는 건 도예코프를 거래 물목으로 쓰겠다는 건가.
머리가 꽤 돌아가는 사람이다.
“도예코프 베샤스트를 북한에 넘길 생각입니다.”
나의 솔직한 대답에 푸틴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북한? 핵기술을 넘겨주겠다는 건가?”
“예, 그런 셈이죠.”
“음…….”
바로 반대를 할 줄 알았는데, 푸틴은 침음을 흘리다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도예코프 베샤스트를 안전하게 돌려주지. 그놈을 어떻게 하든 앞으로 상관하지 않을 거야. 다만, 자네도 나를 위해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내가 푸틴을 위해서 해줘야 할 일?
그게 과연 무엇일까.
“어떤 것이든 말씀해 보십시오.”
나는 러시아 독재자가 어떤 요구로 거래를 틀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