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독재자와 독재자 (4)
한국에서의 일은 성일환에게 모두 맡기고 나는 중국으로 출국했다.
황규혁도 나와 같은 시기에 일본으로 넘어갔다.
태혁이도 그다음 날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니, 아무래도 어머니가 쓸쓸해하실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권윤아가 항상 딸처럼 어머니를 보살피는 덕분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래저래 권윤아에게는 미안한 짓만 하는 것 같다.
“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상하이 공항까지 나를 마중 나와준 것은 강철중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나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저번에 봤던 거와는 다르게 신수가 훤하시네요.”
“하하, 생각보다 중국이 저랑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여기가 산해진미로 가득한 나라이지 않습니까. 그 덕분에 매일 호의호식하고 있죠.”
말은 그렇게 해도 강철중이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일을 한다는 건 보고를 통해 듣고 있었다.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철중만 나를 마중 나온 게 아니었다.
라우팽도 나와 있었는데, 내 편의를 위해 통역사도 함께 있었다.
“마중까지 나와주시고, 감사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사장님이 오시는데 당연히 나와봐야죠.”
라우팽도 전과 다를 바 없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 둘만 온 건가.
분명 보여야 할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로이는 안 나왔습니까?”
“아… 그게 로이는 사장님이 오면 알아서 잘 모셔오라는 말만 남겼습니다. 이리저리 일이 바빠서 나올 시간이 없던 모양입니다.”
웬만하면 내가 올 땐 무조건 오는 사람인데, 그렇게 일이 많다니.
괜한 짐을 얹혀준 건 아닌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원래 한량같이 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 사람을 혹사시키듯이 중국에 버려두고 왔으니…….
괜한 앙심을 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얼른 갑시다.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예, 사장님.”
나는 차에 올라 상하이에 마련된 나만의 별장으로 이동했다.
* * *
“아니! 이게 누구야!”
별장으로 가자 나를 반기는 건 바로 로이였다.
일이 바빠서 공항에도 못 왔다고 들었는데.
로이는 나를 보며 격하게 반겨주는 것 같다가 볼멘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를 이런 시궁창 같은 곳에 획 던져두고 가버린 워커 아니야?”
역시, 뒤끝 있는 사람이다.
“로이, 요즘 많이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일은 잘되시나요?”
“내 얼굴을 봐. 이 잘생긴 얼굴이 여기 와서 완전히 쭈그러들었다고. 그런데 그런 말이 나와?”
“하하,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못생긴 건 똑같은데요, 뭘.”
내 농담에 로이는 불만 가득한 눈초리를 보냈다.
하여튼, 손이 많이 가는 양반이다.
“알겠습니다. 로이, 그동안 로이가 고생한 게 있으니까, 이제부터는 저도 열심히 뛰겠습니다.”
“흥, 안 믿어. 또 뭔 일 하나 크게 벌린 다음에 나 몰라라 하고 튀어버릴 거잖아.”
정곡을 찌른 거 같은데.
나와 오랫동안 같이 일을 해봐서 그런지, 이제 아주 척하면 척이다.
“그렇지 않아요. 정말입니다.”
“얼굴에 다 써 있어. 어디서 거짓말이야.”
잠깐 표정 관리가 안 되었나.
하지만 로이는 이런 면에서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지 않은가.
불퉁스러웠던 얼굴이 차츰 진지하게 바뀌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뭘 해줘?”
로이, 강철중, 거기다 라우팽까지 있으니 모든 조합은 완성이 되었다.
나는 이들에게 내가 여기까지 온 목적을 말해주었다.
“라우팽 씨도 여기 계시니까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조만간 중국 정부에 있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 방북을 해볼까 합니다.”
“방북?”
“바, 방북 말입니까?”
로이와 강철중의 반응은 상반되었다.
아직 로이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잘 못 알아들은 것처럼 보였고, 강철중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내게 말했다.
“사장님, 북한으로 넘어가신다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다들 그런 얘기를 하네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중국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북한으로 넘어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못 넘어갈 이유라도 있나요?”
“그거야 중국이니까 가능한 거죠.”
“맞아요. 그래서 저도 중국 정부를 등에 업고 가겠다는 겁니다.”
강철중은 질렸다는 듯한 얼굴이고, 그제야 우리의 말을 이해한 로이가 뒤늦게 반응을 보였다.
“워커, 북한으로 가겠다니. 굉장한데? 이제 북한에도 우리 연합의 세력을 넓히는 건가?”
“뭐……. 그런 것도 있지만, 글쎄요. 잘은 모르겠네요. 하지만 말이 잘 통한다면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겠어요?”
북한이 외화를 어떻게 벌어들이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려져 있다.
마약을 팔고 국민들을 잡아 외국의 노예로 파는 등, 거대한 마피아 조직이 따로 없다.
그런데 골든 연합이 북한으로 넘어가 그들과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우리가 그들의 중개 역할을 해준다면?
서로 상부상조하는 사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근데 네가 가고 싶다고 해서 북한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걸 해결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죠.”
로이의 말대로 이 모든 게 가능하려면 내가 북한으로 가야 한다.
“김태산 사장님.”
줄곧 우리의 얘기를 듣기만 하고 있던 라우팽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예, 라우팽 씨.”
“정말 북한으로 가신다는 겁니까?”
“예, 그 일에 대해 리오차오와 얘기를 나눠보고 싶군요. 라우팽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라우팽은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다.
“어떻게 가능하다는 거죠?”
“사장님 덕분에 리오차오는 현재 우리 조직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누구보다도 사장님께는 호의적이겠죠. 그리고 최근에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조만간 중국 정부에서 사람을 파견해 북한 정상과 만남을 가질 거라고 합니다.”
“그 일을 관장하는 사람이 리오차오라는 것이군요.”
라우팽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물론, 중앙 위원회에서 최종 결정이 내려져야 하겠지만, 리오차오가 입김을 발휘한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겁니다.”
다시 한번 느꼈다.
지금 내게는 운이 따르고 있다. 그것도 아주 강렬한 대운이.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지체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같이 가시죠. 오늘 리오차오를 만나 담판을 지어야겠습니다.”
운이 따를 때에는 무조건 ‘고’를 외치는 것이다.
* * *
“갑자기 이렇게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 제가 무례를 범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하하, 그럴 리가요. 사장님이시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리오차오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며 내 주변 사람들을 힐끗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분들은…….”
“아, 인사 먼저 나누십시오. 여기는 로이 루스테, 메데인 카르텔의 현 수장입니다.”
메데인 카르텔의 수장이라는 말에 리오차오는 화들짝 놀라했다.
“메, 메데인 카르텔이라고 하면…….”
“예, 아주 흉악한 곳이죠.”
“말을 그렇게 하면 내가 뭐가 돼.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이야.”
다행히 리오차오는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알아 서로 의사소통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반갑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는데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군요.”
“괜찮습니다. 그냥 여기 있는 이 친구나 앞으로 많이 도와주세요.”
로이는 나를 가리키며 말을 전했고, 리오차오는 미소로 화답했다.
“라우팽 씨는 잘 아시죠?”
“아, 예. 몇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리오차오와 그의 사람들에게 자금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맡고 있으니, 모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이렇게 오신 이유가…….”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중국 정부에서 북한으로 외교 인사를 파견한다고 들었습니다.”
“예, 맞습니다.”
“위원님께서는 외교 인사 파견에 관한 일을 현재 맡고 계시고요.”
“그것도 맞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혹시 제가 경제인 명목으로 외교인들과 함께 참석하는 게 가능합니까?”
리오차오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와 라우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의 진지한 얼굴빛을 읽은 리오차오는 내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진심이시군요.”
“예, 진심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문제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고요.”
“으음…….”
리오차오는 차를 들이켜며 속을 달랬다.
“글쎄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제가 주도적으로 사장님을 밀게 되면 중앙 위원회에서도 허락을 해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군요. 한국에서 사장님의 행방을 알게 되면 가만히 있을 까요?”
“한국 정부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은 지금 북한과 정상 회담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정상 회담이요?”
아직 중국에는 정보가 오지 않은 것 같다.
리오차오의 표정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예, 투자라는 핑계로 막대한 자금을 북한에게 넘겨 남북 정상 회담을 추진하려는 것 같은데… 그전에 제가 북한과 사전 협의를 하기 위해 갔다고 하면 한국 정부에서도 뭐라 할 말은 없을 겁니다. 또한 제게 트집을 잡을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니고요.”
“음… 여당 국정 지지율이 많이 떨어졌다고 하던데. 그걸 빌미로 확 끌어 올리려나 보죠?”
리오차오도 역시 정치인이다.
금방 상황의 흐름을 파악할 줄 안다.
이래서 내가 이 사람을 기용한 것이다.
“예, 그렇다고 봐야죠. 그리고 남북 정상 회담을 통해 국가의 안전을 꾀한다는 명분도 있습니다. 돈으로 평화를 사서 전쟁을 막고 자잘한 무력 도발도 막는다면 좋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하하, 그렇게 했다가는 버릇이 안 좋아질 거 같은데요. 나중에 북한이 돈 달라고 포탄을 마구 쏴대면 어쩌려 그러는 겁니까?”
부끄럽지만 사실이긴 하다.
북한이 주기적인 무력 도발을 통해 경제 지원이라는 명복으로 돈을 뜯어낸다는 건 사실이니까. 물론, 지금 당장은 그러지 않겠지만 1년만 지나면 시도 때도 없이 북한의 도발이 시작된다.
“그걸 막기 위해서 제가 가는 겁니다.”
내 말을 들은 리오차오는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저도 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북한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꼴은 볼 수가 없죠. 차라리 제가 북한을 휘두른다면 모를까.”
리오차오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불쑥 물었다.
“정말 그것뿐입니까?”
역시, 정치인은 정치인이다. 눈치가 백 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위해서라면 사랑의 매를 드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를 더욱 좋은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삐뚤어진 길로 가지 않게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좋지요.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엄하게 회초리를 드는 것이 옳은 교육 방법이라고 들었습니다.”
그제야 리오차오가 미소를 보인다.
“평화를 가져오는 것과 동시에 공포도 함께 가져오는 것이군요. 회초리라는 비유가 참 적절합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때려서라도 듣게 해야 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예. 어떻습니까, 제 생각이?”
“나쁘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요즘 북한이 자꾸 엇나가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아서요. 사장님이 도움을 주신다면 확실하게 북한을 잡고 싶습니다. 그래야 모두가 좋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리오차오와는 확실히 말이 잘 통한다.
그리고 중국도 슬슬 김정일의 독주를 우려하는 눈치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내게 고마운 일이 아닌가.
그걸 빌미로 내가 북한이라는 말고삐를 잡을 수 있을 테니까.
“위원님께서 힘을 실어주신다면 한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북한과 중국, 그리고 한국까지. 모두가 평화롭게 지낸다면 그것이 바로 아시아의 평화가 아니겠습니까?”
“하하, 맞습니다.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우리가 열심히 일해야죠.”
나는 리오차오와 함께 찻잔을 들었다.
비록 이게 술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것으로 약속을 맺은 것이다.
이로써 북한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