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독재자와 독재자 (2)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어머니.”
“아이고. 우리 규혁이. 바쁜 사람이 자꾸 이렇게 와도 되는 건지 몰라. 그래. 해외 생활은 괜찮고?”
“하하, 어머니 밥을 못 먹어서 매번 아쉽죠. 그래서 이렇게 달려온 게 아닙니까, 어머니.”
황규혁은 넉살 좋게 선물을 어머니께 건네며 진한 포옹을 나눴다.
누가 봐도 큰 아들과 어머니의 모습이다.
나는 이에 질세라 불쑥 나섰다.
“어머니, 너무 형님한테만 잘해주시는 거 아닙니까?”
“원래 큰아들은 잘해줘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동생은 가만히 있어.”
호적을 보면 내가 큰아들인데, 어머니에게는 큰 아들의 위치가 바뀐 모양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영락없이 둘째 아들이 되었다.
“태혁아, 경기 잘 봤다. 이번에 일본 놈이 너한테 개겼다가 훅 가는 거 진짜 통쾌하더라.”
“흐흐, 제가 좀 하긴 하죠?”
태혁이는 최근에 타이틀 방어전을 치렀다. 상대가 일본 선수였는데, 그는 일부러 낮은 체급으로 태혁이를 링 위에 불러냈다. 감량을 시켜 힘을 빼보겠다는 수작이었는데, 그건 거에 흔들릴 놈이었으면 태혁이는 다섯 체급 제패라는 꿈을 갖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상대로 태혁이는 5라운드 내내 상대 선수를 농락하며 일부러 KO시키질 않았다. 결국 보다 못한 상대 트레이너가 수건을 던져 기권을 하면서 경기가 끝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나름 영웅 접대를 받으며 세계로 진출한 선수인데, 하필이면 태혁이에게 덤비는 바람에 선수 생활이 끝장날 위기에 처해졌다.
아무튼, 무서운 놈이다.
이래서 태혁이에게 도전하는 놈들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한번 심기를 건들면 상대가 죽기 직전까지 때려놓는 놈이니까.
“어머니, 큰절 한 번 받으십시오.”
아들 셋이 일어나 어머니 앞에 큰절을 올렸다.
새해인 만큼 올 한 해도 더욱 건강하시라고 기도를 드리며 선물을 드렸다.
어머니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 셋과 며느리 하나를 기분 좋게 안아주셨다.
“잠깐만 기다리거라. 이 어미가 자식새끼들 밥은 해줘야지.”
내가 사람을 붙여 도와드린다고 해도 한사코 어머니는 괜찮다며 스스로 요리를 하시고, 또 스스로 음식을 내어 오신다.
그 모습에 권윤아도 살근살근 다가가 솜씨를 발휘하며 어머니와 함께 음식을 내왔다.
“제수씨는 언제 봐도 참 아름다우시네. 그런데 저런 분 손에 물을 묻혀서 되겠냐?”
“그러니까요. 집안일도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하는데 듣질 않아요. 음식도 매일 챙겨 주려 하고요.”
“참나, 네가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나 보다.”
전생이라.
나라를 구하진 못했어도 이 손으로 나쁜 놈들을 여럿 잡긴 했다. 물론, 지금은 내가 그놈들보다 훨씬 더 나쁜 놈이 되었지만.
생각할수록 참 아이러니한 세상이다.
그래도 권윤아를 아내로 받아들인 게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일본 쪽은 어떻게 하시고……. 이렇게 오셔도 되는 겁니까?”
“괜찮아. 일이 많이 남긴 했는데, 내일 아침 비행기로 돌아가서 처리하면 돼. 그래도 새해인데 어머니 얼굴은 봐야지.”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십시오. 이미 일본에 저희 직원들을 배치해 두었으니까요.”
“고맙다. 내가 필요하면 꼭 전화하마.”
한창 일본은 내부 청소를 진행하는 중이다.
야마구치 구미라는 이름을 일본에서 지우고 그 위에 니치카야 카이라는 이름을 덧씌우는 중이라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또한 야마구치 구미에서 운영 중인 회사들도 차례로 니치카야 카이에 흡수를 시키느라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들고 있다.
그래도 작업만 잘 끝나면 앞으로 일본은 니치카야 카이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요즘 여기도 시끄럽다고 하더라.”
“말이라고요. IT 버블이 터지고 나서 한창 난리입니다.”
김일중 대통령은 빠른 인터넷 광역망을 보급하면 한국이 훨씬 더 발전할 거라고 예측해 IT산업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었다. 덕분에 벤처 기업들이 돈방석에 앉게 되었고, 실버뱅크라는 곳은 800원이었던 주가가 4만 원까지 치솟을 정도로 엄청난 성장률을 보여주었다.
물론, 1,600%가 넘는 수익률은 전부 기관과 외국인들이 벌인 조직적인 주가 조작에 의한 것이었다.
한창 시기가 주가 조작을 하는 단체들이 많을 때라 하루에도 몇 명씩 한강 다리에 떨어지고 있다.
“IT산업에 투자하는 건 좋지. 소프트뱅크 봐라. 손이정 그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성장을 하고 있잖냐.”
“안 그래도 그 사람 때문에 정부가 휘둘린 것도 있어요.”
손이정은 일전에 청와대로 초청을 받은 적이 있다. 기업인들과 만남을 가져 경제 발전에 아이디어를 얻겠다는 김일중 대통령의 의도였는데, 손이정은 그때 김일중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첫째도 브로드밴드. 둘째도 브로드밴드. 셋째도 브로드밴드라고.
그 말을 유심히 듣던 김일중은 바로 다음 달부터 각 지자체에 공문을 보내게 된다.
기업들과 협력해 전국에 인터넷 광역망을 깔라고 말이다.
그 일로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인터넷 광역망을 갖추게 된다.
어찌 되었든 결과는 좋았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난 파동은 결코 작지 않았다.
IT산업에 갑자기 돈이 몰리면서 주가가 미친 듯이 상승하기 시작했고, 그 버블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 공중분해되어 수십조 원의 돈이 날아가 버렸다.
그로 인해 정부의 지지율은 낮아졌고, 그 돌파구로 삼은 것이 바로 남북한의 관계 개선이다.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IT산업은 앞으로도 발전을 이어가야 돼. 출혈이 있다고 해서 절대 멈춰서는 안 된다는 거야. 지금도 컴퓨터가 인간의 일을 하나씩 뺏어가고 있잖냐.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모든 걸 컴퓨터가 하게 될 걸?”
틀린 말이 아니다.
더욱 시대가 발전하게 되면 AI가 나와 세계를 움직이게 될 것이다.
“우리 아들들. 여기까지 와서 일 얘기는 하지 말고. 오늘은 마음껏 먹도록 하렴.”
황규혁과 두런두런 얘기를 하는 동안 어머니가 음식을 가지고 오셨다.
정말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많은 걸 준비하신 것 같다.
“잘 먹겠습니다, 어머니!”
우리는 한 목소리로 외치며 빠르게 젓가락을 움직였다.
아무리 양이 많아도 내가 저 사람보다는 많이 먹겠다는 욕구가 들게 만드는 음식들이니까.
* * *
“북한?”
식사가 끝나고 태혁이는 어머니와 권윤아와 같이 과일을 먹고 있었고, 나와 황규혁은 밖으로 나와 싸구려 커피를 마셨다.
황규혁은 적잖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피고 있던 담배를 꺼버렸다.
“무슨 소리야. 네가 북한을 가겠다니.”
“이번에 정부에서 콘택트가 하나 왔어요. 형님도 아시겠지만, 저번에 대마 그룹에서 저를 한 번 몰아내 보려고 난리를 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거 여당 대표가 꾸민 거라며.”
“솔직히… 여당 대표 혼자 움직인 거라고 보진 않습니다. 대통령도 분명 관련이 있겠죠.”
그 말에 황규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렇겠지, 아무리 여당 대표라고 해도 대통령의 재가 없이 그 큰일을 혼자 치르진 않았겠지.”
“예, 아무튼 여당 대표는 그 일로 옷을 벗게 되었고 지금 감옥에서 썩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참여했던 대마 그룹은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고요.”
“네 작품이라는 거, 나도 안다. 근데 갑자기 그게 왜?”
“이번에 IT 버블이 터지면서 국정 지지율이 상당히 낮아졌잖아요. 그래서 정부는 이걸 돌파할 계기를 남북한 외교라고 보고 있어요. 북한과 쇼부를 잘 쳐서 남북 정상 회담까지 이어가 보려는 것 같습니다.”
황규혁은 또 한 번 기겁하며 소리쳤다.
“남북 정상 회담?”
“예.”
“그게 가능해? 남북 정상 회담이면 대통령이랑 그 김 씨 일가랑 만난다는 거잖아.”
“그렇죠.”
아무래도 황규혁은 영 믿음이 가지 않는 모양이다.
“에이, 그건 말도 안 돼. 그 독재자가 대통령을 만나 보려 하겠어?”
이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남북한 정상 회담이 성사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매번 무력 도발을 통해 서로 발톱을 세우고 있는 시기다. 그런데 남북 정상 회담이 열린다고 하면 과연 누가 믿으려 할까.
“그래서 정부가 특단의 조치를 내리려는 겁니다. 일반적인 대화로는 남북 정상 회담이 어려우니까요.”
“설마… 이거 내가 생각하는 그거냐?”
“그게 맞을 겁니다.”
황규혁은 기가 찬다는 듯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너더러 대마 그룹 공격하는 걸 멈추게 하고 그것들을 이용해 북한에다 돈이라도 퍼 줄 생각인가 보지?”
“잘 아시네요.”
“당연하지. 지금 유일하게 북한으로 들어가 있는 회사가 대마 그룹이잖아. 그놈들 통해서 돈 뿌리겠다는 수작을 내가 왜 모르겠냐? 이런 걸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니고.”
대마 그룹이 유일하게 북한으로 들어간 기업이라는 건 맞다.
내게도 들어갈 기회가 있긴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다.
어차피 김일중 시대가 끝나면 다시 닫힐 문이다. 그런 곳에 왜 돈 아깝게 공장을 세워주고 건물을 세워준단 말인가.
그리고 황규혁은 정부가 대마 그룹을 이용하려 한다는 걸 간파했다.
이런 식의 비슷한 일을 하도 많이 해본 사람이라 그런지 척하면 척이다.
“돈을 얼마나 뿌리려고 그런데?”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몇 억 달러는 부을 걸요?”
“아이고, 외환 위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개의 회사가 문을 닫고 있는 실정인데 이런 때에 외환을 빼돌리겠다?”
“그만큼 국정 지지율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햇볕 정책으로 북한과 원만한 대화를 이어간 덕분에 지지율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IT 버블이 터지면서 바닥을 치는 바람에 정부는 획기적인 파장을 일으키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네가 왜 북한으로 가겠다는 거야?”
“그냥 궁금해서요. 호기심도 일고.”
“네가 요즘 다 갖더니 미쳤구나. 거긴 상식이 통하지 않는 놈들만 있는 곳이야.”
과연 그럴까?
독재자가 이끄는 나라라고 하지만, 중국의 압력에는 버티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다.
북한은 중국의 노리개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틈만 나면 북한을 움직여 우리나라를 괴롭히는 재미에 빠져 살고 있다.
하지만 내가 중국을 움직여 역으로 북한을 내 우호적인 아군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그에 따라오는 이익은 아마도 굉장할 것이다.
생각해 보라.
북한을 이용해 한국 정세를 뒤흔들어 놓는다면 뭐가 두렵겠는가?
어차피 남북한은 전쟁을 할 수가 없는 사이다. 전쟁이 나면 둘 다 죽고 결국 중국과 미국만 이득을 볼 거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력 도발이 일어나도 상황이 극한에 치닫으면 한쪽은 머리를 숙이고 다가온다.
“요즘 중국에서 제가 밀고 있는 세력이 있는데, 조만간 그쪽이 권력을 잡으면 중국 정부의 협력을 잘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중국의 힘을 업고 북한으로 넘어가겠다고?”
“슬쩍 만나만 보는 거죠. 대화가 통하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 않겠어요? 북한이란 아군을 얻는다는 건 굉장히 좋은 일이니까요. 한국 정부를 흔들 수 있는 와일드카드이지 않습니까?”
양심적으로, 애국심을 갖고 본다면 북한과 손을 잡는 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철저하게 비즈니스적으로 본다면?
북한만큼 좋은 카드가 또 있을까?
“그래도 좀 더 고민해 봐라. 그러다 국정원한테 꼬리라도 밟히면 골치 아파지니까.”
“하하, 어차피 그쪽은 저 못 건드는 거 아시잖아요.”
“뭐야. 국정원에도 사람 풀어놨냐?”
“거기 말단부터 위까지 전부 제 사람들로 뿌려놨죠.”
“하여튼, 너란 놈은 진짜 너무 철저해서 질린다, 질려.”
황규혁은 웃으며 담배를 끄고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나도 길게 숨을 쉬며 잠깐 바깥바람을 맞았다.
날씨가 화창한 것을 보니, 절로 미소가 나온다.
화창한 새천년처럼 내 미래도 저것처럼 더욱 화창해질 것만 같은 확신이 들어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