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독재자와 독재자 (1)
“안녕하십니까, 부회장님.”
“안녕하십니까.”
화진 그룹부터 천성 그룹의 금융계 인사들이 모인 콘퍼런스 센터.
매시간을 바쁘게 보내야 하는 이들이 한곳에 모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날이지 않은가.
“Y2K가 뭐라고. 이것 때문에 요즘 전 세계가 난리입니다.”
“이틀 후면 새천년이 밝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각 종교에서는 휴거다 뭐다 떠들고 있으니 불안만 더 증폭되는 것이지요.”
Y2K.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게 되는 밀레니엄 버그 해프닝이다.
현재 인류는 컴퓨터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시대다. 컴퓨터로 금융권이 돌아가고 있으며, 컴퓨터로 모든 인적 사항을 처리하고 있다. 이런 때에, 모든 컴퓨터가 동시에 작동을 멈추게 된다면?
포괄적으로 관리를 하는 컴퓨터의 기능이 상실되면 인류는 정말 종말에 이를 수도 있다.
당장 원자로를 관리하는 것이 컴퓨터인데, 그러한 컴퓨터가 운영을 멈춘다면 그야말로 재앙이지 않겠는가?
지금 많은 사람들이 미쳐 날뛰고 있는 시기다.
노스트라다무스라는 노망난 예언가가 만든 예언서를 해석한 사람들은 2000년도에 종말이 올 거라고 확신했고, 각 종교에서도 예수님이 재림한 꿈을 꿨다며 2000년도에는 반드시 휴거가 일어나 인류의 종말이 찾아올 거라 믿고 있었다.
1999년은 그야말로 민심이 흉흉한 시기라는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Y2K라는 괴담까지 퍼지면서 무신론자들도 꼬임에 넘어가는 실정이었다.
“근데 Y2K는 이미 오래전에 해결된 문제 아닙니까?”
“아무리 그걸 정부에서 발표를 해도 믿질 않으니까요. 2000년이 되기 전까지는 국민들은 절대 정부의 말을 믿지 않을 겁니다.”
컴퓨터의 날짜 표시는 MM-DD-YY로 표시가 된다.
1999년 9월 1일이면 09-01-99로 나타난다는 것인데, 2000년도에 들어서면 00으로 바뀌니 1900년도와 2000년도를 컴퓨터가 똑같이 받아들여 혼선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전산에 오류가 생겨 금융망이 마비되고, 잘만 날아가던 비행기가 떨어지거나 핵미사일 발사기도 오류를 일으켜 전 세계가 불바다로 변해 버린다는 괴담이 돌게 되었다.
나는 미래를 알고 있으니 참 어이없는 괴담이 아닐 수 없지만, 이 당시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아직 컴퓨터 발달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값이 싼 기기들을 쓰는 곳이 다반수라 충분히 오류가 날 수 있다고 판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정부는 기업들을 움직여 컴퓨터 교체에 들어갔고, 꽤 많은 돈을 들여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해 냈다.
“그래도 바꾸기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 바꿨으면 정말 오류를 일으켰을지도 모르니까요.”
사실 날짜가 바뀌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잘한 오류들이 모여 큰 오류가 될 수 있다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여기에 모인 것일까.
이미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이 되어 있고, 새천년이 와도 아무 문제 없이 흘러갈 것이다. 그런데 금융계의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건 무슨 뜻이겠는가.
첫째는 쇼를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서로 안면을 터서 상부상조하기 위함이다.
개미들이 돈을 잃는 건 그들이 못해서가 아니다. 대부분 그들이 누군가에게 깜빡 속아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럼, 누가 개미들을 속일까?
누구겠는가.
바로 여기 있는 우리들이다.
주식 시장을 보면 참 안타까우면서도 웃긴 점이 있다.
개미들은 이게 작전주라는 것도 모른 채 매일 기관과 외국인 투자자에게 속아 돈을 퍼붓는다. 그리고 그들은 기관에게 전부 돈을 빼앗기고 나서 또 같은 짓을 되풀이한다.
어떤 개미들은 이게 작전주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돈을 퍼붓는다.
왜냐하면 자신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주식이란 결국 정보 싸움.
인터넷이 아무리 발달해도 주식 시장은 발품을 팔고 인맥을 쌓아야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정보라는 건 결코 공짜로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보를 분석할 수도 없다.
회사 내부에서, 그것도 소수의 임원들만 알고 있는 정보를 누가 분석하고 파악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들이 여기에 모인 것이다.
각자 가지고 있는 정보를 나누고, 개미들을 속여 자신들의 주머니를 불리기 위해.
결국 돈 때문에 모였다는 것이다.
“이번에 천성 그룹이 외국 기업과 중요한 계약을 땄다는 소문이 은연중에 돌고 있던데요?”
“그런가요? 대마 그룹에서도 중동 국가와 중요한 건설 계약을 맺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금융계 사장들은 껄껄 웃으며 서로가 가지고 있는 정보의 질을 가늠했다. 제대로 뭔가가 걸려야 개미들을 자극해 돈을 벌 수 있으니까.
나는 별로 반갑지도 않은 사람들과 대충 인사를 나눴다. 솔직히 괜히 여기까지 왔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정부에서 각 기업 인사들을 초대해서 온 거기도 하고, 기업인들에게는 아주 큰 기회가 되는 장소이기도 하니 한 번쯤 오는 건 좋긴 하다. 그러나 내가 이들이 알고 있는 걸 모르겠는가?
회귀 전에, 내가 열심히 털던 놈들이 여기에 다 모여 있다. 이놈들이 뭔 수작을 부려 돈을 벌었는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털은 덕분에,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이 뭘 알고 있든 관심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알고 있기에 궁금하지도 않다.
“부회장님.”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익숙한 얼굴 하나가 다가와 내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총리님께서 따로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총리가 부리고 있는 비서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비서를 따라갔다.
호텔에서 비밀리에 운영 중인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총리가 얼른 일어나 내게 손을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부회장님.”
나보다 나이는 한참이나 많은 양반이지만, 나를 대함에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공손하게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여기 차 맛이 아주 좋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한잔하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총리님. 그런데 여기까지 절 부르신 이유가 뭔지…….”
총리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오늘 행사를 연다고 하기에 급하게 찾아왔습니다.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주변 시선을 피해서 부회장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일부러 기회를 노려 찾아왔다는 것인가.
총리가 무슨 말을 꺼낼지 내심 기대가 되었다.
“은밀함을 기하는 일인 것 같은데, 궁금하군요.”
“예, 아주 은밀함을 기해야 하는 일입니다. 무려 북한과 관련된 일이니까요.”
나도 찻잔을 들고 있던 손을 멈추었다.
“북한이요?”
“예, 이번 정부에서는 기존 정부와는 달리 햇볕 정책으로 북한과 지속적인 대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건 잘 아시죠?”
햇볕 정책은 당연히 잘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핵심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끝나 버린 비운의 정책이다.
나그네의 옷을 벗긴 건 바람도, 추위도 아닌 태양의 뜨거움이라는 이솝 우화의 이야기를 토대로 따뜻함만이 북한과의 관계를 풀어나갈 수 있다는 이론이다.
서독과 동독이 통일을 하고, 소련과 미국과의 냉전 시대도 끝나면서 자연스럽게 남북한에도 봄이 찾아오는 징조를 보인 건 맞다.
김일중 대통령은 햇볕 정책으로 사상 첫 남북 정상 회담까지 이뤄내며 노벨상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뤄내는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현실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결과적으로 햇볕 정책은 북한에게 우리나라가 이리저리 휘둘리다 쌀과 돈만 뜯기고 종국에는 북한이 핵무기를 갖출 수 있도록 자금을 조달해 꼴이 되어버린다.
시작도 좋고 취지도 참 좋지만, 북한이란 곳은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아주는 나라라는 것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번 정부가 기존 정부와의 차이점을 두기 위해 햇볕 정책을 실행했다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김일중 대통령은 대선에 당선되기 위해 획기적인 북한 외교 방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 가 내건 공약대로 이행을 하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도 국정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북한과 지속적인 대화를 이어가고 있으며, 점점 국내에서는 이러다 독일처럼 덜컥 통일을 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 모두가 북한의 쇼라는 걸 국민들은 알지 못한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되겠지만.
아무튼, 김일중 정부의 이러한 방법은 아주 잘 먹히고 있다.
날이 갈수록 국정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니까.
“그래서 대통령님께서는 북한과의 관계를 더욱 진전시켜 남북 정상 회담을 추진하고자 하십니다.”
드디어 나올 게 나왔다.
남북 정상 회담.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진행되는 남북 정상 회담은 가히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김일중 대통령이 직접 평양으로 날아가 북한 정상 김정일을 만나 두 손을 맞잡게 된다.
“남북 정상 회담이라……. 괜찮은 일이군요. 그렇지 않아도 햇볕 정책에 불만을 품은 보수 쪽 여론이 많던데. 이번 일로 잘만 하면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겠습니다.”
“예, 저희도 그걸 기대하고 있습니다. 북한과 관계를 회복하고 차츰 통일에 대한 토론을 나누면 적어도 서로 전쟁을 벌이려 하진 않겠죠.”
훗날 햇볕 정책이 실패한 정책이라고 욕을 먹긴 하지만, 북한과의 지속적인 대화로 평화를 이어간다는 취지는 좋은 것 같다. 워낙 무력 도발을 많이 하는 곳이라 가짜 대화라도 도발을 막고 국민의 안전을 지킬 수만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건 부정 못할 사실이다.
김일중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 나서 특검을 통해 밝혀지는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대북 송금 사건이다.
김일중 대통령 정부가 대마 그룹을 이용해 은밀하게 자금을 움직여 5억 달러라는 거금을 북한에 보낸 것이다.
2003년은 북한이 연평해전 도발로 보수 쪽에 표가 기울어 압도적인 표 차이로 보수가 국회를 장악하게 되는 시기다. 그로 인해 여당은 야당의 힘을 막을 수가 없어 결국 특검을 허락하고, 특검의 결과는 매우 충격적으로 밝혀진다.
김일중 정부가 수억 달러의 돈을 몰래 송금해 북한으로부터 남북 정상 회담을 허락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이로 인해 김일중은 노벨상을 돈으로 주고 샀다는 비판을 사후에도 계속 듣게 된다.
“그런데 그 문제에 대해 언급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사실… 일전에 대마 그룹과 부회장님과의 트러블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화진 그룹이 대마 그룹을 압박하고 있다는 건 재계 인사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죠.”
대마 그룹 회장 정진구는 내게 대항했다는 이유로 엄청난 압박을 받게 되었다.
검찰 수사는 물론, 주식 변동까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외환까지 줄어들어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기분일 것이다.
나는 총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대마 그룹의 숨통을 좀 풀어달라는 겁니까?”
“예, 가능하시다면 말입니다.”
어차피 언젠가 이런 말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
지금 시기가 딱 그 시기이지 않은가.
현 정부가 대마 그룹을 통해 은밀히 북한 쪽에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때다.
대마 그룹이 최전선에 나가 북한에서 공장을 세우고 있으니, 정부에서도 대마 그룹을 이용해 돈을 조달하는 게 가장 쉽다고 판단했을 터.
내가 간섭하지 않는 한, 이 일은 역사대로 알아서 흘러갈 것이다.
순간 고민이 들었다.
이걸 내가 막아야 할까. 아니면 가만히 놔둬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참에 북한의 통치자이자 독재자인 김정일을 내가 직접 만나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