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새로운 황제 (4)
“말하지 않았습니까? 황규혁 쿠미쵸도 존경하지만 여기 계신 김태산 사장님도 존경을 한다고요.”
나와 황규혁을 존경한다?
저 사람이 말하는 존경은 과연 무슨 뜻일까.
“이제 저도 나이가 들었습니다. 이제 곧 60줄을 넘어야 하는 늙은이죠. 즉, 이런 거대한 조직을 제 손아귀에 넣기에는 너무 늙었다는 겁니다.”
나이 타령을 하는 건가.
야망을 가지는 것에 노소가 없다.
내 눈빛을 읽은 것일까.
그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김 사장님과 황규혁 쿠미쵸를 동시에 상대하고픈 마음이 없습니다. 여기 모여 있는 니치카야 카이 조직원들만 봐도 대충 눈치챌 수 있죠. 이대로 우리 야마구치 구미를 칠 생각이었지 않습니까?”
그 말에 황규혁이 진화에 나섰다.
“그건 오해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야마구치 구미가 먼저 공격을 할까 대비를 하기 위해 모인 겁니다.”
히나다는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야마구치 구미 내부에서 니치카야 카이를 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꽤 커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만일 우리가 먼저 공격을 하게 될 경우, 나는 벌어질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벌어질 일이요?”
“야마구치 구미가 급속도로 세력을 넓힐 수 있던 건 골든 연합에 들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들의 파급력은 굉장하다는 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내가 그 연합에 반기를 들 생각을 했다면 언젠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김 사장님?”
히나다는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빛만은 날카로웠다.
저 말이 맞다.
만약 야마구치 구미가 니치카야 카이를 공격했다면 나는 일본에 들여온 히트맨들을 대거 움직일 생각이었다. 즉, 야마구치 구미의 핵심 간부들이 차례로 죽어나간다는 것이다.
그중 히나다는 제일 첫 번째 목표가 될 터. 그가 선택을 잘못 내렸다면 내일 해는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잘 아시는군요.”
“하하, 솔직하십니다.”
“야마구치 구미와 전쟁을 벌였다면 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히나다 씨부터 죽였을 겁니다.”
“하하하!”
직설적인 내 말에 히나다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못 당하겠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눈빛으로 말씀을 하시니…….”
히나다는 다시 황규혁에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자, 이제 결정은 황규혁 쿠미쵸에게 넘어갔습니다. 영원한 형제의 언약을 맺으시겠습니까?”
황규혁이 뭐라 대답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불쑥 끼어들었다.
“잠깐, 그 전에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 뭐든지 말씀해 보십시오.”
“만일 이 언약을 맺게 되면, 야마구치 구미의 쿠미쵸는 누가 되는 겁니까? 히나다 씨는 야마구치 구미의 이름을 존속시키기 위해 온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이대로 언약을 맺게 되면 황규혁 쿠미쵸가 결정을 내려주시면 됩니다. 누가 야마구치 구미의 쿠미쵸가 될지.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야마구치 구미는 이제 니치카야 카이의 산하로 들어가는 겁니다.”
이로써 명확하게 정리가 되었다. 그러나 뭔가 너무 쉽게 가는 것 같다는 기분이 자꾸만 드는 건 기분 탓인가.
이제 선택권은 황규혁에게 넘어갔다.
“히나다 씨.”
“예, 쿠미쵸.”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히나다 씨를 따라와 주신 여러분에게도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황규혁은 히나다 앞으로 다가가 그가 건네는 술잔을 받았다.
형제의 언약을 맺는 술잔.
히나다는 기분 좋게 황규혁과 잔을 부딪히며 말했다.
“이 잔에 담긴 사케를 마시면, 우린 형제가 되는 겁니다.”
“물론입니다.”
히나다와 황규혁은 동시에 잔을 비웠다.
야마구치 구미가 니치카야 카이의 산하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뜻깊은 순간이니, 조직원들은 당연히 열렬하게 박수를 쳐댔다. 하지만 나는 뭔가 계속 찜찜했다. 아주 상황이 좋게 흘러가고 있지만, 너무 쉽게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야마구치 구미의 수뇌부가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결코 예상하지 못한 전개다. 그래서인지 더욱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다.
“조만간 야마구치 구미 내부에서 큰 연회를 열 겁니다. 새로운 형제가 탄생했음을 알리고 우리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일본 전체에 알려야 하니까요. 그때 참석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황규혁은 흔쾌히 히나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물론입니다. 당연히 초대에 응해야죠.”
“감사합니다. 황규혁 쿠미쵸.”
점점 분위기가 마무리 단계로 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히나다도 할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는 낌새였는데, 황규혁이 그를 붙잡았다.
“아직 결정하지 못한 일이 있으니, 한잔 더 하도록 하시죠.”
“결정하지 못한 일이요?”
“야마구치 구미의 차기 쿠미쵸가 누가 될지. 결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아, 그렇군요. 그 중요한 걸 깜빡했습니다.”
황규혁은 싱긋 웃으며 비어 있는 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이 잔을 마시는 사람이 바로 야마구치 구미의 새로운 쿠미쵸가 될 겁니다.”
차기 쿠미쵸가 될 사람을 이미 점찍어두었는지, 황규혁은 천천히 잔을 히나다에게 건넸다. 히나다도 흡족한 얼굴로 그 잔을 받으려 하는데, 갑자기 황규혁이 건네던 손을 멈추고 자신이 벌컥 잔을 들이켜는 것이 아닌가?
“……?”
히나다는 멍청한 표정으로 황규혁을 바라보았다.
황규혁은 그런 그를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뭘 그렇게 봅니까? 야마구치 구미의 차기 쿠미쵸는 바로 나라는 게 결정되었는데.”
“…예?”
히나다가 점차 경악 어린 시선을 띠고 있을 때, 황규혁이 품 안에 있던 칼을 꺼내 냅다 상대의 목을 찔러 버렸다.
“쿠헉-!”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누구도 황규혁을 제지하지 못했다.
나 또한 황규혁이 저런 돌발 행동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왜… 왜……! 쿠윽!”
“내가 설마 모를 줄 알았나? 너는 처음부터 나를 형제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잖아. 오히려 날 제거할 생각이었겠지. 이런 식으로 쇼를 해서 우리를 방심하게 만든 다음, 뒤통수를 치고 싶었던 거겠지.”
“네, 네놈… 어, 어떻게…….”
“말했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냐고. 네가 얼마나 욕심 많은 영감탱이인지 모를 줄 알았어?”
히나다는 원통하다는 얼굴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 모든 게 쇼였다고?
황규혁과 나를 속이고 니치카야 카이를 없애려는 수작이었다니.
그런데 황규혁은 이걸 어떻게 눈치챈 것일까.
“뭣들 하고 있어! 저 새끼들도 다 잡아!”
“예, 쿠미쵸!”
당황해하던 조직원들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황규혁의 말에 따라 히나다를 따라나선 수뇌부 간부들을 전부 붙잡았다.
나는 걱정이 들어 황규혁에게 다가가 말했다.
“형님, 이게 갑자기 무슨…….”
“태산아, 히나다 이 새끼는 날 쳤으면 쳤지 절대 협력을 할 놈이 아니야. 그리고 와타나베가 죽은 것도 어쩌면 히나다의 계략일 수도 있어. 난 처음부터 이놈을 계속 의심했으니까.”
“단순히 감인 겁니까?”
“솔직히 말해서 70%는 감이지. 이놈이 여태 꼬리를 밟히지 않았거든. 하지만 이놈이 나를 초대한다는 말과 야마구치 구미의 차기 쿠미쵸를 정하지도 않고 돌아가려는 것을 보고 확신했다. 이놈은 너랑 나를 가둬놓고 죽일 셈이었던 거야.”
그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난 황규혁 덕분에 목숨을 건진 것이다.
하지만 이게 단순히 감에 의존한 실수라면…….
“네가 뭘 말하려는지 알아. 하지만 날 믿어봐. 저놈들을 족치면 아마 곧 답이 나올 거다.”
결국 야마구치 구미와 사활을 건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인가.
나는 황규혁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이 일본을 다스릴 황제가 될 사람이니까.
* * *
“쿠미쵸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수뇌부 간부들을 고문해 원하는 답을 얻은 기타노 켄이치는 적잖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들은 쿠미쵸를 속여 야마구치 구미 내부로 끌어들여 암살할 계획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김태산 사장님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하긴, 나만 죽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태산이가 뒤에 있으면 날 죽여도 아무짝 쓸모가 없다는 걸 알고 있던 거야, 그 영감은.”
황규혁의 말이 사실이었다니.
언제 봐도 놀라운 감각이다.
“뭘 그렇게 감탄한 눈길로 쳐다봐?”
“형님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잡혀 죽었겠군요. 대단하십니다.”
“네가 내 입장이었어도 똑같이 그랬을 거야. 너는 그저 히나다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으니까 의심을 안 한 거잖아.”
“솔직히 말씀드려서, 너무 일이 쉽게 풀린다고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기타노 켄이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것 같아 경계를 하긴 했지만, 수뇌부 간부들이 온 마당에 마냥 의심을 할 순 없었지요. 히나다는 바로 그걸 노린 겁니다. 우리가 절대 의심할 수 없게 수뇌부 간부들을 동원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죠.”
이렇게 대담한 계책을 세운 히나다도 히나다지만, 그걸 간파한 황규혁도 참 대단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렇게 기뻐하기에는 이르다. 이제 일본 최고의 조직인 야마구치 구미를 상대해야 하니까.
“히나다는 철저한 인간이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뭔가 준비를 해뒀을 거야. 우리를 만나러 오지 않은 수뇌부 간부들이 서로 결탁해 일을 벌이기 전에 선수를 쳐야 돼.”
“쿠미쵸의 말씀이 맞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선수를 치지 않으면 어려운 싸움이 될 겁니다.”
나도 황규혁의 예상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히나다 그 인간은 보통이 아닌 인간이다. 황규혁이 아니었으면 나조차도 깜빡 속아 넘어가 졸지에 잡혀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지 않았을까?
분명 지금쯤 야마구치 구미의 간부들이 서로 모여 니치카야 카이와 격돌을 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완전체가 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무너뜨려야 한다.
“태산아.”
“예, 형님.”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부탁 좀 하나 하자.”
“말씀하세요.”
“일본에 들여온 히트맨들 좀 움직여 줬으면 한다. 리스트는 내가 뽑아줄 테니까, 그놈들을 제거해 줘.”
“히나다가 죽었다는 걸 알면 꽁꽁 숨으려 할 텐데요.”
“네 밑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놈들마저 기어코 찾아내 죽인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부탁을 하는 거야.”
황규혁은 나를 너무 잘 안다.
난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리스트만 넘겨주시면 해결해 보겠습니다.”
“고맙다.”
한시름 놓았다는 듯, 황규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느 때와는 다르게 비장한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히나다를 죽이면서 시작된 전쟁이니, 고민할 거리가 아주 많을 것이다.
* * *
격정의 하루였다고 해야 할까.
오늘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바라지 않았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시작되지 않았는가.
야마구치 구미와의 전쟁이라…….
니치카야 카이도 큰 출혈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그 피해를 줄여보려고 한다.
황규혁이 넘겨준 리스트대로 핵심 간부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간다면 분명히 야마구치 구미는 내부적으로 붕괴가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최후의 보루가 남아 있다.
“소스케 씨는 끝까지 저와 손을 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와타나베의 또 다른 오른팔, 소스케는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도 황규혁처럼 히나다가 와타나베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흉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와타나베에게 충성을 다하던 소스케가 아니었던가.
그는 와타나베를 버린 야마구치 구미와 더 이상 함께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그에게 잔을 건네며 말했다.
“앞으로 소스케 씨의 도움을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고 나면 소스케 씨는 야마구치 구미의 새로운 쿠미쵸가 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소스케는 아무런 대답 없이 조용히 내가 건넨 잔을 들이켰다.
내 뜻에 동조하겠다는 암묵적인 그의 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