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185화 (185/325)

185화. 대변화 (2)

“정부가 그동안 뽑지 않았던 칼을 들었습니다. 외환 위기 극복을 위해 부실한 경영을 이어 오고 있던 기업들의 리스트를 발표했는데, 그중에는 대한민국 재계 순위 5위권에 들어 있는 그룹도 있어 충격을 더하고 있습니다.”

대마 그룹부터 금영 그룹까지 정부가 새로 만든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외환 위기를 극복하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기회로 삼아 사사로이 이득을 챙겼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대마 그룹과 금영 그룹 회장이 그동안 깨끗하게 살아왔겠는가?

털지 않은 것뿐이지, 한번 털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나오게 되어 있다.

“정부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 그룹이 여러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것을 두고 유감이라는 성명과 함께, 외환 지원을 중단한다는 발표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이번 위기를 간신히 벗어날 것 같았던 두 그룹이 이대로 부도를 내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마 그룹과 금영 그룹은 원래 천성 그룹과 마찬가지로 외환 위기에서 살아남아 대한민국을 독식하게 될 대그룹이다. 그래서 나도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고 넘어가려 했다. 어차피 내가 원했던 건 천성 그룹 하나였으니까.

어차피 나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이다. 다른 그룹들을 공격적으로 흡수하는 수고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들 위에 서서 명령을 내리는 위치를 고수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그룹이 먼저 나를 건드렸다. 여기서 내가 대충 일을 해결하려 든다면 다른 기업들도 똑같이 나를 무르게 보고 허튼 수작을 부릴 수도 있다.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두 그룹을 철저히 박살 내야 한다.

“부회장님, 대마 그룹 회장님이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인터폰을 통해 대마 그룹 회장이 화진 그룹까지 직접 행차했다는 소식이 왔다. 이미 금영 그룹 회장은 콧방귀를 살짝 뀌며 멀리 쫓아낸 후였다. 대마 그룹 회장에게도 똑같은 처분을 내릴까 싶었지만, 나는 못 이기는 척하고 그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들어오시라고 해.”

“예, 부회장님.”

이윽고 제 아비를 닮아 걸쭉한 얼굴을 하고 있는 대마 그룹 회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왕자의 난을 통해 치열하게 싸운 다음 간신히 그룹의 형태를 갖춘 양반이다. 물론, 형제들에게 조금 뜯기긴 했지만, 그룹을 무너뜨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높이 살 만한 업적이다.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회장님?”

정진구는 가뜩이나 늙어 보이는 얼굴이 10년은 더 늙은 듯 보였다.

“제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잘 아실 텐데요.”

“글쎄요. 전 잘 모르겠는데요?”

당장에라도 호통을 치고 싶어 하는 얼굴이다. 하지만 그는 꾹 참으며 자리에 앉은 다음,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간의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결코 없었습니다. 부디 외환 지원을 끊는 것만은…….”

“정진구 회장님.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제가 무슨 대통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저한테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부실한 경영을 통해 지원이 끊긴 게 아니었나요?”

정진구는 손발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정도의 수치심은 평생 겪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대마 그룹 아들로 태어나 호의호식하며 모든 이들 위에서 왕 노릇을 했을 터인데,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뭘 원하십니까? 원하는 것이 있다면 제가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난 피식 웃으며 구차하게 매달리기 시작하는 정진구를 바라보았다.

외환 위기만 아니었으면 정진구는 결코 내 앞에 달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대마 그룹을 쉽게 무너뜨리진 못했을 터. 이놈의 달러가 뭔지.

죽일 놈의 달러라는 말이 참 적절한 것 같다.

“원하는 거요? 그 돈 주고도 못 산다는 대마 그룹의 지배 지분은 어떻습니까.”

정진구는 올 게 왔다는 듯 눈을 질끈 감으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난 한 번 더 웃음을 터뜨렸다.

“회장님, 아직도 이 게임의 룰을 모르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제가 지분을 달라고 했을 때 넙죽 엎드려서 바치겠다고 했어야죠.”

“…….”

이제 정진구는 입술까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이 양반은 생각이 없는 건가?

“제가 그깟 대마 그룹의 지배 지분을 얻지 못해 안달이 나서 이러는 거 같습니까? 정부에서 지원을 끊어버리면 기관이 먼저 돌아설 테고, 그럼 도미노처럼 영향이 가서 대마 그룹은 얼마 못 가 무너집니다. 이미 형제들끼리 열심히 싸우는 바람에 지금도 꽤 위험한 수준이지 않습니까?”

왕자의 난 때문에 대마 그룹은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거기다가 외환 위기로 인해 정부의 긴급 수혈을 받아 숨을 쉬고 있는 상태.

워낙 규모가 큰 기업이니, 시간이 지나면 안정을 되찾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내가 공격을 해버리면 버틸 수가 없다.

“대마 그룹이 부도 신청이라도 하는 날에는 지분도 완전 휴지 조각이 될 테죠. 정부에서도 대마 그룹에 속해 있는 직원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노력을 할 테고……. 그럼, 그때 제가 다시 구원자처럼 등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뼈를 깎는 심정으로 대마 그룹을 인수해 직원들을 살리겠다는 뉴스 속보와 함께.”

이제 정진구는 대충 상황이 그려질 것이다.

내가 불구경을 하고 있다가 마무리 단계에 나선다면 대마 그룹은 꼼짝없이 화진 그룹에 흡수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상황만은 반드시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회장님. 저와 싸우려면 이 정도 각오는 하셨어야죠. 최소한 카운터펀치에 버틸 수 있는 힘이라도 있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 도발적인 말에 정진구는 화를 내기보다는 모든 걸 포기한 눈치였다.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잠시 멍을 때리고 있다, 내게 말문을 열었다.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대신, 모든 걸 밝히겠습니다.”

“뭘 밝힌다는 거죠?”

“누가 이런 계획을 세웠는지, 밝히겠습니다.”

역시, 원흉이 있었나.

그렇지 않아도 대기업들이 하나로 뭉치는 게 수상했다. 누군가가 만들어낸 계획이 없다면 저들이 힘을 합치려 들겠는가?

나는 분명 정치계에 있는 누군가가 일을 꾸몄다고 보고 있었다.

“그게 누굽니까?”

“여당 당 대표. 임화용 의원입니다.”

흥미로운 이름이 튀어나왔다.

야당 쪽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여당 당 대표라…….

“그렇다는 건 대통령도?”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당 당 대표가 진두지휘를 했으니, 아예 상관이 없진 않을 겁니다.”

임화용 의원이라.

김일중 대통령의 레임덕 때 뇌물수수 혐의로 의원직을 내려놓게 되는 양반이다. 그런데 아직 자신의 구린 점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을 건드리다니. 거기다가 당 대표라면 김일중 대통령도 당연히 이 일을 알고 있지 않을까.

“일단 잘 알겠습니다. 회장님.”

“저기…….”

“대마 그룹에 대한 처분은… 일단 기다리십시오. 설사 제가 이번 일을 눈 감고 넘어간다고 해도 대마 그룹에 아예 피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망하지 않는 게 어딥니까.”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정진구 회장은 연신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이며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어떻게 여당 대표를 요리해 줘야 하나 곰곰이 생각을 하다 수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총리님. 화진 그룹 김태산 부회장입니다.”

“아이고.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부회장님.”

“몇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내 전화를 반갑게 맞이해 주는 총리의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아, 예. 어떤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아시다시피 요즘 외환 위기 때문에 정신이 없지 않습니까. 저도 어떻게든 정부와 국민을 돕기 위해 두 발 벗고 뛰는 중이고요.”

“국가를 위한 부회장님의 희생정신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 순수한 의도를 불순하게 생각하며 저를 매도하려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혹시 이에 대해 아시는 게 있습니까?”

총리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렵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부회장님, 대통령님과는 관련이 없는 일입니다. 임화용 의원이 단독으로 움직인 일이고 저를 비롯해 대통령님과 주요 여당 의원들은 전혀 알지 못했던 겁니다.”

의외로 순순히 실토를 한다. 내가 이렇게까지 전화를 했다는 건 이미 내막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탓일까.

“총리님, 그 말씀은 관련은 없지만 알고는 계셨다는 거네요?”

“그게… 저희도 막상 일이 터지고 나서야 알게 된 일이라 매우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도 저한테 한마디 말씀도 안 하시고 입을 싹 닫고만 계셨다는 겁니까?”

당황한 총리의 음성이 수화기를 통해 생생히 전해진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부회장님께서 보내신 리스트대로 일단 정부의 지원을 끊었고…….”

“이보세요, 양구현 총리님.”

“예. 부, 부회장님.”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신 거 같은데. 제가 지금 전화 한 통화만 걸면 IMF에서는 더 이상 우리나라에 주기적으로 보내던 외화 조달을 멈추게 될 겁니다. 그걸 원하시는 겁니까? 간신히 외환 위기에서 벗어나고 있는 이때에 한번 제대로 분탕질해 볼까요?”

현재 대통령 라인 쪽에서 내게 찍소리도 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내가 작정하고 전화를 돌리기 시작하면 한국은 더 큰 위기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 터. 당장 미국을 가도 백악관에 초대를 받는 사람이 나라는 사실을 청와대에서도 잘 알고 있지 않던가.

“부회장님, 다 오해이십니다. 절대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저는 총리님이 영원한 아군이라고 믿었는데…….”

“부회장님, 저는 항상 부회장님의 아군입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예, 정말입니다.”

총리는 다급하게 나를 붙잡고 있었다.

줄다리기는 여기까지다.

“그렇다면 그 말씀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고 싶군요. 제가 납득할 만한 행동을 보여주십시오. 그럼, 총리님을 다시 한번 믿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한테 받는 돈이 상당할 테니, 내가 지원을 끊어버리면 아쉬운 게 많을 양반이다. 그리고 난 단순히 지원을 끊는 것으로 끝내는 사람이 아니다. 내게 조금이라도 반기를 들었다가 쇠고랑을 찬 인간들이 한둘이었던가?

그걸 옆에서 지켜봐온 총리이기에 저 자세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총리라고 해도 내 앞에서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꼭 만족하실 만한 행동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믿겠습니다, 총리님. 저는 앞으로도 총리님께서 영원히 제 아군이었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럼 이만…….”

나는 총리와 전화를 끊은 다음,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어, 연욱아. 요즘 한가하냐?”

“어떤 새끼 때문에 한가하지 못하다. 뭔 일이야?”

언론에서 하도 띄워주는 바람에 인기 스타가 되어버린 연욱이는 피곤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또 예전 버릇대로 밤늦게까지 조사를 하느라 잠을 못 잔 게 틀림없다.

“많이 피곤한 거 같은데, 그래도 제보 하나 안 받을래?”

“제보? 무슨 제보. 너 또 날 이용해서 해먹을 생각이라면…….”

“무려 여당 대표를 파는 일인데. 관심 없냐?”

“…정의를 위해 검사가 제보를 무시해서는 안 되지.”

연욱이도 날 잘 알고 있고, 나도 연욱이에 대해 아는 게 너무 많다.

녀석은 내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

“여당 대표 임화용 알지. 그쪽이 아마 뇌물수수로 많이 해먹었을 거야. 너도 알잖아. 김일중 대통령 레임덕 때 야당 쪽에서 제시한 증거로 임화용이 훅 가 버리는 거.”

“아- 그랬지. 친척 일가 쪽 봐준다고 설치다가 그렇게 된 거잖아.”

아직 연욱이의 기억력이 녹슬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 그거. 그쪽 좀 털어주면 좋을 거 같은데. 그것 말고도 다른 것들도 많으니까 증거 제출은 원하는 대로 해줄게.”

“흐흐. 여당 대표를 터는 일인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좋아, 있는 대로 다 보내봐.”

남 터는 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놈이다.

만약 이런 놈이 나를 물고 늘어진다 생각하면… 벌써부터 소름이 끼친다.

세상에 연욱이 말고는 깨끗한 검사가 없어 다행이라는 씁쓸한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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