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대변화 (1)
김일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부터 그가 줄곧 얘기해 온 햇볕 정책이 실시되었다. 무조건적인 강압으로 북한을 탄압하는 보수 쪽의 행동과는 달리 그는 평화와 대화를 앞장세워 북한의 지도자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오는 전략이었다.
북한이 연이은 핵 개발로 한창 세계가 시끌시끌할 때, 나는 여유로운 하루를 맞이하며 전동련에 참석했다.
“오셨습니까, 부회장님.”
“안녕하십니까, 부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부회장님.”
전동련 행사가 있는 여의도 그랜드 붐 호텔에 모인 재계 회장들과 주요 인사들은 내가 발을 들이기 무섭게 쪼르르 달려와 인사를 올렸다. 누가 이곳에서 가장 위에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부회장님.”
“아. 회장님. 오셨군요.”
나는 천성 그룹 회장 이강찬과 손을 맞잡았다.
“점점 천성 그룹의 성과가 좋아지고 있다는 소식은 듣고 있습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본격적으로 발전을 하기 위해서 더 빠르게 뛰어야겠죠.”
이강찬은 착실하게 내가 알고 있는 미래대로 일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반드시 소니를 넘어보겠다는 신념 하나로 그는 직원들의 사기를 올리는 데에 열성을 다한다.
“전 회장님을 믿겠습니다. 아무쪼록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 기대해 주십시오.”
재계 회장들은 나와 이강찬의 대화를 물끄러미 살펴봤다.
재계 1순위 화진. 2순위 천성. 그리고 3순위가 대마.
대마 그룹은 현재 왕자의 난으로 인해 완전히 찢어질 기미가 보이고 있다.
대마 그룹 회장 정찬용이 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멀쩡히 살아있거늘, 그 밑의 자식들은 벌써부터 칼을 뽑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중이다.
“부회장님.”
“아. 어서 오십시오.”
화진 그룹 회장 권오준도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다음, 내 옆에 착석을 했다.
지금은 아직 언론의 촬영이 허용되는 시간이다. 재계 회장들끼리만 나누는 은밀한, 진정한 회의는 시작되지 않았다. 현재는 뻔하디 뻔한 말만 나누며 언론에서 국민들을 자극하지 않을 만한 얘기를 해야 한다.
“외환 위기인 만큼 앞으로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 희생하는 정신을 보이겠습니다.”
“국가에 봉사하며 나아가 국민들에게 봉사하는, 그런 기업으로 성장하고자 합니다.”
“이익을 생각하기보다는, 당장 직원들에게 나눠 줄 봉급을 먼저 생각하여 이 위기가 지나갈 때까지 아끼지 않고 베풀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누가 제일 착한 기업인가를 선전하는 무대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시커먼 속내를 어찌 모를 수 있을까. 모두 국민의 고혈을 빼먹을 생각만 할 뿐, 누구도 나라를 위해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그럼, 이상입니다.”
각 회장들의 거짓 포부를 밝히는 시간이 끝났다.
경호원들은 신호에 따라 언론 기자들을 차례로 내보냈다.
“촬영은 여기까지입니다.”
“모두 나가주십시오.”
기자들도 군말 없이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이들 회사에 광고를 대 주는 기업 총수들이 전부 모여 있지 않은가. 밥줄이 끊고 싶은 사람이 아닌 이상, 감히 총수들의 말을 거역하는 기자는 없다.
“그럼… 다음으로는 화진 그룹 김태산 부회장님의 연설이 있으시겠습니다.”
줄곧 가만히 자리에 앉아 회장들의 연설을 듣고 있던 나는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졸린 표정으로 시간만 때우고 있던 회장들과 주요 인사들은 전부 자세를 고쳐 잡으며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공기가 달라졌음을 나는 느꼈다.
이들이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언론에 나오기 위함이 아니다.
서로 한가롭게 인사를 나누는 건 더더욱 아니다.
모두 나를 보고, 내 말을 듣기 위해 모인 것이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이곳까지 와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화진 그룹 부회장, 김태산이라고 합니다.”
열렬한 박수와 환호성이 쏟아졌다.
나는 길게 끌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정부에서는 이번 외환 위기를 어떻게든 극복하고자 열심히 뛰고 있는 중입니다. 또한 국민들도 없는 돈을 내놓아 위기를 넘기려 하고 있죠. 하지만 정부의 입장은 단호합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는 기업이 있다면 가차 없이 잘라 버리겠다는 의지를 보이더군요.”
사방에서 불편한 침음과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 칼이 누구를 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건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러니까 협력을 하지 않고 단독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기업이 있다면 반드시 그 기업을 쳐 내야 한다는 정부의 입장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귀가 뚫려 있는 이상, 이 사람들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말은 정부라고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정부를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이 아니다.
이미 정부의 수뇌부들과 법원, 검찰, 경찰, 심지어 군부까지 손이 닿고 있는 바로 내가 이 나라의 핵심이 되었다.
즉, 내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는 자가 있다면 망설임 없이 잘라 버리겠다는 경고를 보낸 것이었다.
외환 위기라는 빌미를 통해 나는 몇 개의 그룹을 강제로 해체시켰다. 여기 있는 재계의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을 터.
내 손에 박살이 나는 바람에 해체를 해야 했던 신동 그룹이 아주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이 갖고 있는 63빌딩이 탐이 나기도 했고, 신동 그룹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터라 좋은 본보기로 삼아주었다.
“앞으로도 여러분의 협력을 기대하겠습니다.”
협력, 즉 너희들의 완전 복종을 기대하겠다는 소리였다.
“이 힘든 여정 속에 낙오를 하는 기업이 없었으면 합니다.”
복종을 하지 않고 반항을 하는 바람에 이름이 사라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이상입니다.”
다시 연회장 안이 박수 소리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착잡한 그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이들은 모두 회사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는 완전한 갑들이다. 그런데 내 앞에서는 갑이 아닌 철저한 을이 되어야 하니, 속이 타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그중에는 분명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영원한 권력은 없다지만, 지금 당장 내 권력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일 뿐.
그러므로 불순물은 생길 때마다 빠르게 없애줘야 한다.
* * *
전동련 행사가 어느 정도 무르익고 나서야 메인이벤트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갑자기 왜 자리를 옮긴다는 건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러나 메인이벤트는 연회장에서 벌어지지 않았다.
호텔 안에 마련되어 있는 대강당 안에서 펼쳐졌다.
“모두 자리에 앉아주시길 바랍니다.”
회장들은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 행사를 주최하는 곳이 화진 그룹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말로 불평을 뱉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리고 다시 제가 올라와서 더욱 죄송합니다.”
내가 던진 농담에 사람들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이 올라왔다면 아마 뭐라도 던져야 속이 풀렸을 양반들이다.
“이렇게 여러분을 이곳에 초대한 건, 다름 아니라 오늘의 메인이벤트가 남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들으시게 될 중대한 발표는 여러분의 기억에 영원히 남게 될 것이며 그만큼 강렬하고 인상 깊은 것입니다.”
나는 손을 튕겨 관중석 조명을 낮추고 무대 조명을 밝게 해놓았다. 그리고 그 신호에 따라 몇몇 우락부락한 조직원들이 남성 하나를 거칠게 끌고 오고 있었다.
“이, 이거 놔! 무슨 짓이야!”
남성은 반항을 해 보며 몸부림을 쳐봤지만, 그를 완력으로 끌고 있던 조직원들은 표정이 없었다. 두툼해 보이는 남성의 얼굴이 강당 위로 드러나자 여러 곳에서 짧은 기함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
남성은 내 얼굴을 보고 나서야 입을 꾹 다물었다.
난 친근한 목소리로 강당에 있는 전동련 일원들에게 말했다.
“혹시 이 얼굴을 아시는 분이 계십니까?”
누구도 대답을 하지 못 한 채 불편한 침음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나는 힐끗 웃으며 말했다.
“대성 일보의 장현석 대표인데, 정말 아시는 분이 없습니까?”
장현석이라는 이름에 몇몇 사람들이 헛기침을 터뜨렸다.
“자, 여러분. 의자 밑을 보시면 서류 파일이 있을 겁니다. 꺼내서 확인을 해주십시오.”
그들은 내 말에 따라 의자 밑에서 서류를 꺼냈다. 이윽고 서류를 확인한 이부터 경악 어린 탄성을 내질렀다. 난 그들이 읽고 있을 서류를 들어 하나씩 읽어보았다.
“깡패로 시작해 대한민국 재계를 장악하고 있는 남자, 김태산. 그는 정경 유착으로 대한민국을 조종하며 거짓 선동으로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 지금 이 나라의 대통령은 김일중이 아니다. 바로 김태산이다.”
나는 대충 읽은 서류 한 장을 던져 버리고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조직적인 살인 의혹, 공갈, 협박 등. 화진파에 대한 진실. 민주화 운동 당시에도 화진파가 정부와 손을 잡고 대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인해. 그 선봉에는 항상 김태산이 있었다?”
그다음 장은 더 가관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을 잡아와 죽인다는 김태산. 겉으로는 국민 영웅. 알고 보니 미친 살인마. 여러 명을 한곳에 모아두고 싸움을 벌이기도.”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을 죽인다는 건 억지스러웠지만, 여러 명을 한곳에 모아두고 싸움을 벌인다는 건 가끔 있던 일이라 아예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난 그다음으로 넘겼다.
내가 제일 화나는 대목이 바로 이곳이다.
“가족을 이용해 명예 유지. 화진 그룹 부회장 김태산의 모친은 악덕 사장으로 이름을 날리며 그 뒷배경으로 벌써 35개의 체인점을 냈다. 또한 화진 그룹 소유인 63빌딩에 있는 각 층수들을 사들인 것으로 나타나 공분을 사고 있다. 그리고 화진 그룹 부회장 김태산의 동생 김태혁 선수도 불법 로비를 통해 경기를 열고 승부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냐는 혐의가…….”
난 다 읽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서류를 찢어버렸다.
하마터면 입 밖으로 쌍욕이 나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나를 비난하는 건 괜찮다. 왜냐하면 몇 개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가족을 걸고넘어지는 건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
내 살기 가득한 눈을 본 것인지, 장현석 대표는 화들짝 놀라 차마 내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이보세요, 장현석 대표님.”
“아- 예. 부, 부회장님.”
“이 서류가 전부 어디서 나왔는지 아시죠?”
장현석 대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게…….”
장현석이 말을 끌자 뒤에 있던 조직원들 중 하나가 언성을 높였다.
“부회장님께서 말씀하시잖습니까. 얼른 대답하십시오!”
강압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여기 있는 회장들만 아니었으면 진작 파이프나 칼 같은 게 튀어나왔을 것이다.
“저희… 대성 일보에서 나왔습니다.”
“하하. 잘 아시네요. 그럼, 누가 이런 유언비어와 날조를 쓰라고 했는지 아시겠네요?”
“그, 그건…….”
“한 번만 더.”
나는 이를 앙 다문 채로 장현석을 위협했다.
“한 번만 더 바로 대답을 안 했다가는 그땐 말로 안 끝날 줄 알아.”
“무, 물론입니다. 부회장님!”
기겁하는 장현석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얼른 대답해. 누가 지시했어?”
장현석은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제, 제가 주도적으로 지시를 내려 기자들보고 그런 기사를 쓰게 했습니다.”
대성 일보는 결코 작은 언론사가 아니다.
메이저에 속한 언론사라는 건데, 이놈들이 이따위로 글을 쓰게 되면 내 이미지에 영향이 가게 된다.
난 볼멘 목소리를 줄이고 다시 부드럽게 물었다.
“단순히 대표님 혼자요?”
“그건…….”
장현석은 실수로 말을 끌다 내 눈을 보고는 얼른 실토를 했다.
“대, 대마 그룹에 막대한 지원을 받아 쓰게 되었습니다!”
깡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놈이다. 하기야, 메이저 언론사의 대표이니, 내가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는데요, 대마 그룹 부회장님?”
조명이 대마 그룹 부회장 정진구를 향해 쏘아졌다.
대마 그룹 회장은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난 터라, 정진구가 대신 그 역할을 맡고 있다.
나는 그가 입술을 파르르 떠는 것이 훤히 보였다.
“대마 그룹에서만 이 일을 지시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대성 일보만 이 일을 하는 게 아니라고 들었는데요?”
“그, 그렇습니다. 대성 일보도 있고 그 외 메이저 언론사에서도 대마 그룹과 금영 그룹, 그리고 여러 기업들이 의뢰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겁에 질려 있던 장현석은 아는 것을 모두 술술 토해냈다.
“그렇군요……. 그깟 돈에 눈이 팔려 감히 누구를 건드리는지 자각하지도 못한 채 일을 꾸몄다, 이건가요?”
“그, 그것이…….”
“잘 알겠습니다, 대표님. 이제 내려가 보세요. 아래에 있는 우리 직원들이 다른 편한 곳으로 모셔다 드릴 겁니다.”
“예? 자, 잠깐만요! 부, 부회장님-!!”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직원들이 장현석을 다시 어디론가 거칠게 끌고 나가 버렸다. 그는 비명을 지르듯이 애처롭게 나를 불러보았지만, 나는 일절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보셨다시피 장현석 대표님을 포함한 여러 메이저 언론사들의 대표님들이 제 뒷조사를 해가며 있지도 않은 비리를 찾아내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저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 했습니다. 그뿐인가요? 언론에 이 사실을 모두 알려 검찰과 국회에까지 영향력을 넓히려고까지 했죠.”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 모두 안색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을 지원해 주던 건 우습게도 같은 동료이며 가족이라고 생각한 여러 회장님들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를 몰아내기 위해 일을 꾸몄다. 그 ‘누구’가 누구인지는 장현석이 모두 밝혀주지 않았던가.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화진 그룹이 어떻게 시작을 했고, 또 저는 어느 바닥에서부터 시작을 했는지 다들 잘 아실 겁니다. 그리고…….”
나는 서류 뭉치들을 손으로 구기며 말을 이었다.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법적으로 뭔가를 하기보다는 물리적으로 먼저 일차적인 해결을 보는 걸 좋아하죠. 그런 제 성정, 잘 아시죠? 대마 그룹 부회장님.”
대마 그룹 부회장 정진구는 방금 죽은 사람처럼 안색이 파랗게 변해 있었다.
“금영 그룹 회장님도 잘 아시리라 봅니다만.”
금영 그룹의 회장, 구영철도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 외에도 요즘 좀 살 만하다 싶은 회장들이 계신데, 그분들도 잘 아실 거라 판단됩니다.”
이 나를, 화진 그룹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고 나아가 정치적으로도 파멸을 시키려 했던 자들의 장난질이 있었다.
화진 그룹과 천성 그룹에 밀린 대마 그룹과 금성 그룹.
이들은 한때 대한민국을 주름 잡던 기업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화진을 앞장 세워 외환 위기를 틈타 많은 기업을 인수하면서 순식간에 권력 구도가 바뀌어 버렸다. 그래서 이들은 화진 그룹의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 몇몇 기업들을 모아 일을 꾸민 것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좋지 않았다.
지금 여론은 전부 나를 칭송하고 있고, 정치계에서도 내게 대항하려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저놈들이 단순히 돈의 힘만 믿고 덤비다가 더 많은 돈을 들고 있는 나를 결국 꺾지 못한 것이었다.
“회장님들, 너무 겁먹지 마십시오. 제가 설마 회장님들을 물리적으로 어떻게 해볼까라는 생각을 가졌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그렇게 막 나가지는 않아요.”
안도의 한숨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벌써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대신, 저는 이제 이 길로 가서 국가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고 있던 저를 모함하고 화진 그룹을 매장시키려 한 회장님들의 기업을 국가에 맡길 생각입니다. 제가 아까 연설 때 그랬죠? 협력하지 않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시는 분은 정부가 가차 없이 잘라버린다고. 그건 제가 아주 찬성하는 일입니다.”
아직 외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현재 진행형이며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말을 듣지 않는 기업이 있다면 언제든지 칼을 휘두를 수 있다는 것.
겉은 외환 위기이지만, 현재 기업들을 단단히 교육시킬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즉, 아무리 거대한 그룹이라도 외환 위기에 휘청거리고 있으면 누구도 그 칼날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막대한 양의 외화를 주무르고 있는 내가 정부에게 압박을 넣는다면 그들이 나를 위해 칼을 뽑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당신들이 감히 나를 위에서 끌어내리려고 했던 것처럼 나도 당신들을 끌어내려 줄 테니까.”
나의 말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이 몸을 들썩였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의 타격을 입혀 드릴 생각입니다. 사람을 만만히 본 대가가 무엇인지, 한번 지켜보십시오. 법적으로 해결이 안 된다면 제가 좋아하는 물리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당신들을 파멸시키고 말 겁니다.”
할 말은 다 끝났다.
이들의 군기를 잡는 것도 여기까지라는 것이다.
나는 강당에서 내려와 유유히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금영 그룹 회장이 헐레벌떡 뛰어와 나를 붙잡았다.
“부, 부회장님. 다 오해이십니다. 절대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난 그런 그의 손을 부드럽게 뿌리치며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제가 하는 일도 절대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부, 부회장님!”
“부회장님!”
그에 따라 이번 일에 공모를 했던 회장들도 달려왔지만, 나는 그들을 모두 무시했다.
저들이 내게 명분을 주었으니, 나는 그 명분에 따라 저들을 전부 토막 내버릴 예정이다.
그리고 이 사태를 지켜본 다른 회장들은 앞으로 내게 감히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불미스러운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철저하고 완벽하게 이들을 밟아놓아야 한다.
그래야 죽기 전까지 이들 위에서 내가 왕 노릇을 할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