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오랑캐는 오랑캐로 (4)
“사장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화자두에 이어 천지회의 두목이라니요.”
“대두목을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방금 만난 여자도 화자두의 대두목은 아닙니다. 그래도 산하 조직을 이끄는 두목이라는 건 변함이 없지요. 지금 만나시려는 상대도 그렇고요.”
진대섭은 보기와는 다르게 겁이 많은 사람이다. 아니, 당연한 우려일 수도 있다.
내가 봐도 위험 부담이 큰일이니까. 하지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두 오랑캐가 열심히 싸우는 걸 보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화자두에서는 저를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공안에서 그것도 중앙 위원회에 있는 위원 하나가 추천을 해준 사람이 바로 저니까요.”
내가 화자두를 만난 건 어디까지나 공안의 힘이었다. 그러나 천지회부터는 다르다. 나는 수백 억대의 돈을 들여 천지회에 있는 두목 하나를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했다.
돈이 들어간 만큼, 쉽게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만에 하나라도 걸린다면…….”
“그땐 어쩔 수 없죠. 제가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 둘을 박살 낼 수밖에.”
최악의 시나리오이지만, 정말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면 그땐 나도 모든 힘을 동원해야 한다. 그래서 혹시 있을지 모를 유혈 사태를 대비해 메데인 카르텔의 조직원들과 골든 마피아에서 다루는 히트맨들까지 대거 중국으로 들여왔다.
나는 근심으로 가득한 진대섭을 잘 타일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까지 이런 일로 실패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항상 그랬듯이 다 잘될 겁니다.”
“아… 예, 사장님.”
진대섭은 여전히 걱정 가득한 표정이었다. 저걸 보니 일본에서 내 통역을 맡았던 김종관이 생각난다. 그때도 딱 저 얼굴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기입니다.”
화자두에서 운영하던 전통 유흥업소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인간들이 안에서 하는 짓은 똑같은 장소였다. 나는 진대섭과 같이 지하로 들어갔다.
몇몇 사람들이 우리를 제지하긴 했지만, 이내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화자두보다는 경계가 좀 더 삼엄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마약에 찌들어 있는 무리를 지나 비밀스러운 통로를 따라 길을 걸었다. 어느 정도 길을 가니, 입구가 나타났다.
입구를 여니 어두컴컴했던 지하 배경이 전부 사라지고 환한 빛을 자랑하는 샹들리에와 고급스러워진 분위기가 우릴 반겼다.
“그쪽인가?”
그리고 온몸에 용 문신을 하고 있는 한 남자가 거만하게 자리에 앉은 채로 큰 칼을 들고 있었다.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아, 방금 전 누군가의 목숨을 저 칼로 빼앗은 모양이다.
“리턴 컴퍼니…….”
“됐고, 자리에나 앉지.”
강압적인 태도에 진대섭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내게 통역을 해주었다.
“어서 앉으랍니다.”
“굉장히 적대적으로 보이는데요?”
“들킨 건 아닐까요.”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그냥 컨셉이 저런 거겠죠.”
나는 가볍게 웃어넘기며 자리에 앉았다. 여차하면 상대를 쏴버리고 도망치면 될 일이다. 물론,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번에 우리 조직 회사를 통해 수백억을 투자한다고 했다던데.”
“맞습니다.”
“거기다가 부지 몇 개도 사들이고.”
“그렇죠.”
“그런데 그 대가가 나를 보는 거고?”
“잘 아시네요.”
이 사람이 내가 만나려고 한 천지회의 5명 두목 중 하나인 샤오챵이다.
천지회에는 5명의 두목이 있고 그들 5명 위에서 군림하는 대두목이 하나 있는데, 샤오챵은 대두목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이라고 들었다.
그만큼 천지회 내부에서 입김이 강한 사람이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
“수작이라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이제 곧 상하이를 기점으로 중국 최고의 삼합회가 될 천지회에 미리 붙어보자는 심산이죠. 다른 뜻은 없습니다.”
슬쩍 띄워주니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던 상대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좋은 신호다.
“저는 상하이가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 정부가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상하이가 집중적으로 발달이 되었지요. 물론, 외환 위기 때문에 조금 휘청거리고 있긴 하지만 이 정도는 금방 극복할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우리 같은 삼합회들은 불법적인 일을 많이 하기도 하지만, 정식으로 합법화된 일도 많이 하는 편이니까. 그런데 그쪽 이름이 뭐라고 했지?”
“리턴 컴퍼니의 금융사 사장 김태산이라고 합니다.”
내가 건넨 명함을 받은 샤오챵의 안색이 달라졌다.
“리턴 컴퍼니?”
“예, 혹시 아십니까?”
“들어본 것 같은데. 미국에 있던 회사였던가?”
“잘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참 웃기는 세상이야.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서로 죽이기에 바빴던 나라들이 지금은 경제 개발이라는 이유로 서로에게 길을 열어주고 있으니까.”
중국과 미국이 한동안 차가운 살얼음판을 걸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돈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법이지 않습니까.”
“하하, 맞지. 그런데 삼합회가 우리만 있는 건 아닐 테고. 화자두가 중국에서는 제일 크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왜 우리한테 붙은 거지?”
화자두는 규모면에서 천자회보다 훨씬 크다. 거의 2배에 가까운 세력을 자랑하니, 샤오챵의 궁금증을 자아낼 만하다.
“화자두라…….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쪽도 생각을 해보긴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중국에 진출하려면 중국 공안과 삼합회를 동시에 친구로 만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화자두와 손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아무래도 거긴 곧 있으면 무너질 것처럼 보이더군요.”
“하하하! 천하의 화자두가 무너진다고?”
샤오창은 호탕하게 웃으며 손뼉을 쳐댔다. 하지만 나는 웃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전 농담을 하는 게 아닙니다. 샤오창 사장님.”
“농담이 아니라고? 그럼, 진심인가?”
“예, 화자두는 이미 내부적으로부터 붕괴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화자두가 붕괴하고 있다는 건 굳이 미래의 일을 알아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표면적으로 봐도 지금 화자두는 위태위태한 실정이다.
“먼저 화자두를 운영하고 있는 7명의 두목들이 문제입니다. 천지회와는 다르게 이들은 서로 화합하지 않고 따로 놀고 있는 중이죠. 각각 최고의 두목이 되기 위해 야망을 품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천지회라고 해서 다를 줄 알아?”
“그것도 부정 못 할 사실이긴 하군요. 샤오챵 사장님도 그 야망에 따라 천지회에 있는 세력을 거의 다 흡수해 나가고 있으니까요.”
샤오챵의 안색이 사뭇 달라졌다.
“아는 게 꽤 많은데?”
“다른 나라도 아니고 미국에서 구르다 온 기업입니다. 정보력 하나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샤오챵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 보라는 듯 손짓했다.
“천지회는 그래도 한창 성장 중인 삼합회이고, 이미 샤오챵 사장님이 어느 정도 권력 기반을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흔들릴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그에 반해 화자두는 다르죠. 서로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며 힘을 키우고 있습니다. 간간이 각 두목을 견제하기도 하죠. 즉, 이들에게는 조직성이 없어요.”
“조직성이 없다라…….”
“조직성이 없다는 건 외부 공격에 그만큼 취약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를 물어뜯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죠. 장담하건대, 이들은 분명히 내분에 빠져 서로를 찌르게 될 겁니다.”
샤오챵은 진중한 얼굴로 침음을 흘렸다.
그도 듣는 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화자두가 예전보다 못한 세력과 영향력을 보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간단합니다. 저는 더 이상 삼합회들 간의 싸움에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삼합회 하나에 줄을 대고 편하게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싶을 뿐이죠. 그래서 샤오챵 사장님께 정식으로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지원을 하죠. 화자두를 상하이에서 없애 버려주십시오.”
내 말을 통역하고 있던 진대섭이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헛말이 나갈 뻔했다.
그는 내 차가운 눈빛을 보고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샤오챵에게 있는 그대로를 전했다.
하지만 샤오챵의 반응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재밌는 친구네. 돈을 얼마든지 줄 테니까 우리더러 나가서 싸우라고?”
“제 언사가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제안이 아닙니까? 돈 걱정 없이 싸울 수 있을 테니까요.”
“하하, 그렇긴 하지. 원래 전쟁이라는 게 결국 돈으로 시작해서 돈으로 끝나거든. 그런데 말이야…….”
샤오챵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칼끝을 내 목에 댔다.
“방금 그 소리는 너무 건방졌어. 네가 뭔데 우리 천자회를 좌지우지하려 들어?”
통역을 하는 진대섭은 너무 놀라 딸꾹질을 해댔지만, 나는 한 점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는 간이 작으신 분이군요.”
“사, 사장님!”
“얼른 통역하세요. 제가 말하는 그대로.”
“하, 하지만…….”
“얼른!”
나의 꾸중에 진대섭은 눈을 질끈 감으며 통역을 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샤오챵의 안면이 꿈틀거렸다. 나는 그에 겁먹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 당신에게 거대한 비즈니스를 제안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천지회를 좌지우지해요? 당신은 천지회를 다스리고, 이 조직을 크게 만들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따위 대답을 할 수 있죠?”
“뭐야?!”
“언성 높이지 말고 똑바로 들으십시오. 나는 온 힘을 다해 당신을 돕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막대한 양의 자금이 받쳐준다면 지금의 천지회로 충분히 화자두를 몰살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천지회는 단숨에 중국 최고의 삼합회가 되는 겁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천지회가 화자두를 몰아내게 되면 그 이익은 돈으로 환산할 수가 없을 정도다.
“화자두가 중국 전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죠. 상하이는 그들의 본거지나 다름없어요. 그런 그곳을 천지회가 점령한다면? 화자두가 운영하던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겁니다. 기업 운영에 대한 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건 저희가 알아서 잘 해결해 드릴 테니까요.”
내가 샤오챵에게 제안하는 건 천지회의 힘으로 화자두를 몰아내면 리턴 컴퍼니가 자금을 조달해 화자두가 운영 중인 기업들이 휘청거리지 않게 잘 붙잡아 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업들을 천지회에게 넘기고 그중 몇 개는 리턴 컴퍼니가 흡수하는 쪽으로 간다면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다.
다행히 샤오챵은 멍청한 놈이 아니었다. 내가 제안하는 이 빅딜이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것.
그는 내게 겨누던 칼을 거두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제까지 그런 방식으로 미국에서 세력을 넓혔나 보지?”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미국, 일본, 한국을 이런 방식으로 운영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겁니다. 그리고 자신 있게 말씀드리죠. 저희와 함께한 조직이 실패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샤오챵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칼을 바닥에 던져놓았다. 그가 완전히 넘어왔다는 걸 난 확신했다.
“그쪽 말대로 화자두를 상하이에서 몰아낸다면 그에 따라오는 이익은 어마어마하겠지. 상하이는 중국 최고의 도시가 되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적기가 아니야.”
감이 좋은 친구다.
지금 당장 화자두를 치는 건 승산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틈이라는 건 결국 만들면 되는 게 아닙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그렇다는 건 이제 내가 본격적으로 작전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것인가.
“화자두의 두목들이 서로 싸우게 된다면… 그땐 움직여 주실 겁니까?”
오랑캐를 오랑캐로 무찌르는 계획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