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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175화 (175/325)

175화. 떠나가는 거목 (3)

“오늘 무슨 날이냐. 왜 탕자들만 바글바글 모여서 왔어?”

혼수상태에서 이제 막 깨어났다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겉모습만 보자면 권용일은 아직 쌩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를 마주하고 있는 우리 세 사람은 권용일처럼 얼굴을 부드럽게 풀 수가 없었다.

그게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권용일이 우릴 보며 실소를 짓는다.

“얼굴 좀 펴라. 상갓집 왔냐?”

“형님…….”

“인마, 사람은 갈 때가 되면 다 가는 거야. 나라고, 너희들이라고 영원히 살 거 같아? 아무리 시대가 발전해도 죽음은 못 막는다. 모든 게 자연의 섭리인 거지. 그러니까 울상들 짓지 마라. 누가 보면 당장 뒤지는 줄 알겠네.”

저렇게까지 권용일이 말하는데 우리가 계속 굳은 표정을 보일 순 없지 않은가.

우리는 억지로라도 웃는 얼굴을 했다. 그제야 권용일도 흡족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 그래야 내 새끼들답지.”

권용일은 앞에 앉으라며 손짓했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안 왔지?”

“예, 지금쯤 다들 오고 있을 겁니다.”

“어이구. 역시, 빠른 건 너희들 셋이구먼. 다른 새끼들은 내가 언제 죽나 지켜만 보고 있으니까. 지금쯤 지화자를 부르고 있겠지.”

“형님, 절대 그러지 않…….”

“괜찮아. 어차피 내가 남기고 가는 재산 좀 뜯어보겠다고 모이는 애들인데, 원래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겠냐?”

권용일의 말이 맞다.

그의 병실을 방문하는 사람들 중에 우리처럼 그를 위해서 오는 사람이 있겠는가?

대부분이 그의 재산을 노리고 오는 벌레 같은 존재들이다.

“불쌍한 놈들이지. 떨어지는 떡고물이라도 한 방울 먹어보겠다고 다 죽어가는 늙은이 보러 오느라 고생하고.”

“형님.”

“괜찮다니까. 나라도 그랬을 거야. 원래 사람이란 게 욕심이 생기면 쓸데없는 짓을 하게 마련이니까.”

쓸데없는 짓?

그렇다는 건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들을 나눠 주지 않겠다는 건가.

“그래서 하는 말인데, 태산아.”

“예, 아버님.”

“너는 내 사위야. 윤아가 지금쯤 부리나케 오고 있겠지만, 너한테 먼저 말을 하마. 내가 갖고 있는 화진 그룹 지분, 그 외 재산과 부동산 전부 윤아한테 넘겨줄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내 아내인 권윤아에게 모든 걸 물려준다는 건가. 거기다가 화진 그룹의 지분까지 넘겨주겠다니.

이미 화진 그룹 내부에서의 내 지배력은 확고하다. 그러나 지분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니던가.

내가 천성 그룹을 꿀꺽 삼켰던 것처럼 누군가가 내 회사를 노리고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 일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항상 조심하는 게 좋다.

“예, 아버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솔직히 너한테는 쥐꼬리만 한 재산이라는 거 잘 안다. 그래도 윤아가 잘 챙길 수 있게 도와줘라.”

혹시라도 권윤아에게 해코지를 하는 놈들이 있다면 작살을 내라는 뜻이다.

“항상 하던 대로, 잘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그래, 넌 옛날부터 잔소리할 게 하나도 없는 놈이었어. 이번에도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권용일은 조용히 웃으면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황규혁이.”

“예, 큰 형님.”

“일본에서 잘나가고 있다며?”

“하하, 큰 형님의 전성기만 하겠습니까. 그냥 미미한 수준입니다.”

“새끼, 가서 겸손이란 걸 배워왔구먼.”

황규혁의 손을 잡으며 권용일이 말을 이었다.

“규혁아.”

“예, 큰 형님.”

“무조건 최고가 돼라. 태산이를 봐. 저놈도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도 못 건들 만큼 최고가 됐잖아. 그러니까 너는 일본에서 최고가 돼. 알겠어?”

그 말에 황규혁은 비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너도 알아서 잘할 거야. 그리고… 일환아.”

“예, 큰 형님.”

“넌 동생들 잘 만난 줄 알아. 저놈들 아니었으면 넌 진작 요단강 건넜어.”

“하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놈들을 상전 모시듯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권용일의 말처럼, 나와 황규혁이 없었다면 성일환은 지금쯤 이진용 손에 죽었을 것이다.

“아무튼, 셋이서 싸우지 말고 잘 살아. 가끔씩 모여서 술도 한잔하고. 동생 좋다는 게 뭐냐. 피는 안 섞였지만, 너희들은 가족보다 더 끈끈하게 묶여 있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황규혁, 성일환, 그리고 나.

우리 셋은 함께 역경을 넘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하지만 마음이 먹먹해지는 말이다.

마치 저 말은 세상을 떠나기 전,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당부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큰 형님도 저희랑 같이 한잔하셔야죠. 언제까지 그 답답한 침대에서 누워 계실 생각이십니까?”

“자식, 말 안 해도 그렇게 하려고 했어. 그러니까 다들 발 닦고 기다려. 내가 금방 일어나서 술 한 잔씩 돌릴 테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 확신이 없어 보였다.

권용일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 다들 돌아가. 곧 있으면 불청객들이 우르르 쏟아져 올 텐데.”

“좀 더 있으면 안 됩니까?”

“안 돼. 바쁜 사람들이 늙은이 곁에 있어서 뭐 하려고? 썩 나가.”

권용일은 손을 저으며 얼른 나가라고 재촉했다.

결국 우리는 쫓기듯이 밖으로 나와야 했다. 그리고 성일환이 밖으로 입에 담배를 하나 물었다.

“앞으로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

“예?”

“의사가 그러더라. 길어야 며칠이라고. 방금 저렇게 우리한테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신 것도 대단한 정신력이 있어서야. 의사도 놀라더라. 원래는 쓰러져서 움직이지도 못해야 하는데.”

대단한 정신력인가.

과연 권용일답다.

“그래도 정신력으로 버티고 계시는 것도 한계가 있어. 우릴 급하게 내쫓은 것도 더는 버티기 힘드니까 그러신 거야.”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역시 그랬나.

“아무튼, 마음의 준비들 단단히 하고 있어. 그리고 큰 형님 말씀대로 울상 짓지 말고.”

“…예.”

나는 병원 복도를 따라 보이는 권용일의 병실을 바라보았다.

내 눈에 한 그루의 거목이 쓰러져 가는 게 보였다.

* * *

“아이고- 아버지-!”

거짓말처럼 권용일은 우리 셋과 만난 뒤 바로 다음 날 숨을 거뒀다.

마지막 말을 남기기 위해 영영 깨어나지 못할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할 말을 하고 다시 잠에 든 것일까.

그 양반 성격이라면 저승사자의 목덜미라도 잡고서 다시 벌떡 관에서 일어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드라마틱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부회장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총리님.”

대통령의 수족이라는 국무총리가 권용일의 장례식까지 찾아왔다. 그 외에도 여러 정계 인사들과 전동련 사람들이 찾아왔다.

말을 바로 하자면, 이들은 권용일의 장례식에 온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만나기 위해서 온 것이다.

씁쓸하지만, 그래도 이들이 자리를 빛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됐다. 권용일의 가는 길이 외롭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어서 오십시오. 의원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부회장님.”

밀려드는 조문객들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두 나와 권윤아에게만 인사할 뿐, 권오준에게도 가볍게 눈짓 인사만 보였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부회장님.”

그리고 천성 그룹 회장 이강찬까지 직접 찾아왔다.

“일본에 계신다고 들었는데…….”

“제가 어떻게 안 올 수가 있겠습니까. 급하게 스케줄을 정리하고 왔습니다.”

천성 그룹은 지금 공격적인 마케팅과 시설 확장으로 미국과 일본을 동시에 노리고 있다. 이강찬의 첫 목표는 소니를 넘는 것이지 않던가.

그 목표대로 차근차근 움직이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이강찬과 함께 정계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내게 힘을 실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천성 그룹에도 정부가 힘을 실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잠깐 휘청거리긴 했어도, 다시 내 돈으로 회생한 곳이지 않은가.

어느 정도 조문객들을 돌려보내고 난 뒤, 그제야 나는 홀로 권용일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치익-

평생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권용일이 즐겨 피우던 시가를 입에 물었다.

길게 한 모금 빨아들인 다음 다시 길게 뱉었다.

겨우 한번 빨았을 뿐인데, 벌써부터 머리가 핑핑 돈다.

“전 이런 거 피우면 안 될 거 같네요, 아버님.”

도저히 못 피울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나는 오기로라도 끝까지 하나를 다 피웠다.

“아버님이 생각나면 가끔씩 하나씩 피우도록 하겠습니다.”

외국에 갈 때마다 나는 권용일이 좋아하는 시가들을 골라 사왔다. 그래도 마약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던 양반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가는 길이 외롭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위에서도 행복하게 사십시오. 여기처럼 치열하게 사는 게 아닌, 정말 편안하게 사세요.”

나는 할 말을 마치고 다 피운 시가를 영정 사진 앞에 놓았다.

꽃이 아닌 시가.

권용일이 딱 좋아할 만한 수준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말했던 것처럼 나는 최대한 웃으면서 권용일을 보냈다. 눈물이 떨어지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한때 거리를 다스렸던 제왕의 죽음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 * *

“김태혁 선수! 섬광 같은 라이트!!”

여기는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세상 다양한 도박꾼들과 싸움꾼들이 모이는 라스베이거스 아레나.

나는 열렬히 응원하는 관중들과 섞여 링 위를 지배하고 있는 태혁이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아아-! 김태혁 선수 위기!!”

상대는 WBC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로이 존스 주니어였다.

현재 WBA에서 미들급을 석권하고 있는 로이 존스 주니어는 천재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굉장한 테크닉을 구사하고 있다. 태혁이가 아니었더라면 WBC에서 미들급과 슈퍼 미들급을 차례로 석권했겠지만, 지금은 WBA에서 미들급 타이틀과 WBC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다.

아무래도 태혁이의 괴물 같은 실력에 그쪽 프로듀서들이 일부러 경기를 늦춘 것 같았다. 그래야 둘의 싸움이 희대의 경기로 선전되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들의 예상은 아주 정확했다.

이 경기를 보러 오기 위해 수많은 나라에서 관중들이 찾아왔으며 티켓값도 어마어마하게 올라갔다.

소문난 잔치에는 먹을 게 없다고는 하지만, 오늘 경기만큼은 달랐다.

방어보다는 화끈한 공격을 주로 세우는 김태혁. 그와 더불어 로이 존스 주니어도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다.

당연히 1라운드부터 무시무시한 난투전이 벌어졌다.

“로이 존스 주니어! 계속해서 강력한 연타로 김태혁 선수를 코너에 몹니다!”

이번 경기는 한국에서도 굉장한 관심을 받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많은 사람을 뽑으라고 하면 김태혁이지 않던가.

그만큼 김태혁의 경기는 온 국민을 TV 앞에 앉게 만들었다.

그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국회의원 비리 문제로 시끄러워해야 할 언론이 모두 입을 다물고 김태혁 경기에만 신경을 쏟고 있다.

여당을 공격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는 야당으로서는 힘이 빠질 수밖에.

“아아-! 김태혁 선수! 반격합니다!!”

5라운드까지는 완전히 로이 존스 주니어의 일방적인 경기였다. 하지만 6라운드 때부터 반격의 기회가 찾아왔다.

상대의 타이밍을 완전히 습득한 태혁이는 계속해서 카운터를 날렸고 로이 존스 주니어는 점점 다리에 힘이 풀려가고 있었다.

이로써 분명해졌다.

태혁이는 5라운드 전체를 일부러 맞아가며 로이 존스의 타이밍을 잡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성과가 눈앞에 나타나고 있다.

“아-!! 로이 존스 주니어 다운-!!”

3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며 미국에서는 로이 존스 주니어를 영웅시 했다. 그렇지 않아도 김태혁이라는 강력한 아시아계 선수로 인해 미국의 자존심이 긁히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 대항마로 로이 존스를 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애써 내놓은 최고의 대항마가 김태혁의 주먹에 추락했다.

“7! 8! 9! 10!! 경기 끝입니다!! 새로운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이 탄생합니다!!”

카운트다운을 셀 때 분명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소리쳤을 것이다.

이제 나도 흡족하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겠다. 마음 같아서는 선수 대기실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경기는 잘 보셨습니까?”

“예, 미스터 로페즈.”

다니엘 로페즈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바 없는 얼굴이다.

골든 마피아의 주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레나에 머물며 예전과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내 든든한 지원군이기도 하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미스터 김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지요.”

“예, 로이한테 들으셨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름 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쪽에서 먼저 연합을 건드린 이상, 저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요.”

어느덧 연합에 대한 유대감이 강해진 로페즈였다. 그렇다면 나도 한결 말하기 편해진다.

로페즈는 내게 잔을 하나 건네며 은근히 물었다.

“그래서, 언제쯤 갈 생각이십니까. 중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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