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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170화 (170/325)
  • 170화. 풍성한 수확 (2)

    가벼운 발걸음, 가벼운 마음으로 나는 호텔 레스토랑에 자리를 하고 있었다.

    아직 만찬이 준비되어 있진 않았지만, 벌써부터 배부른 기분이다. 그리고 내 앞자리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당혹과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아니, 김 부회장이 왜 여기에 있어?”

    “오셨군요. 앉으십시오.”

    이강혁 회장은 통째로 빌린 레스토랑에 깔린 조직원들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여기서 미팅이 있는데, 나 때문에 와준 건가?”

    물론이다. 오늘 나는 이강혁에게 누가 위인지 알려주기 위해 나온 것이다.

    “그렇습니다, 회장님.”

    “하하. 이거 고맙네. 그렇지 않아도 나 혼자 오려니까 영 껄끄러워서 말이야. 역시, 우리 김 부회장밖에 없어.”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는지, 이강혁의 자세가 편해졌다. 하지만 이제 그 자리가 가시방석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왜 안 와? 좀 늦어지는 건가?”

    “누구요?”

    “누구긴. 나한테 돈 빌려준 사람이지.”

    “그 사람이라면 지금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순간 이강혁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나를 멍청하게 쳐다보다 놀란 목소리를 냈다.

    “뭐, 뭐라고?”

    “천성 그룹이 빌린 7억 달러의 주인. 그게 바로 저라는 겁니다.”

    여기 미국까지 건너올 때만 하더라도 이강혁은 별의별 상상을 다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돈 빌려준 놈들을 구워삶아 기한을 연장시킬 수 있는지. 하지만 이런 상황은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놀라셨습니까?”

    “저, 정말이야? 그 큰돈을 정말 자네가…….”

    “큰돈이요? 글쎄요. 7억 달러면 저한테 그다지 큰돈이 아닙니다, 회장님. 하지만 거저 줄 수 있는 돈도 아니지요.”

    이강혁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리고 얼른 태세 전환을 했다.

    “아이고, 우리 김 부회장이 이렇게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니. 내가 진작 알고 있었어. 그런데 처음부터 돈을 빌려준 사람이 부회장이라는 걸 귀띔이라도 해주지 그랬나. 그랬으면 미국까지 발걸음을 하지 않았어도 될…….”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하셨나 봅니다.”

    나는 한껏 거만한 자세로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이강혁에게 말했다.

    “회장님. 저는 당신에게 기한을 연장해 줄 생각이 요만큼도 없습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모르시겠습니까? 처음부터 이 돈을 빌려준 건 저였습니다. 제3금융권을 만들어 돈을 융통해 드린 것이 바로 저였다는 겁니다. 왜 그랬는지 느낌이 오지 않으십니까?”

    “……!”

    이강혁은 설마 하는 생각에 입을 벌렸다.

    “아니지? 내가 생각하는 그런…….”

    “그런… 뭐요? 아마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저는 천성 그룹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7억 달러라는 돈을 쓴 거예요.”

    “뭐야?!”

    이강혁은 상을 강하게 내려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조직원들이 우르르 달려와 이강혁을 포위했다.

    이강혁도 나름 사람을 몇몇 데려오긴 했다만, 벌써 조직원들 손에 제압을 당한 후였다.

    “언행을 조심하십시오. 저는 당신에게 7억 달러를 빌려준 채권자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목숨 줄을 잡고 있기도 하고요.”

    “너…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제가 어찌 그걸 모르겠습니까? 위대하신 천성 그룹 회장님인 걸. 하지만 천성이라고 해서 다를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이번에 한국을 덮친 외환 위기는 그냥 물러가는 게 아니에요. 천성도 그것 때문에 7억 달러를 갚지 못해 빌빌거리고 있잖습니까.”

    “그거야 몇 주만 더 있으면 돼! 조만간 국가에서 지원이 나오게 될 거야. 우리 천성 그룹은 수혈 1순위고!”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뭐야?”

    “절 겪어 보셨다면 아실 텐데요. 제가 병신도 아니고 천성 그룹이 수혈 받는 걸 지켜보고 있겠냐는 겁니다.”

    이강혁은 몸을 들썩이며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원조를 받은 정부가 천성 그룹을 지원해 주지 않는다?

    그런 전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터.

    “천성이 아직도 정부에서 왕 노릇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큰 오산입니다. 정부 쪽 사람들은 더 이상 천성의 봉이 아니에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그 새끼들 다 천성에서 준 돈으로 자식새끼 옷 입히고 외국 보냈어. 그런 놈들이 감히 나를 배신할 거 같아? 그랬다가는…….”

    “그랬다가는 천성에서 쥐고 있는 비리들을 다 터뜨리겠죠. 하지만 생각 잘하셔야 할 겁니다. 정부를 적으로 돌리게 되면 천성은 답이 없어요. 당장 7억 달러도 못 갚는 양반이 정부를 상대로 싸움을 걸겠다는 겁니까?”

    “입 닥쳐!”

    “끝까지 들으세요. 그리고 감방 가서 평생 썩지 않으려면 내가 하는 말에 입 닥치고 따르셔야 합니다.”

    “어디서 감히……!”

    이강혁은 상이라도 엎을 기세였으나 조직원들 때문에 옴짝달싹 못했다.

    나는 여유롭게 잔을 들어 목을 축인 다음 말을 이었다.

    “회장님이 가지고 계신 지분. 전부 내놓으십시오. 그럼, 천성도 살고 회장님도 살 겁니다.”

    급기야 이강혁은 실성한 사람처럼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김 부회장, 너무 나갔어. 그게 가능할 거라고 보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바로 천성 그룹 지배 지분이야. 그런데 그걸 내놔라?”

    “맞습니다. 돈으로 사지 못하죠. 하지만 제가 게임의 룰을 바꾸지 않았습니까. 회장님은 그걸 내놓으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오늘따라 지랄이 풍년이구먼. 김 부회장이야 말로 생각 잘해. 나 천성 그룹 회장이야. 네가 한국 땅 밟는 순간, 완전히 박살 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말입니까?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그럼, 어디 한번 시도해 보시죠. 이 길로 가서 저를 쥐 잡듯이 잡아보라는 겁니다.”

    “미친 새끼.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나 하지 마라.”

    이강혁은 그대로 몸을 돌려 신경질적으로 조직원들에게 소리쳤다.

    “비켜, 이 새끼들아!”

    내 눈짓에 조직원들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두고 보자고, 어디.”

    “예, 이강혁 회장님.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이강혁은 이를 빠득 갈며 레스토랑을 나섰다.

    나는 피식 웃으며 레스토랑 지배인에게 손짓해 와인을 따르게 했다.

    땅을 치고 후회한다라.

    그게 과연 누굴 두고 하는 말일지, 두고 보면 알 것이다.

    * * *

    “하하. 차관도 아니고 그 밑의 사람이 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한국으로 돌아온 이강혁은 곧바로 정부 측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어떻게든 상황을 해결하고 사태 파악을 위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장관도, 차관도, 거기다가 국장도 아닌 부국장이 회장실을 방문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죄송하다는 말은 필요 없어. 내가 딱 하나만 말하지. 이번에 정부로 들어오는 긴급 지원금, 천성에 먼저 주도록 해.”

    완전한 명령 어조였다. 그러나 부국장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은…….”

    쨍-!

    죄송하다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이강혁 회장은 재떨이를 던져 버렸다.

    “지금 뭐라고 했어, 이 새끼야. 그건 힘들 것 같아? 미쳤냐?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제가 뭔 수를 쓴다고 해도 정부의 방침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이 새끼가 끝까지……! 좋아. 그럼, 1차 긴급 지원은 어쩔 수 없다고 치고, 2차 때는 괜찮을 거 아니야?”

    “그것도 아마…….”

    “야 이 새끼야!!”

    이강혁은 참다못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부국장에게 삿대질을 했다.

    “국장도 아니고 부국장인 새끼가 온 것도 지금 열불이 나 뒤지겠는데, 2차까지도 말아먹으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천성 그룹도 이대로 망하게 놔두겠다는 거지? 그럼, 국장부터 장관까지 전부 나한테 받은 돈 다 토하게 만들어줄까? 너도 내 돈 잘만 받아 처먹었으면서 왜 중요한 때에 일을 못 하는 거야! 이러라고 내가 지금까지 돈을 준 거잖아!”

    “죄송합니다, 회장님. 저는 정말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왜 힘도 없는 새끼가 감히 내 앞에 와서 알짱거려! 국장, 아니지, 차관이라도 불러서 내 앞에 데려다 놔!”

    “…….”

    이강혁은 길길이 날뛰어봤지만, 부국장은 아무런 답도 줄 수가 없었다.

    “병신 같은 새끼.”

    그는 결국 수화기를 들어 재정경제원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천성 그룹 회장 이강혁이야! 장관님 바꿔! 뭐, 뭐야? 나 천성 그룹 이강혁 회장이라고. 당장 바꾸라니… 여보세요! 이런 시발!”

    하지만 장관님은 지금 바쁘시다는 비서의 퉁명스러운 말과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이강혁은 수화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발로 짓밟았다.

    장관도 전화를 받지 않고, 차관부터 국장까지도 이강혁을 피하고 있다. 그렇다는 건 답이 뻔하다는 거 아닌가?

    “부국장.”

    차츰 목소리가 가라앉은 이강혁 회장의 부름에 부국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예, 회장님.”

    “솔직히 말해봐. 화진 그룹인가?”

    “…예?”

    “내가 공들여서 돈 처바른 새끼들이 전부 화진한테 홀라당 넘어간 거냐고.”

    “그, 그게…….”

    “똑바로 답 안 해!?”

    이강혁 회장의 호통에 부국장은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예, 회장님.”

    “하하. 시발. 내가 정치하는 새끼들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서, 뭐야?”

    “네?”

    “무슨 미끼를 던졌기에 그 새끼들이 꼬리를 살랑이면서 넘어간 거냐고.”

    “그게…….”

    “똑바로 대답 안 해!?”

    부국장은 이번에도 눈을 감으며 참회하는 심경으로 대답했다.

    “화진 그룹에서 정부와 딜을 했습니다.”

    “무슨 딜?”

    “7억 달러를 주겠다고 하더군요. 이번에 1차 원조금이 15억 달러인데, 그중 절반을 주겠다고 하니 정부 입장에서는 당연히 환영할 수밖에요.”

    7억 달러라.

    이렇게 엿을 먹이는 건가.

    김태산 그놈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7억 달러?”

    “예, 사정이 좋아지면 더 내놓겠다고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것도 총리와 쇼부를 본 거라서 아마 돌이키기 힘들 거라 봅니다.”

    총리와 쇼부를 봤다면 게임 끝이다.

    아무리 레임덕이라고 하지만, 지금 같은 위기에서 레임덕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당장 불을 끄는 것이 중요할 테니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발등에 떨어진 불을 잡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바로 그때 화진 그룹에서 7억 달러라는 거금을 내놓았으니 넘어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다.

    “젠장. 안 넘어가는 게 이상한 일이네. 7억 달러를 내놓다니. 대통령도 눈이 돌아갔겠어.”

    “죄송합니다…….”

    “그럼, 이대로 끝이야? 천성 그룹이 망하는 걸 정부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거냐고.”

    “그건 아닙니다.”

    “그럼?”

    “정부에서도 천성 그룹이 무너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화진 그룹이 천성 그룹에 돈을 지원해 주기로 이미 약속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인가.

    정부가 천성 그룹에 손을 뻗지 않는 건 화진 그룹의 확실한 약속이 있어서다. 거기다가 7억 달러라는 돈까지 서슴지 않고 내놓았다.

    ‘도대체 그 새끼가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기에!’

    이강혁은 몸서리를 쳤다.

    천성 그룹에 내놓은 돈이 7억 달러. 그리고 정부에 지원해 준 돈도 7억 달러.

    총 14억 달러에 이르는 돈이다. 거기다가 저번에 김태산은 자신 있게 말하기까지 했다.

    7억 달러는 자신한테 큰돈이 아니라고.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놈이란 말인가.

    “알겠어. 나가봐.”

    “알겠습니다, 회장님.”

    부국장은 도망치듯 회장실을 나섰고, 이강혁은 한숨을 푹 쉬며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이대로 내가 꼬리를 내릴 줄 알았다면 착각이야, 이 새끼야.”

    그런 다음 그는 부서진 수화기를 들고 어디론가 열심히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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