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풍성한 수확 (1)
“로이, 거기 상황이 어떻습니까?”
“난리지. 금리 올린다고 발표 한 번 했을 뿐인데 아시아가 줄도산을 내고 있잖아.”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서 시작된 IMF 외환 위기.
이로 인해 아시아에 투자를 했던 미국 기관사와 개인 투자자들은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외환 위기가 온 아시아를 덮쳐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이강혁한테는 계속 연락이 오고 있죠?”
“제발 몇 주만 시간을 달라고 사정사정하더라. 그런데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지. 흐흐.”
“잘하셨습니다. 조만간 로이가 연락을 넣어주세요. 그리고 이강혁한테 이렇게 말을 해주십시오. 직접 미국으로 와서 왜 천성을 믿어야 하는지 설명을 하라고요. 반드시 이강혁이 와야 한다고 못을 박으세요.”
“음… 귀찮게 만나고 싶진 않았는데.”
“물론, 로이가 이강혁을 만날 일은 없을 겁니다.”
내 말을 알아들은 모양인지 로이의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내가 무대 한번 잘 꾸며볼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
“예,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은 다음 곧 바로 이강혁에게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화진 그룹 부회장 김태산입니다.”
“아아. 김 부회장!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어.”
이강혁은 저번에 봤을 때보다 목소리가 더 갈라져 있었다.
아버지가 공들여 세운 천성이 다 무너지게 생겼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제가 어렵게 그쪽에다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긴밀히 이야기를 나눴죠.”
“그, 그래서?”
“일단 그쪽에서도 시간을 좀 주겠다는 반응입니다.”
“정말인가? 정말 시간을 더 주겠다고 그랬어?”
“예. 그런데…….”
나는 잠시 말을 끌며 한 템포 쉬어갔다.
“그런데 뭐?”
“그쪽에서는 회장님이 직접 미국으로 건너와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회장님이 앞으로 천성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지로 시작해 앞으로의 비전을 듣고 싶다더군요.”
“내가? 그냥 사람 보내면 되는 거 아닌가?”
이강혁은 역시 절박함이 없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회장 자리로 올라간 것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려나.
하지만 회사가 위기에 빠졌다면 진작 미국으로 넘어갔어야 했다. 이철호라면 분명히 그리했을 터. 그러나 이강혁은 왕 노릇을 하다 보니 남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마음을 모르는 것이리라.
이제 그걸 알려줄 때가 왔다.
더 이상 갑이 아닌 을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으로.
“회장님. 일단 회사를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국에 있는 사업장들 전부 빼앗기고 싶으신 거예요? 그리고 한국도 아니고 미국에서 돈을 떼어먹으면 심각해져요. 거기서 바로 고소장이랑 소환장 날아오면 한국 정부에서 막아줄 수가 없어요.”
이강혁은 마냥 바보가 아니다.
한국이라면 어떻게든 사법부에서 처리를 하겠지만, 미국에서 날아온 고소장과 소환장을 맘 놓고 거부할 순 없다. 당장 한국 정부가 외환 위기에 빠져 미 정부의 눈치를 보고 있는 이때에, 누가 이강혁을 보호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천성의 회장이라고 해도 막아주는 데에 한계가 있을 터. 그리고 나도 직접 나서서 정부가 이강혁을 보호해 주지 못하게 힘을 쓸 것이다.
그럼, 이강혁은 꼼짝없이 한국 교도소가 아닌, 미국 교도소에 갇혀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일을 풀어갈 때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할 터. 그렇게 복잡하게 일을 풀어가기보다는 일사천리로 처리하는 것이 낫다.
“회장님이 직접 가서 그들을 설득하셔야 합니다. 그럼, 이번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거예요.”
“으음……. 알겠네.”
이강혁은 힘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면 미국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무려 7억 달러의 거금을 빌리지 않았던가. 그걸 당장 갚으라고 하면 천성은 100% 부도다. 아마 이번 주 내로 이강혁은 미국행 비행기를 탈 것이다.
“자. 어떻습니까, 이강찬 씨.”
나는 소파에 앉아 모든 걸 듣고 있던 이강찬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항상 무표정하게 있던 그의 얼굴이 오늘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제 무대는 다 완벽하게 설치가 되었어요. 그곳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건 저와 이강찬 씨가 되어야 할 겁니다.”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사람은… 첫째 형님이고요?”
“잘 아시는군요.”
이강찬은 길게 숨을 내뱉은 다음 내게 물었다.
“부회장님, 전 아직도 이해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상황을 보니까 저 없이도 충분히 형님을 제압하고 난 다음 천성 그룹을 통째로 삼킬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저한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경영에는 젬병이라서요. 그리고 이강찬 씨 같은 능력 있는 분이 천성 그룹을 이끌어주셔야 합니다. 그럼, 천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발전을 하게 되겠죠. 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저번에 나는 이강찬과 약속을 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강찬을 지지해 주겠다고 말이다. 그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나는 그를 절대 회장 자리에서 끌어내릴 생각이 없다. 그건 서로가 약속한 일.
“약속은… 꼭 지키실 거죠?”
“하하. 계약서라도 써드릴까요? 전 뒤에서 지켜보기만 할 뿐, 실질적으로 천성을 움직이는 건 바로 이강찬 씨가 될 거예요. 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저거다.
바로 저런 눈빛을 원했다.
욕망에 불타오르는 바로 저 눈빛.
저것이 바로 이강찬의 본모습이지 않겠는가.
“속전속결로 결판을 낼 겁니다. 이강찬 씨도 마음의 준비를 해두세요.”
“…예, 부회장님.”
이강찬도 마음을 정했다. 이제 본격적인 행동에 나설 차례다.
* * *
“태산아. 끌고 왔다.”
정식이는 내 전담 비서를 맡고 있다.
말이 비서지, 실상은 더러운 짓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대기업의 비서들이란 본디 그런 존재로 전락하지 않던가.
회장의, 혹은 사장의 더러운 짓을 대신하며 두둑이 돈을 챙기는 그런 존재.
나는 이재욱과 조직원들 손에 끌려온 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 남자도 나를 알아봤는지 토끼 눈을 치켜떴다.
“다, 당신은…….”
“오랜만입니다, 정재원 실장님.”
정재원 실장은 이강혁이 부회장 시절 때부터 옆을 지켜온 사람이다. 지금은 회장의 비서로 천성 그룹 내에서도 큰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하하. 제 출신이 뭔지 잊으셨나 봅니다. 지금이야 부회장이랍시고 회사에 앉아 있지만, 여전히 이 나라 거리는 제가 꽉 쥐고 있으니까요.”
정재원은 화진 그룹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고 있다. 그리고 조금만 수틀리면 다른 곳보다 훨씬 더 막 나갈 수 있다는 것 또한 말이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하죠.”
나는 서류 하나를 정재원에게 던졌다.
“읽어보세요.”
정재원은 내가 던져준 서류를 들어 조심스레 펼쳐 보았다. 그리고 한 장씩 서류를 넘길 때마다 그의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이, 이걸 도대체 어떻게…….”
“말씀드렸잖아요. 우리 출신이 어딘지. 허구한 날 못된 짓만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남이 하는 나쁜 짓이 뭔지 모를까? 그리고 그건 내가 준비한 서류에 절반도 안 돼요.”
저 서류는 이강혁이 회장으로 취임한 시절부터 싹싹 긁어모은 비리 자료다.
명동에 있는 우리 조직원들을 전부 풀어 알아낸 것이니, 틀림없을 터.
만일 이철호였다면 증거조차 남기지 않고 일을 벌였겠지만, 이강혁은 너무 자만했다.
누구도 천성을 건드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별 조심성 없이 일을 벌인 것이다.
저게 바로 재벌들의 문제점이다.
재벌은 사람을 주먹으로 때려 죽여도 1심에서는 징역형, 2심에서는 집행 유예, 마지막 3심에서는 무죄로 풀려난다. 그리고 감히 재벌을 고소한 피해자는 역으로 고소를 당해 교도소로 끌려가는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하는 게 다반사.
그게 바로 재벌의 특권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괜히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
하지만 동등한 힘을, 아니 더 압도적인 힘을 가진 사람이 재벌을 공격한다면?
그땐 상황이 역전되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정확히 이틀 후에 이걸 전부 퍼뜨릴 겁니다. 그럼, 우리 잘나신 이강혁 회장님은 이 일의 희생자로 누구를 선택할까요?”
정재원 실장은 안색을 굳히며 내게 물었다.
“회장님은 저를 절대…….”
“정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정재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알 것이다.
일이 급해지면 이강혁은 절대 제 발로 교도소에 들어가지 않는다.
희생자를 뽑아 그를 대신 내세울 터.
이건 모든 재벌들이 행해온 관습이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이강혁 회장이 과연 누굴 제물로 삼을까요? 여기 보니까 정재원 실장님 이름이 빠진 곳이 거의 없던데. 이대로 검찰에 보내고 언론에도 빵빵 터뜨리면 아주 볼 만할 겁니다.”
“검찰도 그렇고 언론에서도 터뜨리지 않을 겁니다.”
“하하. 눈치가 없으신 분이네. 이미 레임덕 시작된 지 오래예요. 그리고 천성 회장님보다 누구 입김이 더 셀 거 같습니까?”
“그, 그건…….”
“그냥 평사원이면 천성이 제일 강할 거라고 답하겠지만 당신은 그러면 안 돼지. 누구보다도 이쪽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사람이잖아.”
정재원도 천성에 있으면서 이것저것 들은 게 많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잘 나서지 않아서 그렇지, 천성의 회장보다 내 입김이 더 세다는 건 이미 알고 있을 터.
“더군다나 지금 나라가 뒤집어졌어. 모두 달러만 찾고 있다고. 그때 수십 억 달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딱 나타나서 돈 좀 뿌려봐. 정계 인사부터 내로라하는 재벌 가리지 않고 전부 내 앞에 달려올걸?”
“수, 수십 억!”
“아무튼, 그건 그냥 넘어가고. 지금이라도 정재원 실장은 라인을 아주 잘 타야 할 거예요. 천성 그룹이 진흙탕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잖아요?”
회장 옆에서 사무를 도맡아 하고 있으니 천성 그룹이 지금 얼마나 쪼들리고 있는지 정재원이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을 낸다면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누가 그럽니까? 정부가 지원을 해준다고.”
나는 수화기를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 총리님. 저 김태산 부회장입니다.”
총리라는 말에 정재원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예예. 요즘 정신이 없으시죠. 그 마음 충분히 헤아립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갖고 있는 달러를 풀어볼까 싶어서요. 아, 네. 정말입니다. 나라를 위한 일인데, 물론 그래야죠.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정부가 긴급 수혈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예, 근데 그 자금이 천성에 들어간다는 괴소문을 들어서요.”
현재 총리는 거의 허수아비나 다름이 없다. IMF사태가 터지기 전부터 이미 청와대는 식물 정권으로 전락되어 버린 상황.
역대 대통령 중에서 김강산 대통령의 레임덕이 가장 심하게 온 것이었다. 그러나 총리는 총리다. 누군가에게 돈을 줄 수 있는지는 대통령과 총리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달러를 지원해 주는 대신 천성 말고 다른 중소기업들을 살려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서 어려움에 빠진 기업들을 회생시켜 놓겠습니다. 한 7억 달러 정도면 괜찮으시겠습니까?”
7억 달러라는 말에 정재원 실장의 얼굴이 다시 한번 경악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정재원 귀에 대고 들려주었다.
“물론입니다, 부회장님. 7억 달러라는 거금을 내놓으시겠다는데 어떻게 제가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부회장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끝났다.
천성은 긴급 수혈 대상에서 제외됐다. 나는 싱긋 웃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정재원에게 물었다.
“보셨죠?”
“…예.”
정재원은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천성은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절망적인 상황.
“정재원 실장에 대해 제가 조사를 좀 해봤어요. 근데 참 효심이 깊은 아들이더군요. 어머니와 아버지의 병원비를 위해 열심히 전선에서 뛰고, 자식들도 다 키워서 해외에 보내고. 이렇게 열심히 사시는 분이 감옥에 끌려가서 가족들까지 다 굶겨 죽이면 쓰겠습니까?”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들었으니, 이제 돈으로 유혹할 때다.
가족 얘기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만일 정재원 씨가 제 제안을 거절한다면 전 이렇게 할 겁니다.”
난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첫째로는 모든 걸 터뜨리고 정재원 씨가 죄를 뒤집어쓰는 걸 방관할 것이며.”
나는 두 번째 손가락도 들어 올렸다.
“둘째로는 해외에 있는 정재원 씨의 자식들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히트맨들을 뿌려서라도 말이죠. 그리고 정재원 씨가 그렇게 아끼시는 부모님도 여생을 편히 보내시긴 힘들 겁니다.”
“부, 부회장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전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이 손으로 얼마나 많은 피를 묻히고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그 정도의 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정재원은 울상이 된 얼굴로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회장의 비서라는 이유로 천성에서 권력을 휘둘러 댔겠지만, 이 정도로 지독한 협박을 받아본 건 이번이 처음이리라.
“어떻습니까? 저는 여기서 번호 몇 개만 누르면 바로 일을 진행시킬 수 있어요. 그에 반해 정재원 씨, 당신은 뭘 할 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