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차가운 바람 (2)
이 나라를 향한 신의 진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듯, 페리호 이후에도 대형 사건들이 연이어 터져 버렸다.
성수대교 붕괴.
차를 타고 가던 39명의 사람들이 갑자기 무너진 다리로 인해 끔찍하게 목숨을 잃게 된 대형 참사.
사실, 1년 전부터 성수대교의 붕괴는 예언된 일이었다. 언론사에서 성수대교가 부실 공사로 인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다고 시리즈별로 분명히 밝혔는데도 서울시에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는 것.
더욱 속이 터지는 건, 사고 당일 몇몇 운전자가 서울시에 전화를 해 성수대교가 아무래도 무너질 것 같다며 통행을 통제해야 한다고 신고까지 했으나 이번에도 그들은 귀를 닫아버렸다.
그런 안일함이 모이고 모여 결국 이 사단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정부는 이 사태를 책임지기 위해 국무총리를 사임시키는 등 여론을 잠재우려 했지만, 한동안 여론의 비난은 성수대교의 붕괴 조짐을 무시한 정부에게 쏠렸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사람들이 성수대교에 대한 악몽을 잊으려고 할 때쯤.
“여기 보이시는 참혹한 현장은 일풍 백화점으로 현재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저 안에 갇혀 있습니다!”
일풍 백화점이 무너져 내렸다.
* * *
“이제 신혼인 사람을 오라 가라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화진 그룹 회장 권오준은 난처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슬쩍 살폈다.
나와 권윤아가 결혼한 지 이제 3개월째로 접어든다.
신혼이면 신혼이겠지만, 서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서 신혼 느낌이 물씬 나진 않는다.
“괜찮습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그 뉴스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번에 일풍 백화점이 무너지면서 정부가 대대적으로 건설사들을 조사한다고 합니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쳐보겠다는 건가.
일풍 백화점이 붕괴하면서 김강산 대통령의 지지율은 20% 아래로 바닥을 쳤다.
무능한 정부, 악재를 부르는 정부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양쪽에 거머쥔 그는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되었을 정도로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그 분노를 건설사에게 풀고 있는 것이다.
이 양반, 임기 후에 몰아칠 후폭풍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구먼.
“그래서 다들 이렇게 모이신 거군요.”
예전 화진파를 지탱하던 간부들이 전부 모인 것은 물론, 화진 그룹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임원들까지 모여 있는 상태였다.
그들 모두 내게 의지를 하는 것이다.
“어차피 이런 일이 있을 거로 예상하고 화진 건설은 부실 공사가 없게 최대한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정부가 뭐라고 해코지를 하진 못할 겁니다. 하지만…….”
나는 미리 준비해 온 장부를 상 위에 던져놓았다.
“이 정도로 해먹으시면 제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회장님. 그리고… 여기 계신 임원분들.”
권오준은 조심스레 장부를 펼쳐 보았다. 그리고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그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져 간다.
“건설사로 삥땅 치는 건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고, 각 기업에서도 관행처럼 하는 일이니 크기 신경 쓰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부실 공사는 있을 수 없다고. 그런데 이런 싸구려 재료들을 대량 사들여 어떤 건물을 짓고자 하셨습니까?”
나는 권오준이 아니라 건설사 사장에게 따가운 눈초리를 보냈다.
건설사는 각 기업의 비자금 창구다. 재료들을 싼 걸로 둔갑시켜 남는 돈으로 비자금을 만든다는 건데, 어디서나 하는 일이고 앞으로도 이어질 관행이다. 그리고 이건 오롯이 건설사 사장만의 죄라고 볼 수 없다.
이걸 승인한 건 결국 화진 그룹 회장 권오준일 테니까.
“오 사장님.”
“예. 부, 부회장님.”
“건설사로 이렇게 많이 챙겨 드시면 아주 대대손손 호강을 하시겠습니다.”
“그, 그게…….”
“제가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제가 모습을 잘 드러내진 않지만 항상 매의 눈으로 여러분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건 결코 건설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강 사장님.”
이번에는 금융권 사장에게 화살을 돌렸다.
갑작스러운 내 부름에 그는 마시고 있던 물까지 토해내며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부회장님.”
이들은 화진 그룹을 누가 통제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권오준은 단순히 허수아비라는 걸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 거리낌이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화진파를 운영했을 때에도 나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한 적이 거의 없었고, 화진 그룹이 되었을 때도 나는 여전히 같은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즉, 내 뜻에 반하는 사람이 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실명제가 도입되기 전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움직여 드렸습니다. 그리고 당분간 금융권에서는 자제를 하라고 말씀드렸던 거 같은데. 며칠 전에 보니까 한탕 제대로 벌이시려는 것 같더군요, 강 사장님.”
“아. 저기 그게…….”
금융실명제는 김강산 대통령이 기습적으로 추진한 일로, 모든 금융 거래를 실명제로 바꾼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이것으로 각 기업의 불법적인 자금을 회수하고 미연에 방지를 하겠다는 의도인데, 나는 그 일이 터질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대비를 해놓았다.
예전에는 건설사와 금융사가 동시에 비자금을 생성해 냈지만, 점점 시대가 발전하고 금융실명제와 더불어 컴퓨터를 이용한 디지털 금융이 활성화되면서 비자금 창구 역할은 건설사만 하게 된다.
이제 금융을 이용한 불법 돈벌이는 주가 조작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가만히 엎드려야 할 때다. 그래서 미리 주의를 줬고, 강 사장은 그런 내 주의를 무시해 버렸다.
황규혁 대신으로 금융 쪽에 빠삭한 회사원을 앉혀놓았더니, 아직 조직의 무서움을 모르는 것 같다.
이럴 땐 충격 요법으로 교육을 시켜주는 게 좋지 않겠는가?
“데려가.”
나를 따라 회의장 안으로 들어온 조직원들에게 손짓했다. 그들은 내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 사장에게 달려가 그를 거칠게 밖으로 끌어냈다.
“아악-! 부, 부회장님! 왜 이러시는 겁니까!”
“강 사장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표 수리는 되었으니, 편안히 가십시오. 그래도 가족들한테는 섭섭하지 않게 사례를 해드릴 겁니다. 최대한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 드리라고 말해줄 테니, 심려치 말고 가세요.”
단순히 회사에서 쫓아내는 것이 아닌, 아예 세상에서 지워 버린다는 것을 알게 된 강 사장은 발악하며 살려달라 빌었다.
“부, 부회장님! 살려주십시오. 회장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잡음이 길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해. 얼른 데려가지 않고. 너무 시끄러우면 회사 사람들한테 피해가 가니까 조용히 데려가.”
“예.”
“으, 으아악-!”
겉모습은 경호원이지만, 실상은 사람 꽤 담가본 솜씨가 있는 조직원들이다.
그들은 강 사장을 기절시킨 뒤, 가뿐히 들고 회의장을 나갔다.
순간 충격과 공포가 덮친 회의장 안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강 사장님은 해결이 됐고… 새로운 금융 사장님을 선출해야겠네요. 이건 나중에 처리하도록 하죠. 일단 건설사 문제부터 해결해 볼까요?”
내 말에 건설사 사장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회장님. 저는 그저 회사를 위해서…….”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회사를 위한다는 말에 심경이 거슬렸다.
“회사를 위해요? 그러신 분이 일풍 백화점처럼 통째로 회사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까? 아무리 거대한 댐이라고 해도 손가락만 한 구멍이 나면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손가락이 아니라 탱크 하나가 지나가도 이상할 게 없는 구멍을 만들어냈어.”
“그, 그게…….”
“아무래도 강 사장님과 같이 오 사장님도 동행을 하셔야 할 것 같네요.”
“부, 부회장님!”
오 사장이 일그러진 얼굴로 울상을 짓자 보다 못 한 권오준 회장이 나섰다.
“미안하지만 여러분, 잠시 모두 휴식 시간을 가져주시겠습니까? 그동안 저와 부회장님은 따로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아서요.”
권오준의 부탁에 사람들은 전부 내 눈치를 살폈다.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모두 우르르 밖으로 나가 숨을 돌렸다.
“부회장님.”
“제 말 먼저 들으세요, 권오준 회장님.”
“아, 예…….”
이 한심한 놈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권윤아의 절반만 닮았어도 이렇게까지 멍청하진 않았을 텐데.
“제 와이프를 보고, 제 장인어른을 봐서 참는 겁니다. 하지만 이 이상 오버를 하게 되면 저도 그땐 어쩔 수 없는 결정을 내릴 거예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권오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예. 부디 그래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오 사장은 쳐버리세요. 옆에 두기에는 너무 위험합니다. 저렇게 무모한 사람을 도대체 왜 옆에 둔 겁니까? 알량하게 힘이라도 키워서 뭐라도 해보려고 하셨습니까?”
나의 번뜩이는 눈초리에 권오준은 손사래를 쳐댔다.
“그럴 리가요. 저도 오 사장이 저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기는.
다른 놈이었으면 진작 저 멱을 따버렸겠지만, 권윤아와 권용일을 보고 참는 것이다.
그래도 권 씨 가문의 사람인데 마음대로 죽일 순 없지 않은가.
“기회는 이제 한 번뿐입니다. 또 저를 실망시키신다면 그땐…….”
“예. 며, 명심하겠습니다.”
이 정도 했으면 됐으려나.
나는 어두웠던 표정을 지우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밖에 있는 분들 다시 들어오게 하죠.”
“아, 예.”
“그리고 오 사장을 처분하는 일은 회장님께 맡기겠습니다. 잘하실 수 있죠?”
“예. 물론입니다, 부회장님.”
짧은 휴식 시간이 끝나고 임원들은 다시 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주위를 빙 둘러본 다음, 조용히 말을 꺼냈다.
“앞으로 해외 업무와 관련된 모든 걸 중지합니다. 수출, 수입을 당분간 중단하고 최대한 달러를 쓰지 않도록 말입니다.”
“예?”
“그게 무슨…….”
“해외 업무를 전면 중단한단 말입니까?”
내가 무슨 말을 꺼내든 조용히 듣기만 하던 양반들이 지금은 개떼처럼 일어났다.
“예. 해외 업무 전면 중단. 이것이 앞으로 화진 그룹의 방침입니다. 물론, 영원히 그쪽에 손을 대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몇 년만 그리하겠다는 것이죠.”
“며, 몇 년…….”
벌써부터 매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지 임원들의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목표액을 달성하지 못하는 임원은 금방 잘려 나가기 마련.
그렇기에 해외 업무에 의존해 목표액을 채우는 일도 다반사다.
내가 왜 그걸 모르겠는가?
“너무 그렇게 울적해 있지 마십시오. 무리한 요구를 한 만큼, 저도 여러분께 무리한 부탁을 하지 않을 겁니다. 당분간 목표 수익을 30% 아래로 낮춰 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임원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해외 업무에서 손을 떼는 건 아쉽긴 하지만 일거리가 줄고 부담스러운 목표액도 낮아졌으니 썩 나쁘지 않은 제안이리라. 그러나 마냥 해외 쪽 업무를 놓게 되면 그것도 회사에 큰 불이익을 남길 수 있다.
그렇기에 이들이 의문스러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아니, 부회장님. 도대체 해외 업무는 왜 중지한다는 겁니까?”
이 중에서 가장 나한테 편하게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성일환이다.
“글쎄요. 그냥 변덕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당분간 해외 쪽 일은 모두 접습니다.”
성일환의 물음에도 제대로 된 답변이 나오질 않자 임원들은 더욱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였다. 그에 반해 성일환은 짧게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 석상에서 드러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저 양반에게는 나중에 따로 설명을 해줘도 된다.
“금융 쪽도 해외에는 손을 터는 겁니까?”
아무래도 시시각각 변하는 주가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금융권이 제일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그러나 금융권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에서 손을 뗀다.
폭풍이 덮쳐 그 회오리에 모두가 떠내려가기 전에 말이다.
“예. 금융권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외에 걸려 있는 파생 상품들을 전부 파기시키십시오. 그리고 우리 금융사를 통해서 투자를 하고 있는 고객들에게도 숙지시켜 주셔야 합니다.”
“고객이 항의를 한다면요?”
“그땐 모든 건 고객의 선택이었고, 어떤 불이익이 생겨도 우리는 책임지지 않겠다는 걸 분명히 밝혀야죠.”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당장 해외 업무에서 손을 떼기는 힘들겠지만, 지금부터 천천히 털어내기 시작하면 때에 맞춰 물보라를 피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곧 있으면 추운 겨울이 시작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가운 바람이 아시아 전역을 휩쓸며 꽁꽁 얼어붙게 만들 터.
나는 모두가 빙판 위에 무너져 내리는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