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지배자 (3)
[주식시장을 꿰뚫어 보는 JK 금융의 뛰어난 관찰력과 전문성이 희대의 투자 수익을 만들어냈다.]
[신흥 기업, JK 금융. 주식 시장의 새로운 블루칩이 될까?]
[극찬받아 마땅한 JK 금융.]
우리를 헐뜯기 바빴던 언론사들은 일제히 JK 금융에 대한 긍정적인 기사로 신문을 도배했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돈이 좋고 법보다는 이런 폭력이 좋다.
복잡할 것 없이 깔끔하게 해결이 되니까.
“오늘 기사 보셨습니까?”
나는 엉망이 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있는 히로세 미치사다를 내려다보았다.
민영 방송 아사히 TV의 회장이자 막강한 언론 파워를 자랑하는 인물. 그러나 아직 번영하지 못한 시대라는 불운으로 인해 그는 나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히로세 미치사다는 90년도부터 내가 회귀하기 전까지도 회장직을 맡는다.
“왜 아무런 대답이 없으십니까?”
“봐, 봤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는 미치사다에게 힐끗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며칠 전부터 회장님을 찾겠다고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다녔습니다. 그런데 아주 꽁꽁 숨으셨더라고요. 특히 인상 깊었던 건, 그 긴박한 와중에도 경찰들을 동원해 우리를 막으려고 했다는 겁니다.”
주요 언론사의 실권자들이 납치 및 감금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히로세 미치사다는 경호원 숫자를 세 배로 늘리고 이리저리 숨어 다니는 등, 꽤 약삭빠른 짓을 했다.
하지만 야마구치 구미의 정보력을 너무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아사히 TV가 거느리고 있는 직원 숫자보다 몇 배가 넘는 조직원을 데리고 있지 않은가?
이미 일본 전역을 삼켜가고 있는 야마구치 구미의 눈을 피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결국 히로세 미치사다는 꼬리가 붙잡혔다. 웃기게도 그가 붙잡힌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유흥업소였다.
“그래도 도망 다니면서 술이랑 여자는 고프셨나 봅니다. 유흥업소에도 들락날락하시고.”
멍청한 건지, 아니면 그만큼 술과 여자가 고팠던 건지.
유흥업소에 야마구치 구미의 눈이 달리지 않은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히로세 미치사다를 보며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 말입니다. 믿을 걸 믿어야죠. 경찰들은 예전부터 야쿠자 편이었다는 걸 모르십니까? 그 사람들은 우리가 무식하게 다른 야쿠자들을 도륙하는 걸 똑똑히 지켜봤어요. 그들이 선뜻 당신 말을 들을 거 같았나요?”
민중의 지팡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뒷 세계에서 들어오는 돈을 받고 흥청망청 쓰고 다니는 얼간이들에 불과하다.
한국도 그렇고, 일본에서도 야쿠자들이 판을 치며 나돌아 다닐 수 있는 건 모두 공권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더욱이 일본 경찰들은 야마구치 구미와 잘못 엮였다가는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조직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졌다는 것이리라.
“무슨 말씀이라도 해보시죠.”
“죄, 죄송합니다.”
“그게 끝?”
차가워지는 나의 목소리에 히로세 미치사다는 얼른 대답했다.
“저, 저희도 내일부터는 JK 금융에 대해 어떠한 부정적인 보도가 나가지 않을 겁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 나오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덕분에 말이 잘 통했네요. 하지만 꼭 기억하세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제가 다시 찾아온다는 걸.”
“무, 물론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좋은 인연을 유지했으면 좋겠네요. 처음 시작은 서로 껄끄러웠지만, 앞으로 쭉 이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광고도 많이 넣고 투자도 많이 할 테니, 박대하진 말아 주십시오.”
병 주고 약 주는 거냐는 듯한 히로세 미치사다의 눈빛을 보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갑시다, 이제.”
“예, 사장님.”
나는 허름한 창고 밖을 나서면서 생각했다.
어느 나라를 가도 이런 창고는 범죄의 용도로 밖에 쓰이지 못하는 건가.
“그런데 저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히로세 미치사다를 지키다 애꿎은 목숨을 날린 경호원들의 시체가 기괴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이타치는 걱정하지 말라는 어투로 대답했다.
“흔적이 남지 않게 깔끔하게 처리를 해놓을 겁니다.”
“음. 쿠미쵸가 시체를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저런 불나방 같은 놈들은 시체류에 끼지도 못합니다. 별말씀, 없으실 겁니다.”
야마구치 구미가 거대한 대조직이라 그런지 일 처리는 아주 매끄럽다.
굳이 내가 나서서 명령할 필요도 없이 알아서 내 앞에 사냥감들을 던져주지 않던가. 덕분에 나도 빡빡해 보이던 일정을 여유 있게 소화했다.
“이제 일도 다 끝났으니, 오늘은 우리 다 같이 술이나 한잔할까요?”
* * *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
와타나베는 무겁게 일을 열며 사케 잔을 들었다.
JK 금융에 대한 부정적인 언론이 사라지고 모두 긍정적인 것으로 바뀌어 이제 그만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더니, 이 양반이 나를 또 붙잡았다.
“무슨 소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연합 있잖나.”
“예, 그게 왜요?”
“아무래도 우리 연합에 대한 소문이 와전된 거 같아.”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와타나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연합이 메데인 카르텔과 골든 마피아가 속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꽤 될 거야. 높은 사람들일수록 그런 방면에는 귀가 밝으니까. 그런데 이 연합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것들이 지들끼리 소설을 쓰고 있어.”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조직들이 모여 연합을 만들어냈으니, 당연히 정치권에서나 경영권에서도 위치가 높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항상 자세한 전말도 모른 채 마음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결론을 내는 인간들이 문제다.
“어떤 소설이요?”
와타나베는 나를 슬쩍 바라본 뒤, 잔에 다시 사케를 채워 넣었다.
“일본에 대형 조직이 세 개나 있다는 건 알고 있지?”
현재 일본을 대표하는 3대 야쿠자 조직은 야마구치 구미, 이나가와 카이, 스미요시 카이가 있다. 원래대로라면 그중에서 스미요시 카이가 높은 자금력으로 가장 큰 세력을 일궈야 하지만, 지금은 야마구치 구미가 일본 전역을 집어삼키는 중이다.
굳이 내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도 세계에서 세 번째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 바로 야마구치 구미이지 않던가. 물론, 전투력 면에서는 많이 떨어지지만 한 해 수익이 수조 원이고 조직원 수도 2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알고 있습니다. 이나가와 카이, 스미요시 카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중 이나가와 카이가 우리 다음으로 세력이 가장 넓긴 하지.”
지금은 이나가와 카이가 두 번째로 세력이 넓지만, 곧 있으면 스미요시 카이에게 역전당한다.
“그 셋과 무슨 문제라도?”
“뭐, 문제라면 문제겠지.”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아무리 저 둘이 일본 3대 야쿠자 조직이라고 해도 지금의 야마구치 구미에게 함부로 대항할 순 없을 텐데.
“내가 아까 말했지? 소설 쓰는 놈들이 요즘 많다고. 우리 연합에 대해 잘못 해석하는 놈들이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고 있어.”
“어떤 소문을요?”
“우리가 연합을 맺은 게 메데인 카르텔, 골든 마피아, 그리고 화진파잖아? 그런데 소설 쓰는 놈들은 야마구치 구미가 스미요시 카이랑 이나가와 카이와 연합을 맺은 줄 알아. 연합 정도가 아니지. 아예 우리가 먹었다고 생각해.”
이런. 그 말이 그 뜻이었나.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소설이 써질 줄이야.
“야쿠자들이 알량한 자존심으로 먹고산다는 건 자네도 알지? 그 두 세력이 야마구치 구미보다는 영향력이 덜 하겠지만, 그래도 둘이서 힘을 합치면 이거 절대 무시 못 해.”
이런 식으로 오해가 쌓이면 좋지 않다.
와타나베의 말대로 두 세력이 힘을 합쳐 야마구치 구미에 대항이라도 하기 시작한다면 일이 아주 복잡해진다.
“그래서 쿠미쵸께서는 어떻게 하고 싶으신 겁니까?”
“사실 잘 모르겠어. 그 두 놈들이 세력을 합칠까 싶기도 하고……. 만일 합친다고 하면 그땐 제대로 한판 붙어야지.”
상극에 가까운 두 세력이 힘을 합친다라.
꽤 흥미로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무작정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먼저 움직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쿠미쵸. 어차피 그쪽도 버블 때문에 정신이 없을 겁니다. 이 기회에 깡그리 밀어버리는 것도 그다지 나쁜 것 같진 않네요.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이쪽에 연락을 주십시오.”
와타나베는 내가 건넨 명함을 받았다. 그곳에는 내 이름이 아니라 JK 금융의 사장이 된 황규혁의 이름이 쓰여 있다.
“하하. 자네 도움이라면 언제든지 고맙게 받겠네.”
“예. 일이 조금 뒤틀린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연락 주시면 됩니다.”
“괜찮아. 자네 힘을 빌린 게 한두 번이 아니잖나. 자꾸 이러면 내가 미안해.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놈들이 아무리 힘을 합쳐도 야마구치 구미에게 대항할 수 있진 않을 테니까.”
조직이 커질 대로 커지니, 자신감도 붙는다.
와타나베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상극에 가까운 그 두 조직이 힘을 합칠 가능성도 낮거니와 설령 힘을 합친다고 해도 이미 일본 전역에 퍼진 아먀구치 구미를 건드릴 순 없다.
정경 유착으로 이문을 챙기고 있는 곳이 바로 야마구치 구미이지 않던가.
그들을 건드린다는 건, 곧 야마구치 구미와 관련이 있는 정치계 사람들을 건드린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들과 전쟁을 벌여 손해를 보는 건 그 두 조직이라는 것이다.
“쿠미쵸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저는 안심하고 돌아갈 수 있겠군요.”
“허허. 그래. 앞으로 자주 찾아오게.”
와타나베를 보니, 황규혁이 이처럼 거대한 조직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만들어낸다고 해도 와타나베를 넘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그냥 지금처럼 JK 금융을 관리하면서 경영 쪽으로 아예 올인을 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 * *
“언제 또 올 거냐?”
공항까지 배웅을 하러 나온 황규혁은 이제 어엿한 한 회사의 사장 같은 카리스마를 보였다. 영등포에서도 여러 클럽들을 관리하면서 오성파를 위협했으니, 그 경영력으로 JK 금융을 말아먹진 않을 것이다.
“글쎄요. 뭔 일 터지면 와야죠.”
“형 얼굴은 영원히 안 볼 생각이고?”
“하하. 농담입니다. 여행 삼아 자주 오겠습니다.”
“그려. 나도 자주 갈 테니까. 그리고 일환이 형님이랑 큰 형님께도 안부 전해 드려.”
“예, 형님.”
황규혁은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내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뒤로 시립해 있던 JK 금융 임원들도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버블 경제로 한탕도 했고, JK 금융도 자리를 잡게 해놓았으니 당분간 일본에 올 일은 없을 것 같다.
“형님. 꼭 뜻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하실 수 있죠?”
“형 몰라?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형이.”
황규혁은 괜한 걱정하지 말라며 손을 흔들었다.
일전에도 이야기를 나눴지만, 황규혁은 무식하게 밀고 가서 야쿠자들을 점령할 생각이 아니다. 천천히 은밀하게 그들 안으로 스며들어 장악을 하는 것이 최종 목표다.
일이 어떻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으나, 좋은 직감이 든다.
분명 황규혁은 아주 훌륭하게 일을 해낼 것이다.
“도착하면 연락하고.”
나는 황규혁과 인사를 나눈 뒤, 출국장 안으로 들어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찬찬히 내가 해야 할 일을 곱씹어보았다.
이제 격변의 해가 다가오고 있다.
정권이 바뀌고 새로운 봄날이 이 나라에 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하리라. 이 봄날 뒤에는 무시무시한 태풍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