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버블 대박 (4)
“다 토해 낼 수 있다고 합니까?”
“예, 보험사에서도 토해 내야 할 돈이 많으니까요. 아마 어떻게든 넣을 겁니다.”
타마키 히로는 저번과 완전히 딴판인 얼굴이었다.
얼굴에 웃음기가 사리지지 않는다. 지금 온 일본이 울상을 짓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만큼 엄청난 양의 돈을 벌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상당한 돈이네요. 이 정도면…….”
“말이라고 하십니까. 이제 사장님은 일본 최고의 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솔직히 풋옵션으로 이 정도로 돈을 벌 줄은 정말 몰랐다.
수익률이 로또 1등을 뺨친다고 하더니, 과연 그러지 않은가.
내가 풋옵션에 쏟아부은 돈은 120억 엔.
맘 같아서는 500억 엔을 쏟아붓고 싶었지만 그 정도의 돈을 감당할 풋옵션이 없었다. 그러나 120억 엔이 3,500%의 수익률을 내는 것을 보니 그냥 억지로라도 쏟아부을 걸 그랬나 보다.
이제 내 수중에 들어올 돈은 4,200억 엔이다.
총 35배의 수익을 한 달 만에 낸 것이다.
아마 지금쯤 풋옵션을 발행한 기관 사람들은 뒷목을 잡고 쓰러져 있을 터.
“아쉽게도 더 치고 올라갈 수 있었는데, 만기일이 너무 짧았습니다. 좀 더 긴 걸 잡아야 했을까요?”
“이 정도면 만족합니다. 더 큰 욕심을 부릴 순 없죠. 그리고 주가가 지금 곤두박질을 치긴 했지만 언제 또 올라갈지 몰라요.”
타마키 히로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4,200억 엔이나 벌어놓고도 만족을 하지 못하는 건 인간의 욕망이 바닷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끊는 게 맞다.
이미 90년도부터 대장성이 제도를 확립하면서부터 일본 주가가 흔들린 건 사실이지 않은가? 그 덕분에 나도 풋옵션을 더 많이 매집하질 못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으면 주가는 다시 천천히 회복한다. 여기서 끊고 가는 게 아주 적절하다는 뜻이다.
“근데 사장님. 혹시 사전에 정보를 들으신 겁니까?”
“어떤 걸요?”
“저번에 대장성에서 새로운 제도를 내놓아 한번 주가가 휘청거리긴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또 정부가 강력한 규제를 내놓으면서 다 무너진 게 아닙니까? 혹시 정부에 귀가 있으신가 하고…….”
난 슬쩍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일본 정부가 당장 저를 건드릴 순 없을 겁니다.”
“그렇게 확신을 하시는 이유가 혹 야마구치 구미라면…….”
“그것도 있지만, 제가 가진 돈이 많거든요. 돈지랄해 대면 정부에서도 못 건듭니다. 이런 시기에 거대한 외국 자본이라도 들어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타마키 히로가 눈을 반짝였다.
4,200억 엑은 벌어들였음에도 나는 그닥 놀란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그게 무슨 뜻이겠는가? 이 돈이 없어도 아쉬울 게 없을 정도로 돈이 많다는 것이었다.
“정말 많으신가 봅니다.”
“예, 아주 썩어날 정도로 많습니다. 그것도 달러로 가지고 있으니까요.”
“호, 혹시 무례가 아니라면 얼마인지…….”
“글쎄요. 적어도 30억 달러는 넘습니다.”
헉! 하는 소리가 타마키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엔화도 아니고 달러로 가지고 있으니 보이는 반응일 것이다.
“사, 사장님이 그 정도로 부자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세계 재계 순위에서도 못 본 거 같은…….”
바보인가?
내가 그 많은 돈을 고스란히 한 통장에 넣어놓을 리 없지 않은가.
“제 출신이 어딘지 잊으셨나 봅니다. 그렇게 깨끗하게 사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제야 타마키는 얼른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숙였다.
“이런. 죄송합니다, 사장님. 괜한 걸 물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아무튼, 일본 정부에서 조사가 들어와도 당황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예, 사장님. 감사합니다.”
나는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 하는 타마키를 붙잡았다.
“아! 조만간 제 대리인 한 분이 일본으로 넘어갈 겁니다.”
“아, 예. 저번에 뵀던…….”
대리인이라고 하면 황규혁을 뜻한다.
“예, 바로 그분입니다. 대표님과 임원들의 보너스도 다 그분 손에 달려 있으니, 잘하셔야 할 겁니다.”
결국 황규혁이 말을 잘해줘야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간다는 것이다.
누구한테 잘 보여야 할지 타마키는 이제 알아차렸을 터. 그는 다시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사무실을 나갔다.
난 TV에서 연일 떠들어대는 일본 경제의 침몰을 지켜보며 힐끗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인가.
도미노처럼 일어나는 아시아의 경제 위기가.
* * *
버블 경제 붕괴가 휩쓸고 간 일본은 어마어마한 혼란을 겪게 되었다.
흥청망청 돈만 쓰던 사람들은 줄줄이 도산하는 회사 때문에 전부 실업자가 되었고, 하루하루 인생을 즐기며 산다는 프리터 족도 거의 사라지게 됐다.
하지만 경제 위기가 오면 항상 웃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나와 같이 주가 폭락에 풋옵션을 매집한 사람들은 당연히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로 인해 단기간의 부자가 된 사람도 있고 주가 상승 옵션에 돈을 걸었던 사람은 주머니가 탈탈 털리게 됐다.
“아이고, 이 사람아. 도대체 이번에는 무슨 짓을 벌인 거야?”
버블 경제가 일본 전체를 무너뜨리면서 당연히 야마구치 구미도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이들은 금융 사업보다는 주로 불법적인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리 많은 타격을 입었다고 볼 순 없다.
와타나베는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내 뒤를 캐기 시작했다.
“어디서 나 모르게 정보라도 얻은 거야? 이번에 아주 거하게 한탕 했다고 하던데.”
“하하. 수많은 전문가를 동원해 얻어낸 결과일 뿐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혹시라도 실패하면 야마구치 구미에 엄청난 손실을 입힐 수도 있어서요.”
“허허. 실패를 걱정한 것치고는 너무 많은 돈을 걸었던 거 같던데…….”
120억 엔이 어디 구멍가게에서 사는 껌 값도 아니니 하는 말이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사실, 이대로 끝나면 나가리 되면 어쩌나 싶었어요 다행히 일이 잘 풀렸죠, 뭐.”
“흠흠. 그런가? 그래도 다음에는 나한테 귀띔이라도 줘.”
섭섭한 어투로 말하는 와타나베를 보니, 내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이럴 땐 떡 하나 던져줘서 조금 달래주는 게 낫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설마 쿠미쵸를 외면하겠습니까? 같은 가족이니, 나눠 먹는 게 있어야죠. 제가 인수할 계열사들 중에서 쓸 만한 것들을 추려 드리겠습니다. 금융 회사도 거의 거저로 주셨는데, 그 정도는 해드려야죠.”
“하하하. 이거,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또 좀팽이 같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부탁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꽁으로 던져줄 순 없지 않은가.
각자의 일을 완수하는 사람에게만 보수가 내려지는 법이다.
“그래. 그게 뭔가?”
“이번 풋옵션 때문에 아무래도 말이 많을 것 같긴 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다 죽어가는 마당에 꼭 잘되는 사람이 있으면 질투를 하게 마련이니까요.”
“허허. 그 말이 맞아. 정부에서 국민의 화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마녀사냥을 해대겠지.”
마녀사냥.
아주 딱 어울리는 말이다.
스미토모 그룹을 포함한 몇 개의 그룹들이 마녀사냥의 제물로 걸려 줄줄이 뜯어져 나갔다. 그나마 스미토모 그룹만 간신히 살아남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예. 그때 정부에서 JK 금융을 들쑤시고 나서면 골치 아파집니다. 그러니까…….”
“음. 자네의 말이 뭔지 잘 알겠네. 정부에서 건드리긴 하겠지만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게 해주지.”
역시 와타나베의 입김이 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어쩌면 미쓰비시와 비슷한 수준의 위력을 가진 것일지도,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이런 양반을 황규혁이 넘어서겠다고 하는 걸 보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많은 돈을 은행에서 지불할 수 있을까?”
“가능할 겁니다. 그중에는 미쓰비시가 관리하는 기관과 미쓰이 금융도 있거든요. 저 둘은 파산당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돈을 맞출 겁니다. 세금을 뜯어내서라도 말이죠.”
“허- 미쓰비시까지 있다고? 정부에서 매섭게 공격할 수도 있겠는데?”
“쿠미쵸가 잘 좀 막아주세요. 물론, 저도 가만히 구경만 하지 않을 겁니다. 외국 자본을 들여 공격적인 M&A를 하겠다고 선포하면 그쪽에서도 한수 접고 들어올 거예요. 어차피 제가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정부는 외국 자본이 들어오는 것을 환영한다. 하지만 단순히 투자를 넘어 그것이 공격적인 M&A가 되어버리면 그때부터는 진흙탕 싸움이다.
한쪽은 국익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고, 다른 한쪽은 약해진 국익을 강탈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돈이라는 게 참 무섭다. 국가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M&A 공격이라면 당연히 무섭지 않겠는가?
우리나라가 IMF 이후로 외국 자본에 휘둘리는 게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약해진 틈을 타 외국 자본이 물밀듯이 들어와 모든 것을 휩쓸어가지 않던가.
“자네 말이 맞아.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쪽에서 함부로 털 순 없겠지. 더군다나 외국 자본으로 협박을 해대면, 아마 그쪽 경제 수석의 얼굴이 참 볼 만할 거야. 흐흐.”
내게는 어마어마한 외국 자본과 더불어 세계적으로 활동이 가능한 연합 조직원들까지 있다. 그뿐인가?
마음만 먹으면 일본 총리도 암살할 수 있는 히트맨이 있다. 물론, 내가 미쳤다고 정계에 높은 사람을 암살하진 않을 것이다.
그저 내가 원하는 건 이번 기회에 일본 기업들을 차례로 매입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일본을 경제적으로 흔들어놓을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정계를 움직일 수 있는 힘도 갖추게 된다.
그때가 되면 일본은 내 말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가 훗날 천성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자본의 힘은 한 나라를 통째로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대단하다.
나는 그걸 이용하려는 것이다.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일본이 망한다고 해도 솔직히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 같진 않다.
* * *
“사장님. 축하드립니다. 아마 그 나이에 그 정도의 재력을 가진 건 사장님이 세계에서 유일할 겁니다.”
타마키 히로는 4,200억 엔이 JK 금융에 들어왔음을 알렸다.
내가 들은 바로는 지금 일본은 무너진 경제에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언론에서도 연이어 일본의 불투명한 미래만을 말하는 중이고 말이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도쿄를 팔아서 미국을 사니 마니 했던 걸 생각해 보면 참 태세전환도 빠르다.
“그런데 언론 상황이 좀 좋지 않습니다. 벌써부터 JK 금융 이름이 언론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어요.”
“미리 정보를 알고 움직인 게 아니냐는 반응인가요?”
“예. 물론, 이게 저희들이 한 달이 좀 넘게 사놓은 풋옵션이라 일본 정부가 정책을 추진했던 시기와는 다르긴 합니다만…….”
타마키 히로가 말을 흐리는 것을 보니, 언론에서 맹렬하게 JK 금융을 공격하는 모양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한 게 일본 3대 재벌인 미쓰비시와 미쓰이, 그리고 스미토모까지 내게 돈을 뜯기지 않았던가.
일본 정부에서 금리와 부동산 규제에 대한 내부 토의를 진행했을 땐, 이미 내가 풋옵션을 전부 사들여 놓았었다. 즉, 정보 문제로 나를 건드릴 순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나쁜 놈으로 몰아가기 시작하면 곤란하다.
아무래도 슬슬 움직여줘야 할 것 같다.
그놈들에게 제대로 본때를 보여줄 때가 온 것이다.
한국 기업도 아니고 일본 기업이라 그런지 뭔가 통쾌한 기분마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