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버블 대박 (1)
“저는 누가 뭐래도 천성의 일원입니다. 그런데 그 천성을 강탈하겠다고, 그것도 제 앞에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원래대로라면 천성의 주인이 될 사람한테 이런 말을 꺼냈으니,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하지만 목소리나 표정을 보건데 화가 나 보이진 않는다.
“예. 아주 당당히 말하고 있지 않나요? 내가, 당신의 아버지가 일군 사업터를 완전히 빼앗겠다고.”
이강찬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지만, 이윽고 그는 평정심을 되찾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비즈니스적인 면모를 보였다.
“만일 천성 그룹을 갖게 되신다면… 저를 회장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이군요.”
“예. 제가 이강찬 씨에게 바라는 건 하나입니다. 천성 그룹의 회장이 돼서 천성이란 기업을 훨훨 날게 만드는 거죠.”
“소유는 하시지만, 경영은 참여하지 않겠다… 이겁니까?”
이강찬의 말에 갈등이 섞여 있었다.
천성 그룹의 회장이 되어도 내가 지분을 다 가지고 있으면 그건 그냥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결국 회사는 대주주의 입김에 움직이는 곳이니까.
“뭘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설사 일이 잘돼서 자신이 회장으로 취임된다고 해도 대주주인 내가 있으니, 눈치를 보며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강찬 씨가 회장으로 취임되면 그땐 제가 가지고 있는 지분을 좀 나눠 드리겠습니다. 공평하게 하자는 거죠. 물론, 지배권은 제 손아귀에 있겠지만 저는 무조건적으로 이강찬 씨를 지지할 겁니다. 어떤 미친 짓을 한다고 해도 믿어 주겠다, 이 말입니다.”
“하하. 저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의심스러울 수밖에.
애써 빼앗은 지분을 나눠 주겠다는 것도 그렇고 무조건적인 지지를 해 주겠다는 것도 전부 사기꾼의 달콤한 속삭임으로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난 전부 진심인데.
“이강찬 씨가 믿고, 믿지 않고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일은 진행이 되고 있고, 언젠가 당신은 나의 의지에 따라 회장 자리에 앉아야 할 겁니다. 그리고 소니를 뛰어넘는, 세계로 뻗어나가는 그런 기업을 만들게 될 거예요. 저는 그저 누구도 모르게 뒤에서 지켜볼 뿐이죠.”
내 말이 조금 진심이라고 생각했는지 이강찬은 떨떠름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도대체 왜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왜 그런 제안을 저한테…….”
“그냥 미리 말을 해두는 겁니다. 그래야 앞으로의 일을 상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강찬 씨가 품고 있는 열망이 식을 일도 없을 테고요. 그리고 말씀드렸잖아요. 지금의 부회장으로는 천성이 클 수 없다고.”
난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나를 붙잡듯, 이강찬이 말했다.
“쉽지 않을 겁니다. 이 천성은 결코 허술하게 지은 곳이 아니에요.”
저 말은 나를 걱정해 주는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까불지 말라고 경고를 하는 것인가.
나는 전자라고 생각한다.
저 눈동자를 보라. 이미 이강찬은 내 마수에 넘어왔다.
“완벽하면 완벽할수록, 부수는 데 더 희열을 느끼지 않겠어요? 그리고 이강찬 씨가 생각하는 그런 딱딱한 방법으로 천성을 빼앗지 않을 겁니다. 제 출신 아시잖아요. 깡패는 깡패답게 해야죠.”
이강찬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눈치였다.
그래, 깡패는 깡패답게.
지금 시대야 가능한 방법이지 않은가?
통쾌하고도 스릴 넘치는 방법 말이다.
* * *
“이 실장.”
“예, 사장님.”
이재욱은 내 부름에 쪼르르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역시,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이재욱은 나를 수행하는 데에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인물이다. 이러니까 이창호가 옆에 끼고 있었지.
“명동이랑 여의도 가서 리스트 좀 만들어 와요.”
“어떤 리스트를…….”
“조만간 일본에 크게 투자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거 좀 알아보라는 겁니다.”
“일본이요?”
화진파는 이제 화진 그룹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물론, 여전히 예전의 깡패 모습을 버리진 못했는데, 점점 회사적인 업무가 늘어나면서 그룹 일과 조직의 일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그중 이재욱은 회사 쪽 업무에 쏠려 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이재욱은 강철중처럼 내 명령에 의문을 표하거나 토를 달지 않는다. 그냥 까라면 까는 사람이다.
그는 빠르게 사무실 밖을 나갔다. 아마 내일이면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나저나 늦은 건 아닐 테지.
이제 곧 있으면 일본은 줄초상 나올 일만 남았다.
버블 경제의 붕괴.
잃어버린 10년.
일본의 파멸.
몇 달도 아니다. 몇 주만 있으면 일본은 저 수식어대로 완전히 박살 난다.
지금 일본의 경제는 팔짝 뛰다 못해 완전히 미쳐 버렸다.
90년도에 일본 정부에서 거품을 빼기 위해 규제를 걸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잔뜩 낀 이 거대한 버블을 뺄 수 없었다.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현재 일본은 엄청난 경제 성장력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건 마치 기름이 줄줄 새고 있는 폭주 기관차나 다름이 없었다.
이들은 눈앞에 있는 이득만 쫓다가 뒤에서 불이 나는 줄도 모르고 달리기만 했던 것이다.
현재 세계 재벌 70%가 일본에 모여 있을 정도며, 페라리와 BMW 같은 고급 외제차들이 일본 도로를 점령했다. 그만큼 돈을 펑펑 쓰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부채가 얼마나 쌓이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난 잠시 생각을 멈추고 수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쿠미쵸.”
수화기 너머에서 나를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누구야? 자네가 전화를 다 주고.”
“하하. 제가 이따금씩 연락은 드려야죠.”
“그래. 그렇게 해주니 고맙네.”
와타나베는 요즘 아주 살판났을 거다.
버블 경제가 붕괴하기 직전까지도 일본은 부자들의 나라였고, 그 나라의 국민들은 돈으로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며 들뜨기까지 했다.
참 멍청한 놈들이 아닐 수 없다.
꼭 그렇게 돈 많은 놈들이 손을 뻗는 게 뭔지 아는가?
바로 돈으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조금 메워주는 마약이다.
“자네 덕분에 우리 조직의 힘이 날이 갈수록 왕성해지고 있어. 그 연합이라는 거, 진작 말을 하지 그랬나.”
처음에는 연합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와타나베는 메데인 카르텔에서 싼값에 조달해 주는 마약으로 조직을 키우는 중이었다.
솔직히 메데인도 아시아 시장을 점령하는 중이라 와타나베의 야마구치 구미와 손을 잡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 근데 오늘은 좀 다른 문제 때문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음. 어떤 거 때문에 그렇지?”
“야마구치 구미와 관련이 있는 금융사가 있나요?”
“몇 군데 있지.”
야마구치 구미가 잠시 주춤거리긴 했지만, 원체 세력이 넓어 일본에서 손이 안 닿는 기업이 별로 없었다.
2000년도 후반쯤 돼야 일본도 치안이 안정적으로 잡힌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길가다가 총 맞는 경우가 허다할 정도.
그러니 기업인들이 야쿠자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중 한군데만 좀 빌리면 안 되겠습니까?”
“그건 어렵지 않지. 뭘 하려고?”
“일본에 투자를 좀 할까 해서요.”
“허허. 기회의 땅 일본이지 않은가? 어렵지 않지.”
현재 일본은 흑자를 내고 있음에도 일할 사람이 없어 문을 닫는 경우가 허다하다.
1인당 평균 1.4개의 일자리를 가질 수 있다는 통계를 보면, 얼마나 큰 거품이 저 섬나라에 껴 있는지 알 수 있다.
오히려 중소기업들은 버블 경제가 지옥 같았다고 말할 정도로 일할 사람이 없어 허덕인다. 물론, 막상 버블이 터지고 나서는 더 끔찍한 헬게이트가 열리지만…….
“적당한 곳 하나 물색해 주십시오. 그리 크지 않고 언제라도 없애 버릴 수 있는, 그런 곳이요.”
“알겠네.”
와타나베와 전화를 끊은 뒤,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경제 파탄이 나는 일본. 하지만 멸망의 장소에서는 항상 쓸어 담을 전리품들이 나뒹군다.
경제 위기는 누군가에게 큰 기회라고 하지 않던가.
그 기회를 잡을 사람은 이제 나밖에 없으려나?
이제 나도 곳간에 쌓아놓은 돈을 펑펑 쓸 때가 왔다.
* * *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리스트입니다.”
나는 이재욱이 건넨 서류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왜 저 사람은 같이 세트로 딸려 온 거야?
“이번에는 또 무슨 속셈이냐?”
“…뭘요?”
“허허. 뭘요? 이놈이 이제 화진 그룹 대빵 되었다고 다 큰 형님 막 대하는 거 봐.”
황규혁의 말도 안 되는 몰아가기에 난 실소를 터뜨렸다.
“그냥 보는 겁니다.”
“웃기지 마. 네가 그런 걸 왜 그냥 보냐?”
“그냥… 요즘 일본에 투자할 곳이 어디 있나 싶어서요.”
내 말에 황규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기 이미 성장도 다 했잖아. 오히려 너무 괴상하게 성장해서 문제지. 성장이 끝난 놈은 이제 하락세 탈 일밖에 더 있겠냐?”
오, 역시 화진 금융 부사장답군.
내가 회귀하기 전에 황규혁은 화진 금융의 부사장이었다. 그만큼 꽤 날카로운 안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 터. 그러니 이진용이 황규혁은 살려두고 금융 쪽에 뼈를 묻게 한 것일 수도 있다.
“형님은 이제 일본은 더 성장하지 않을 거라 보십니까?”
“야, 쪽바리 새끼들이 그러잖아. 일본 팔면 미국 살 수 있다고. 그거 다 웃기는 소리지. 그리고 일할 마음도 없이 주식으로 돈놀이만 하려는 새끼들로 넘쳐나고 있잖아? 그게 다 망조야.”
배운 건 별로 없는데도 황규혁은 주식 시장의 본질을 알고 있다.
일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돈놀이만 하려 드는 사람만 넘쳐나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애 하나 업은 채 아줌마가 증권사에 나타나면 그건 폭락할 징조라고.
그만큼 광기 어린 투자가 계속된다는 것이며, 광기 후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기다리게 마련이다.
“생각보다 잘 아시네요.”
“지금 누구 무시하냐?”
“그런 건 아니고요.”
“뭐, 아무튼. 일본은 왜 보는 거야?”
이왕 이렇게 된 거 황규혁에게 슬쩍 말을 던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형님 말씀대로, 일본이 요즘 간당간당해 보여서요.”
“조만간 터진다, 이건가?”
“예. 분명 터집니다. 방금 말씀하셨잖아요? 이제 일본은 내려갈 일만 남았다고.”
황규혁은 조금 입맛을 다시며 내게 물었다.
“그래서? 왜 곧 망할 나라를 쳐다보는 건데?”
“큰 경제 위기가 온다고 해도 일본이 망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많은 기업들의 평가가 절하되긴 하겠지만 그걸 기회로 이용할 수 있죠.”
“음. 그러니까 살아남을 놈들만 골라내서 나중에 돈 좀 쓸어 담는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 황규혁이었다.
“예. 바로 그거죠.”
“음…….”
황규혁은 나도 다 보지 못한 리스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난 그냥 그러려니 하고 그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는데, 황규혁에게서 의외의 말이 나왔다.
“태산아.”
“예, 형님.”
“너, 일본에도 연줄이 있다고 했지?”
“네, 있습니다.”
“거기 이용해서 투자하려는 거고.”
“그… 렇죠.”
뭔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 양반이 뜬금없이 왜 이러지?
“일본 있잖아. 거기 내가 들어가도 되냐?”
“…예?”
“크게 한 건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가 껴도 되냐고.”
난 눈을 몇 번 껌뻑이며 황규혁을 응시했다.
진심으로 그러는 거냐는 눈빛을 담아서.
그리고 황규혁은 진심이었다.
“어차피 믿을 만한 사람 필요한 거 아니었어? 내가 가서 네가 하라는 대로 해줄게. 어디 나도 가서 그 쪽바리 새끼들 등골 한번 거하게 빨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