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라인 교체 (2)
보수 정당의 뒤를 받쳐주는 것은 언제나 군부였다. 그리고 단결회라는 조직이 탄생하면서 받침대가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김강산도 이걸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 하면 이 단결회를 척결할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을 했다. 나중에 김강산의 회고록을 보면 단결회를 해체시키기 위해 몇 년 동안 계획을 수립해 왔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그만큼 단결회는 이 나라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세력만큼 위험한 게 또 어디 있겠는가?
당장 보수 정당 내부에서도 단결회는 없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아무리 보수 정당의 뒤를 지켜준다고는 하지만, 반대로 말해서 군부 앞에 계속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안녕하십니까, 한석우 대령님.”
한석우 대령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 손을 맞잡았다.
“아, 예. 반갑습니다. 그런데 왜 저를 갑자기 보자고…….”
“하하, 조금 꺼림칙하셨나요?”
“다짜고짜 2억이 들어 있는 사과 박스를 건네주시는 분이라면 당연히 꺼림칙하지 않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안면이 없는 사이가 빠르게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돈만큼 좋은 게 없다고 배웠거든요.”
나의 말에 굳어 있던 한석우 대령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왜 저한테 이런 거액을 주시는 겁니까?”
“2억이 거액은 아니죠. 그냥 심심한 성의일 뿐입니다. 앞으로 저와 함께 일을 하신다면 제가 대령님께 적선해 드리는 금액이 2억에서 20억으로 훌쩍 뛰게 될 겁니다.”
한석우 대령은 눈을 크게 뜨며 물을 벌컥 들이켰다.
“그, 그게 갑자기 무슨…….”
“거짓말 같으세요? 저는 신용을 아주 중요시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약속은 반드시 지킬 테니까.”
나는 잘 차려진 음식들을 바라보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일단 배부터 채울까요? 긴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리고 나는 맛있게 음식을 입안에 넣으며 간간이 한석우의 반응을 살폈다.
저 양반도 조금씩 들긴 하다만, 아마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저 눈에 깃들어 있는 탐욕이 일렁이는 것을 보니, 20억이란 금액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모양이다.
“한석우 대령님.”
“아, 예.”
“저는 한석우 대령님의 미래에 투자를 하고 있는 겁니다. 대령님처럼 능력 있는 분은 꼭 높은 곳에 올라갈 것임을 알고 있거든요.”
“제가요?”
아직 한석우는 모를 것이다. 어떤 미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김강산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 그는 단결회와 관련이 거의 없는 장성들을 물색한다. 하지만 장성들 중에서 단결회와 관련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눈을 돌린 것이 그 밑에 있는 계급이었는데, 그때 김강산의 눈에 든 것이 바로 한석우였다.
인맥은 없고 오로지 실력으로만 대령까지 오른 사람.
능력만큼은 장성급인데, 제대로 라인을 타지 못했다는 이유로 진급이 되지 못하는 사람.
김강산에게는 단결회를 척결할 칼로 쓸 아주 적격인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저는 대령에서 끝입니다. 더 위로 올라갈 수가 없어요.”
“하하, 생각보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으신 분이네요.”
“군부가 언제 실력으로 올라간 적이 있습니까? 전부 다 줄 타고 가는 거죠. 전 그걸 못한 거고.”
“예, 바로 그겁니다. 저도 그런 대령님의 장점을 보고 투자를 하는 거예요.”
한석우는 한 번 더 아리송한 얼굴빛을 띠었다.
“그게 제 장점이라고요? 지금 놀리시는 겁니까?”
“아니요. 제가 설마 사람 하나 놀리자고 2억을 건넸을까요?”
“…….”
“지금 당장 한석우 대령님이 위로 올라간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고 나면 분명히 대령님의 팔자도 달라질 겁니다. 그러니까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세요. 그동안 제가 부족한 용돈은 채워 드리죠.”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휴지로 입을 닦았다.
“여기 음식, 참 맛있지 않습니까? 드시고 싶으실 때마다 이쪽으로 연락 주십시오. 제대로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한석우 대령은 내가 건넨 명함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턴 컴퍼니?”
“리턴 컴퍼니를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군부에서는 아주 유명한 돈줄이라고 들었는데…….”
“하하, 아마 저희 쪽 돈을 받지 않은 군부 쪽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그건 정치권도 마찬가지고요.”
한석우는 다시 물을 벌컥 들이켜며 내게 물었다.
“그게 전부 장성급들 아닙니까? 그런데 왜 저 같은 대령한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투자라고. 그러니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한석우 대령도 얼른 일어나 정중하게 내게 인사를 올렸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위치로 사람의 위아래를 따지지 않는다.
언제나 돈이 모든 것을 초월하지 않던가.
역시, 돈이 최고다.
* * *
김강산이 대권을 잡게 되면 그 후부터 팔자가 피는 군부 쪽 사람들이 몇몇 있다. 거의 대부분이 단결회와 손을 잡지 않아 이마에 별을 달지 못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김강산 시대가 열리면 그들은 초고속 승진 하여 중요 직책을 맡게 된다.
난 그런 먼지 속에 묻어 있는 광석들을 미리 찾아가 작업을 해놓았다.
오른손에는 돈을 쥐여주고, 왼손에는 여자를 쥐여주면서 도저히 덫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설계를 해놓은 것이다.
점점 돈의 맛을 알게 된 저들은 나중 가서도 내 돈을 받기 위해 알아서 기게 될 터.
돈이라는 건 항상 사람을 쉽게 다룰 수 있는 도구로 쓰임을 받는다.
하지만 군부 쪽만 중요한 게 아니다.
이제부터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리턴 컴퍼니라……. 아주 유명한 곳에서 나오셨군.”
첫인상부터 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사람.
민주화 운동의 영웅이자 진보 정당에서는 최고의 정치꾼으로 불리는 김강산의 말이었다. 그는 내게 물 한 잔 건네지도 않고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보수 정당의 돈줄께서 여기까진 무슨 일로?”
“그렇게 부르시면 섭섭합니다. 보수 정당의 돈줄이라니요.”
“내가 틀린 말을 했소? 저번 대권에서도 내가 그 덕을 톡톡히 봤는데.”
아무래도 김강산은 대권에서 패배한 요인이 리턴 컴퍼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뭐, 내가 그렇게 꾸민 것도 있으니 할 말은 없지만 오히려 이걸 역으로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보다 리턴 컴퍼니에 대한 적대심이 크시군요.”
“그렇지 않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그럴 수도 있지만,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나의 말에 김강산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보세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우리 둘이 철천지원수로 남으면 남았지 절대 동지가 될 일은 없을 거야.”
“정말이십니까? 후회하실 텐데요.”
김강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나를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내 염장이라도 지르려고 온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렸듯이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여기에 온 겁니다. 김강산 대표님의 동지가 되려고.”
“하하하! 이 친구 아주 웃긴 친구네. 그래요, 그래서 그쪽이 나한테 제안하는 게 뭐지?”
“제가 드릴 건 딱히 하나밖에 없군요. 돈 말고 다른 게 또 있겠습니까?”
김강산은 그럴 줄 알았다면서 손을 휘휘 저었다.
“아무래도 얘기는 여기까지인 것 같네. 그만 나가보시오.”
“차기 대권, 관심 없으십니까?”
“그건 그쪽이 도와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거요.”
“뭐, 확실히 여론은 현재 진보에 쏠려 있긴 하죠. 그런데 그거… 모르는 겁니다. 저번 대권에서도 뼈저리게 느끼셨을 텐데요? 정 의심스러우시면 큰 사건 하나 더 터뜨려 볼까요? 저번 비행기 간첩 테러 때처럼.”
내 말을 들은 김강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앉으십시오, 대표님.”
김강산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내게 삿대질을 해댔다.
“당신과 더는 할 말이 없어. 당장 내 방에서 나가!”
“지금!”
하지만 나는 더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저를 여기서 쫓아내시면 후회하실 겁니다. 차기 대권도 없을 테고, 앞으로도 영원히 대표님은 청와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겁니다. 이래도 절 내보내시겠습니까?”
김강산은 이를 꽉 물었다
역시, 청렴함을 강조하는 정당인이라고는 하나 욕망 앞에서는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결국 그는 감정을 추스르고 욕망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후. 일단,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봅시다.”
난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쓸데없는 말은 치우고 본론만 말하시오.”
김강산은 목이 탔는지 물 대신 술을 따라 마셨다. 그러면서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첫째로 저는 앞으로 대표님에게 모든 자금줄을 돌려놓을 생각입니다. 필요하신 만큼 마음껏 쓰셔도 됩니다.”
“하하, 노일영 대통령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멍청하게 대놓고 움직이진 않을 겁니다.”
“내가 그 돈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시오?”
김강산은 애써 여유 있는 척을 해보았지만, 난 지금 진보 정당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
대권에서 보수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하면서 모든 기업인들이 돈을 거두고 보수 정당에 마구잡이로 뿌렸다.
아무리 여론이 진보 정당에게 힘을 실어준다고 해도 단결회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어떻게든 보수 정당의 권력을 지킬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진보에게 돈을 끊고 보수에게 모두 자금을 옮긴 것인데, 누가 알기나 했겠는가.
저 김강산이 기세등등한 단결회를 순식간에 날려 버릴 줄.
“대표님, 제가 이 바닥에서 누구보다도 가장 빠르게 정보를 수집하는 사람입니다. 그 말은 제가 대표님의 사정을 손바닥 보듯이 꿰뚫고 있다는 거죠.”
김강산은 미간을 찌푸리며 헛기침을 뱉었다.
“그래서 조롱이라도 해보겠다?”
“너무 저를 나쁜 놈으로 취급하시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대표님께 모든 힘을 실어드리고 싶습니다.”
“그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소?”
“믿지 않으시면요? 이대로 대권을 놓치실 겁니까? 대선은 결국 돈 싸움입니다. 여론도 물론 중요하지만 돈이 제일 중요하다는 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김강산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곧 긍정을 뜻한다.
지금 진보 정당은 어느 기업에서도 돕질 않아 자금난이지 않은가?
이런 때에 내가 돈을 뿌린다면 저들은 두 팔 벌려 환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 고집불통인 양반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돈만으로는 부족하다.
좀 더 자극적인 게 필요하다.
“저는, 우리 회사는 이 나라를 사랑합니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이 나라를 위해 돈을 쓸 겁니다.”
“허허, 그런 사람이 잘도 독재자의 정당을 도우셨구려.”
“글쎄요, 제가 만일 그때 진보 정당을 도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양쪽으로 갈라진 김씨 의원님들이 서로 물어뜯으며 민주화 영웅들의 추락을 더욱 가속화시키지 않았겠습니까?”
뼈를 때리는 말에 김강산은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저번 대선에서 참패를 한 이유는 양 김(金)이 서로의 욕심을 위해 등을 돌렸기 때문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중 하나가 가까스로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도 둘은 끝까지 서로를 물어뜯으며 내분을 조장했을 것이다.
“그땐 우리 회사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 분이 만일 서로 힘을 합쳤다면 당연히 그쪽에 패를 몰았겠지만요.”
김강산은 말없이 물 잔을 들이킬 뿐이었다. 이제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면 됐다. 앞으로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하나 더. 저와 손을 잡으신다면, 대권 레이스는 물론 당선이 되신 후에 단결회 척결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제야 김강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저, 정말인가?”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어차피 단결회는 이 나라에 악영향을 끼치는 존재입니다. 하루 빨리 그 뿌리를 제거해야죠. 그리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분은 대표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내게 적개심을 드러내던 김강산이지만, 이번만큼은 빛을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차기 대권의 주인공 김강산이 내 손아귀에 들어오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