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새로운 연합체 (4)
다니엘 로페즈는 잠시 말이 없다가 병째 술을 들이켜기까지 했다.
이윽고 그가 길게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후우-. 이거, 오랜만에 심장이 쫄깃해지는 기분이 드는군요.”
“제가 너무 말이 거칠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미스터 로페즈를 꼭 잡고 싶었습니다.”
“블러핑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미스터 로페즈.”
난 다니엘 로페즈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전 블러핑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제가 내놓은 결과를 보십시오. 한 번이라도 제가 허세를 떨며 상대의 실수를 유도한 적이 있습니까?”
사실 이건 블러핑이 맞다. 하지만 상대에게 그렇게 느껴지지 않으면 그건 블러핑이 아니지 않은가? 그냥 진실일 뿐이지.
내가 계획하고 있는 거대 연합체에서 골든 마피아가 빠지면 아주 곤란하다. 그들을 내가 엎어 버릴 수도 없고, 설령 그런 방법이 있다고 해도 골든 마피아를 뒤집는다?
황금알을 낳고 있는 이 조직을?
절대 그럴 순 없다. 물론 이들이 끝까지 내게 협력하지 않는다면 그땐 나도 차선책을 쓸 수밖에 없지 않은가.
골든 마피아의 멸망.
그 끔찍한 시나리오로 나의 몸이 달려갈 수도 있다.
“미스터 김. 아무리 그런 말씀을 하셔도, 골든 마피아가 미스터 김과 손을 잡을 일은 없을 겁니다.”
이런. 결국 다니엘 로페즈의 대답은 거절인가. 그렇다면 정말 골든 마피아를 내 손으로 박살 내야 한단 말인가. 그러기에는 너무 아깝고, 또 앞으로의 연합을 위해서라도 좋지 않은 일이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면 안 되는데….
“아. 물론, 미스터 김의 제안이 결코 나쁘게 들려서가 아닙니다. 또한 자존심, 뭐 그런 것 때문은 절대 아니죠. 지금 제가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라서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가만히 듣고 보니, 이거 로페즈한테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
“그렇지 않아도 미스터 김에게 말을 꺼내려고 했습니다. 실은 깊이 상의할 일이 있거든요. 아니지. 상의라기보다는 도움을 구한다는 게 맞겠군요.”
“도움을 구해요? 미스터 로페즈가 저한테 말입니까?”
“예, 미스터 김.”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다 일단 로페즈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무겁게 운을 뗐다.
“골든 마피아의 일인자는 곧 제가 될 거라는 말씀을 하셨죠?”
“예. 그렇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게 무슨 뜻일까.
이건 다니엘 로페즈가 골든 마피아의 일인자가 되지 못한다는 건가?
사실, 내가 골든 마피아의 이름과 역사에 대해서만 좀 알고 있지…. 누가 언제 최고 두목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 바가 없다.
설마, 다니엘 로페즈 말고 다른 사람이 골든 마피아를 접수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다. 분명 로페즈라는 이름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골든 마피아의 최종 일인자는 다니엘 로페즈다.
“이런. 표정을 보니,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나 보군요.”
“골든 마피아에 대한 조사는 이미 마쳤습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미스터 로페즈가 골든 마피아의 주인이 될 겁니다. 아닙니까?”
“리턴 컴퍼니라면 골든 마피아에 대해 속속히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군요.”
리턴 컴퍼니는 둘째 치고라도 내가 골든 마피아에 대해 조사 해 보지 않았겠는가? 분명히 골든 마피아의 유력한 차기 대부는 다니엘 로페즈였다. 그런데 그 정보가 틀렸다고 말하는 건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자세히 말씀을 해 주십시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로페즈는 결국 시가까지 물며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골든 마피아의 대부, 앙드레 루이스는 다섯 번째 골든 마피아의 대부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그의 충성스러운 오른팔이었지요.”
골든 마피아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조직이다.
이들이 이토록 롱런할 수 있던 건, 피가 난무하는 구역 싸움을 하기보다는 정치권과의 로비로 세력을 키웠기 때문이다.
마약 판매보다는 카지노라는 불가항력적인 마약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이 바로 이들의 생존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앙드레 루이스는 프랑스계 미국인으로 현재 골든 마피아를 통치 중인 대부다.
저 말대로 로페즈는 그런 그의 충견이나 다름이 없었다.
“저는 열심히 이인자의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앙드레 루이스를 대부로 올려놓는 것에 큰 공을 세웠지요.”
“거기까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암묵적으로 차기 대부가 되신 게 아닙니까?”
“하하. 저도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아무래도 우리 대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앙드레 루이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다니엘 로페즈가 졸지에 토사구팽당할 위기에 처해 있단 말인가?
“앙드레 루이스의 구체적인 생각이 뭡니까?”
“처음부터 그랬던 건지 아니면 마음을 바꿔 먹은 건진 모르겠지만, 그는 차기 대부를 제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정해 놓은 상태입니다.”
“그거… 확실한 겁니까?”
“예. 미카엘 로드릭이라는 놈인데, 제가 이인자라면 그놈은 삼인자 정도 되죠.”
다니엘 로페즈가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틀림없는 사실이리라.
잠깐. 설마 그럼 일이 그렇게 진행되는 건가?
나는 골든 마피아가 내 제안을 거부하게 될 경우, 어떤 방법을 써서 이들을 굴복시킬지 미리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그건 바로 골든 스캔들.
부시 정권 때 터지는 비리 사건으로 그동안 곪아있던 문제가 한꺼번에 터지게 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미 정부가 골든 마피아를 단속시킴과 동시에 야당 의원들을 잡아넣기 위한 꼼수다.
이 일로 골든 마피아가 큰 타격을 입으면서 앙드레 루이스까지 잡혀 들어가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
그렇다면 다니엘 로페즈가 이때 반기를 들어, 스스로 골든 마피아의 일인자가 된 것이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내 기억으로는 분명 그가 골든 마피아의 대부가 되니까.
그렇다면 어떻게든 스캔들을 잘 피해서 1인자까지 되었다는 건데….
이거, 잘만 하면 아주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 * *
“미스터 로페즈.”
“예, 미스터 김.”
“제가 이 일을 해결해 준다면… 그땐 제 제안을 받아들이실 겁니까?”
다니엘 로페즈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 가능한 겁니까?”
“대답을 먼저 듣고 싶군요.”
“물론입니다! 어차피 사냥개 노릇을 하다 죽을 판인데, 살 기회를 만들어 주신다면야 뭐든지 할 수 있죠.”
오케이. 이걸로 됐다.
난 빙긋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조직원들을 최대한 모아 두십시오. 신호가 떨어지면 재빨리 움직일 수 있도록요.”
“미스터 김. 설마, 쿠데타를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글쎄요. 쿠데타라고 보기보다는 비워져 있는 왕좌를 쟁탈하는… 쟁탈전이라고 하죠.”
“쟁탈전이요…?”
로페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만 껌뻑였다.
“전 지금 미스터 김에게 목숨을 걸 각오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명쾌한 설명을 해 주십시오.”
“하하.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조만간 앙드레 루이스가 미 정부 손에 구속될 겁니다. 그럼, 골든 마피아는 어떻게 될까요?”
“루이스가 잡혀간다고요? 그럴 리가요!”
역시, 로페즈는 미 정부에서 은밀하게 일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하긴, 그들도 결국 백악관에서 나오는 정보를 먹고 사는 종족들이지 않던가. 하지만 리소스의 출처가 처음부터 차단해 버리면 이놈들도 결국 눈뜬장님이 되는 것이다.
“그럴 리가 있는지 없는지는 뉴스를 통해 확인하십시오. 앞으로 미스터 로페즈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합니다. 최대한 많은 조직원을 모으세요. 물론, 너무 대놓고 움직이게 되면 의심을 사게 될 테니… 은밀하게 움직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신호가 떨어지는 대로 움직이시면 됩니다.”
나는 할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로페즈가 절박한 손길로 나를 붙잡고 말했다.
“그 신호가 어떻게 떨어진다는 겁니까?”
난 그 절박한 손을 맞잡으며 대답해 주었다.
“당연히 루이스가 수갑을 차고 경찰들 손에 끌려나갈 때가 아닐까요?”
* * *
말은 청산유수처럼 하고 왔지만, 솔직히 이건 내가 나설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알아서 미 정부가 골든 마피아를 흔들게 되기 때문이다. 솔직히 내 도움이 아니더라도 앙드레 루이스가 구속되는 순간, 다니엘 로페즈는 알아서 반기를 들고 일어나 왕좌를 탈취했을 것이다.
어차피 알아서 일어날 일이니, 난 잔뜩 생색만 내면 되지 않겠는가?
이번 일로 로페즈는 나를 영원한 은인으로 기억하게 되리라.
“뭘 그렇게 음흉하게 웃고 있어?”
“응? 아. 응. 아무것도 아니야.”
태혁이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나는 녀석이 어깨에 걸치고 있는 WBC 미들급 챔피언 벨트를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내 생전 이런 광경을 보게 되다니.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체할 수가 없다.
아시아인 최초. 그리고 대한민국인 최초로 WBC 미들급 챔피언이라.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태혁이의 기록 행진이 계속될수록 우리나라 복싱의 역사는 완전히 뒤바뀌게 될 것이다.
“어머니가 엄청 기뻐하시겠다. 지금도 계속 맘 졸이고 계실 텐데.”
“그러게 왜 안 모시고 왔어?”
“야. 아무리 네가 강해도 자기 자식새끼가 맞고 있는 걸 어떤 부모가 멀쩡한 정신으로 쳐다볼 수 있겠냐? 더군다나 어머니처럼 마음 여린 분이 그럴 수 있을 것 같냐?”
“음…. 듣고 보니 그러네.”
납득은 했지만, 여전히 아쉬운 모양이다.
누구보다도 저 타이틀을 어머니께 보여 드리고 싶었을 텐데.
“아무튼, 고생했다. 정말 네가 자랑스럽다.”
“하하. 내가 좀 잘나긴 했지. 그렇죠, 형수님?”
“예. 도련님. 저도 정말 자랑스러워요.”
난 태혁이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으며 윽박질렀다.
“이게 어디서 말끝마다 형수님이야.”
“아, 왜! 형수님 맞잖아. 설마, 형…. 딴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뭐, 뭐야?”
“어머. 설마, 태산 씨. 나 말고 다른 여자라도 있는 거야?”
“아니. 갑자기 말이 왜 또 그렇게 흘러가?”
하여튼 태혁이와 권윤아가 만나면 내가 다 정신이 없다.
둘은 날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들인지 원.
“다음 경기는 또 언제야?”
“아직은 몰라. 슬슬 잡아야지.”
“방어전도 안 치르고 바로 다음 체급으로 넘어갈 생각이야?”
이미 태혁이는 5체급 제패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녀석 성격상 방어전을 하고 싶어 할 것 같진 않다.
“이미 따 놓은 챔피언 벨트는 별로 관심 없어. 이제 다른 벨트를 가져야지.”
“그래서 정말 방어전도 안 치르게?”
“솔직히 그렇게 하고 싶은데, 어차피 한번은 방어전을 치러야 해. 안 그러면 슈퍼미들급 챔피언이랑 붙지도 못해.”
1차 방어전을 성공시키지 못한 챔피언은 진정한 챔피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이 복싱 세계의 암묵적인 룰이다.
그 룰에 따라 태혁이는 어쩔 수 없이 지독한 감량을 하며 미들급 챔피언 방어전을 치러야 한다.
“태혁! 인터뷰 시간이다! 얼른 나와. 다들 네 얼굴 보고 싶어서 난리니까.”
태혁이의 코치 트레이너가 문을 열고 소리쳤다.
밖에서부터 플래시 터지는 게 보일 정도니, 역시 태혁이가 오늘 대단한 경기를 치렀다는 게 실감 났다.
“나 먼저 가 볼게, 형.”
“그래.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하고 와. 밥이나 같이 먹게.”
“알았어! 꼭 기다려야 한다! 형수님 이따 봬요!”
태혁이는 손을 흔들며 촐랑촐랑 코치 뒤를 따라갔다.
저럴 때는 영락없이 김태혁인데. 이상하게 링 위에만 올라가면 무섭게 변한단 말이지.
역시, 저놈은 천생 싸움꾼이다.
아마 전생이란 게 있었으면 태혁이는 장군이 아니었을까.
“근데 아까 그 로페즈라는 사람이랑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야?”
“응? 아. 그냥 서로 예전부터 아는 사이라서. 이것저것 신변잡기 한 거지.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회포도 풀고.”
“아…. 그랬구나.”
권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이런 권윤아의 성격이 참 좋다고 해야 하나.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걸 밝힐 순 없는 노릇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싸움이고, 나 혼자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니까.
난 TV에 나오는 뉴스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얼마 안 있으면 곧 모든 헤드라인에 골든 스캔들이 깔리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불구경이나 하며 내게 골든 마피아를 바치러 오는 다니엘 로페즈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