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새로운 연합체 (2)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회장님.”
대양 그룹이 정식으로 화진 그룹에 합병되면서 이제 권용일은 언론에도 얼굴을 내밀 수 있는 인물이 되었다.
권용일이 드디어 화진 그룹의 초대 회장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화진 그룹에 있는 지분 중 55%가 내 손아귀에 있다. 그리고 그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간부 중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즉, 내가 정통 후계자라는 걸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는 단계까지 왔다는 것이다.
“허허. 자네 얼굴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네. 앞으로 나도 잘 부탁하이.”
권용일은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는 대양 그룹 회장 하영석의 손을 맞잡았다.
이제 대양 그룹이 화진 그룹에 흡수되었으니, 하영석은 더 이상 회장이 아니라 화진 그룹의 지분을 가진 주주다. 아마 그에게 화학 사장 명패가 날아갈 것이다.
화학 쪽을 맡아 온 양반이니, 계속 그 일을 맡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이고. 김 사장님. 축하드립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편하게 말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김 사장님. 그래도 위아래가 있는데 어떻게 제가 감히… 허허허.”
화진 그룹에 있는 지분이 크게 변동을 하면서 간부들은 이제 누구한테 고개를 숙여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예전의 화진파였다면 어떻게든 세력을 모아 단숨에 밀어 보려고 했겠지만, 이건 그룹의 지분을 따지고 드는 일이다. 즉, 내가 원한다면 누군가의 밥그릇을 순식간에 치워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주먹이 앞선 화진파였지만, 이제는 주먹보다 돈의 힘이 앞서는 화진 그룹이다.
나는 간부들이 건네는 인사를 하나하나 받아 주며 누가 위에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우리 동생, 아주 출세했네. 출세했어.”
옆에 같이 있던 황규혁은 혼자 좋아 죽을 것처럼 낄낄 웃고 있었다. 그러다 짐짓 안색을 굳히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설마 나한테도 존댓말 듣겠다고 난리 치는 건 아니겠지?”
“제가 이제까지 한 번이라도 그런 소리를 다른 사람한테 한 적 있습니까? 다들 자발적으로 저러는 겁니다.”
“흐흐. 하긴. 그래도 나중에 공적인 자리에서 존댓말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 언제든 말해. 그 정도는 내가 맞춰 줄 수 있지.”
공적인 자리에서는 내 위신을 높여 주겠다는 소리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역시 황규혁은 이런 판에서 놀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출세욕도 없고 질투도 하지 않으니, 지금은 그냥 고마운 형처럼 느껴진달까.
가끔은 이렇게 서로 간의 정이 깊어지는 것 같아 문득 두려울 때가 있다.
“김 사장님.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오늘 아주 신수가 훤하십니다.”
유쾌하게 웃으며 나타난 건 바로 성일환이었다.
이 양반도 황규혁과 마찬가지로 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널 영등포에서 보자마자 딱 알아봤지. 아! 이놈은 크게 될 놈이구나 하고. 내가 만약에 그때 너 내쳤으면 어떻게 됐을지….”
아마 그랬다면 지금쯤 성일환은 쪽박을 차고 있었을 것이다.
“형님. 그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놈 데려온 게 바로 저 아닙니까? 저 아니었으면 태산이는 화진파 말고 다른 곳에 갔을 겁니다.”
“쯧쯧. 넌 그냥 태산이를 데려온 것뿐이고. 팍팍 밀어준 건 바로 나지. 안 그러냐?”
성일환과 황규혁은 유치하게 자신이 잘났다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그들의 논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시끄러, 이 새끼들아. 나 아니었으면 진작 다 어디 가서 뒤졌을 놈들이. 여기가 네놈들 소리 지르라고 있는 곳인 줄 알아?”
권용일이 등판하자 두 사람은 꼬랑지를 내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내게 손짓하며 말했다.
“잠깐 나 좀 보자.”
“아, 예. 형님.”
나는 그런 그의 뒤를 따라 연회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단둘이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방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일환이한테 어렴풋이 들었다. 무슨 연합체를 만든다고 한다던데. 그게 사실이냐?”
그러고 보니 아직 이 일에 대해 권용일과 제대로 상의를 거치지 않았다.
“예, 그렇지 않아도 따로 시간을 잡아서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인석아. 그런 일이 있으면 빨리빨리 말을 했어야지.”
“죄송합니다, 회장님. 아직 구체적인 그림이 나오지 않았던 터라 함부로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습니다.”
내가 성일환한테 먼저 말했다고 삐치기라도 한 건가? 그래도 내 변명이 잘 먹혔는지 권용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이 뭐야?”
저런 건 또 언제 챙겼는지, 권용일은 품 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그 안에 들어있던 시가에 불을 붙였다.
“빠른 시일 내에 제가 미국으로 넘어갈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메데인 카르텔의 카포와 담판을 지을 겁니다.”
“그 말이 사실이야? 네가 메데인 카르텔 카포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게?”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예. 그쪽과는 오래전부터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제가 연합체 이야기를 꺼내면 그쪽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진 않을 겁니다.”
권용일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더니,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너란 놈은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놈이야? 언제 또 메데인 카르텔의 카포라는 놈을 구워삶은 게야?”
“의도한 건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일이 그렇게 흘러갔죠.”
“허허. 또 운이 좋았다는 핑계냐? 이젠 그런 변명을 듣는 것도 진절머리가 난다, 이놈아.”
그는 맛있게 시가를 쭉 빨아들이며 말을 이었다.
“그쪽이랑은 확실한 거지?”
“예. 일본과도 관계를 맺은 적이 있어 큰 마찰은 없을 겁니다. 단지, 중국 쪽이 문제죠.”
“쪽바리 새끼들도 참 엉망이긴 하지만, 중국은 더해. 그놈들은 아주 막장이잖아. 정치권과 너무 깊게 연관이 되어 있어. 그래서 잘못 줄을 대는 순간 조직 하나가 군대 손에 아작난다고 하잖냐.”
중국에서 마피아 짓을 하려면 당연히 정치권과 줄이 있어야 한다. 그쪽은 워낙 독과점적이라 정치권을 무시하고 들어갈 경우 호되게 당할 수도 있다.
그들은 심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군대를 움직이기까지 하는 막장 전횡을 보이지 않던가. 실제로 중국 군부 쪽 사람을 잘못 건드린 몇 개의 조직이 단 하루 만에 군부의 손에 사라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만큼 그 어떤 나라보다 정치권의 눈치를 봐야 하는 곳이 바로 중국이다.
“아무튼, 너라면 잘하겠지. 이제 나는 그냥 바지사장이야. 앞으로 네가 알아서 다 해 먹어.”
“정말 완전히 은퇴하시려고요?”
“뭐. 그 있잖냐. 태조 이방원이 세종을 앞에 세워 놓고 왕 노릇 한 거.”
상왕 놀음이라도 해 보겠다는 건가.
역시, 권용일다운 생각이다.
아무리 나이가 늙었어도 권력에 대한 욕심은 절대 버리지 않는다.
“그냥 영원히 회장님이 다 해 드십시오. 제가 알아서 가져다 바칠 테니까.”
“허허.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이 나이라는 걸 무시하지 못하겠네.”
아무리 괴물 같은 양반이라지만, 나이에는 장사가 없다. 그리고 나는 권용일이 언제 죽는지 알고 있지 않던가. 물론, 이 영감의 살날은 아직 좀 더 남았다. 그렇다고 해도 슬슬 세월을 타는 게 겉으로 보인다.
하지만 권용일은 권용일이지 않은가.
나약한 모습을 보이다 죽을 사람은 절대 아니다.
* * *
“어머니.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아가. 조심해서 다녀오렴.”
권윤아는 공손하게 어머니께 인사를 올렸다. 그런 권윤아가 너무 이쁜 나머지 어머니는 자꾸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어머니. 정말 같이 가지 않으셔도 돼요?”
“난 됐다. 그냥 우리 태혁이가 무사하다는 소식만 알려 주면 좋겠구나.”
공항에 마중을 나오신 어머니는 나의 마지막 설득에도 넘어가지 않으셨다.
오늘 내가 공항에 나온 이유는 권윤아와 함께 미국으로 떠나기 위해서다.
미국으로 가는 목적이 몇 개 있는데, 그중 제일 중요한 건 바로 태혁이의 경기를 보기 위해서다.
아시아인 최초로 WBC 미들급 챔피언이 될지도 모르는 녀석의 타이틀전 경기를 어떻게 놓칠 수 있겠는가.
어머니가 그 영광스러운 광경을 같이 보지 못한다는 게 아쉬웠지만, 충분히 이해는 간다. 당신의 아들이 링 위에서 누군가의 주먹에 맞아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어떻게 견뎌내시겠는가.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권윤아와 함께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떠났다.
* * *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역시나 공항에서 우리를 마중하고 있는 건 김아름이었다. 하지만 저번과는 다르게 김아름 뒤로 새로 보이는 얼굴들이 몇 명 있었다.
메데인 카르텔과 정식으로 손을 잡고 활동하면서 리턴 컴퍼니의 힘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줄곧 페이퍼 컴퍼니로 있었다면 지금은 큰 건물까지 갖고 있는 회사가 되었다.
현재 주된 일을 맡고 있는 것은 금융업으로 아직 이렇다 할 두드러진 활동은 보이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속을 파보면 강철중을 중심으로 활발한 마약 판매와 더불어 갖가지 로비를 하고 있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어디까지나 메데인 카르텔의 힘도 있고, 내가 현 정치권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한때 리턴 컴퍼니란 이름이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이렇게 버젓이 활동을 할 수 있는 건 그만큼 우리 회사의 영역이 커졌다는 뜻이다. 그리고 골든 마피아와도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미치지 않고서야 우리를 건드릴 사람은 없다.
“강철중 씨는 아직 멕시코에 있나 봅니다.”
“예. 며칠 후면 돌아올 겁니다.”
“아쉽네요.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려 했더니. 일단, 태혁이가 있는 곳으로 가죠.”
“예, 사장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저 사무적인 말투는 여전하다. 그래서 내가 김아름을 계속 쓰는 것일 수도 있다. 항상 변함없이 내가 내리는 명령에 딱딱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회사가 성장하면서 김아름이 챙겨가는 보수는 상당하다.
그렇지만 그건 내가 가지고 있는 돈에 비하면 바가지로 한강 물을 퍼다 나르는 것밖에 되지 않아 부담은 없다.
사실, 김아름이 큰돈을 요구한다고 해도 그것을 치러서 계속 데리고 있는 게 이득이다.
“아직 늦진 않았겠지? 미리 만났어야 하는 거 아니야?”
권윤아의 걱정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오히려 그게 더 부담이 된다잖아. 그냥 경기하는 날 보러 가는 게 제일 도움이 많이 될 거야.”
권윤아가 저돌적으로 한국에 찾아와 다짜고짜 천강 대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우리 사이는 급속도로 깊어졌다. 자연스레 몸도 섞이고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가면서 우리는 예전에 있던 어색함이 사라진 상태였다.
지금 이렇게만 간다면 내 평생 여자는 권윤아 밖에 없을 것 같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내가 여자를 탐하는 욕망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 여자, 저 여자를 만나다가 인생이 꼬인다는 걸 검사 시절 때 하도 봐와서 그런지, 나는 일편단심 한 여자만 바라보고 있다.
하긴. 내가 한눈이라도 팔았으면, 권윤아보다 권용일이 먼저 달려와 나를 반 토막 내려 했을 것이다.
“태혁아.”
라스베이거스 아레나 경기장에 도착해, 나는 태혁이가 머무는 대기실에 찾아갔다. 녀석은 아주 태평한 자세로 TV에서 중계해 주고 있는 서브 경기를 보고 있었다.
“아. 형 왔어? 헉! 형수님도 오셨어요!?”
“도련님. 안녕하세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태혁이는 이미 권윤아를 형수라고 부르고 있었다.
“야. 곧 있으면 네 경기 아니냐?”
“응? 어. 맞아.”
“몸은 풀었어?”
“응. 아까 풀었지.”
누가 보면 오늘 경기를 관람하러 온 관중인 줄 알겠다.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태혁이를 전담하고 있는 트레이너가 내게 말을 걸었다.
“원래 저럽니다. 그냥 넘어가세요.”
“항상 저런 식이었습니까?”
“예. 저게 스스로 긴장을 푸는 방법인가 보죠. 저희도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트레이너들도 그냥 넘어갈 정도면 그만큼 태혁이의 실력을 믿는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녀석이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라왔으니까. 그것도 모두 KO 승리로!
“뭐…. 오늘 경기도 잘하겠죠?”
“하하. 어째 형님 되시는 분이 더 긴장한 것 같네요. 괜찮습니다. 태혁이라면 반드시 이길 겁니다.”
태혁이 본인도 아니고 그를 옆에서 지켜봐 온 트레이너가 보이는 자신감이다.
그 말을 듣자, 내 마음 한쪽에 남아 있던 불안감이 말끔히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태혁아. 이따 보자. 형은 관람석에 가 있을게.”
“응. 좀만 기다려. 챔피언 김태혁으로 가서 다시 인사해 줄 테니까.”
새끼. 혼자서 끝까지 멋있는 척은 다 한다.
난 기대감이 부풀어 오른 마음으로 VIP석에 앉아 메인 이벤트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