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후계자 (1)
권용일의 전성기 때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굉장했다는 이야기를 몇 번 들었다. 하지만 이제 환갑을 넘긴 양반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물론, 권용일을 지키는 조직원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진용이 그런 걸 계산에 넣지 않았을까? 분명히 그는 권용일을 반드시 죽일 수 있을 만큼의 애들을 끌어모아 보냈을 것이다.
“이런 시발….”
다급하게 차에서 내린 성일환은 권용일의 별장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조직원들 같은데, 둔탁한 것으로 구타를 당했는지 모두 머리가 박살 나 있었다.
“서둘러서 들어간다!!”
“얼른 들어가!!”
성일환은 따라 들어가려는 나를 붙잡았다.
“넌 여기 남아 있어.”
“아닙니다, 형님. 저도 큰 형님이 괜찮으신지 꼭 봐야겠습니다.”
“그냥 있으라니까?!”
“정말 괜찮습니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나의 고집을 꺾지 못한 성일환은 짧게 신음을 뱉으며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권용일이 무사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심란한 마음이 생기는 이유가 단순히 권용일을 걱정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권용일이 죽고 난 후의 일에 대한 복잡함 때문인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권용일이 죽으면 안 된다.
그럼, 화진파 뿐만 아니라 화진 그룹까지 크게 흔들려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
왕이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으면 그 곁에 있던 신하들이 칼을 뽑기 마련.
이미 한차례 피바람이 불었지만, 다시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모르는 거다. 불필요한 마찰은 최대한 피해야 할 상황.
아직 나는 권용일이 정식으로 내세운 후계자가 아니지 않던가.
그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권용일은 살아 있어야 한다.
“젠장. 이진용 이 개 같은 놈이…!”
별장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시체가 늘어나고 있었다.
권용일을 지키는 조직원들은 물론이요, 가정부에서 정원사까지 싹 다 목숨을 잃은 듯 보였다. 이곳 별장 안에서 숨 쉬고 있는 것들은 전부 죽인 것 같은데, 점점 더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이진용이 정말로 이 사달을 낼 줄이야.
내가 너무 교만했다. 그리고 안일했다.
메데인 카르텔을 손에 넣으면서 이 교만이 더욱 커졌다. 뒤를 돌아보지 못했고, 누군가가 나의 목덜미에 칼을 꽂아 넣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결국 이건 나의 교만에 대한 형벌이란 말인가.
“큰 형님-!!”
쾅-!
우리는 계단과 복도에 널려져 있는 시체들을 밟고 넘으며 마침내 서재 입구에 다다랐다.
피 묻은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간 성일환과 나는 온몸에 피가 가득 적셔 있는 채로 소파에 앉아 있는 한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크, 큰 형님….”
그건 바로 권용일이었다.
“뭐하다 이제 왔어, 새끼들아.”
이럴 수가.
권용일이 살아 있단 말인가?
나는 아픈 것도 잊고 권용일 앞에 달려갔다.
“괘, 괜찮으십니까?”
워낙 몸에 피가 많이 묻어 있어 그가 크게 다친 건지 아닌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권용일은 내 이마를 살짝 때리며 말했다.
“이놈아! 내가 화진파 두목 권용일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그건….”
그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내가 화진파에서 제일 강하다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아직도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야.”
말은 저렇게 해도 권용일은 많이 지쳐 보였다. 거기다가 서재에 가득 널브러져 있는 이 시체들만 봐도 그가 얼마나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지 알 수 있다.
“큰 형님…. 이놈들을 전부 큰 형님께서….”
성일환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로 다가와 주변을 살폈다. 그 뒤로 따라온 조직원들도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새끼들이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감히 덤비잖아. 그래서 교육 좀 시켜줬지.”
권용일은 별일 아니라는 듯 바닥에 놓여 있는 두 개의 쌍절곤을 가리켰다.
고작 저 두 개로 이 많은 놈을 상대했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것이 화진파의 보스, 권용일의 진정한 모습이란 말인가.
“역시, 나이를 먹어도 큰 형님 실력은 정말….”
성일환의 감탄 어린 찬사에 권용일은 오히려 그런 그를 꾸짖었다.
“야! 성일환이. 내가 인마 왕년에는 혼자서 조직 몇 개를 박살 내던 사람이었어. 그거 몰라서 하는… 큭!”
그럼 그렇지.
아무리 권용일이라도 저 많은 조직원을 상대하면서 다친 곳이 없었겠는가.
나는 신음을 뱉으며 몸을 구부리는 권용일을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큰 형님!”
“큰 형님!”
성일환도 깜짝 놀라 그의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형님!!”
“괜찮아…. 쪽팔리니까 그만 좀 소란 피워.”
다행히 죽을 만큼의 부상은 아닌 것 같았다.
난 신경질적으로 뒤에 멀뚱멀뚱 서 있는 조직원들에게 소리쳤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뭐라도 가져와야 할 거 아니야, 새끼들아!!”
“죄, 죄송합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조직원들이 부리나케 달려가 구급 조치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데려왔다.
“이거… 운이 정말 좋으셨습니다.”
“허허. 이 박사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여기서 죽진 않겠네.”
이태영 박사는 우리 화진파에서 고용한 야매 의사 중 하나로, 이런 위급 상황이나 혹은 큰 싸움을 벌일 때 우리를 치료해 주는 담당을 맡고 있다.
그래서 항상 어떤 조직과 큰 싸움을 앞두고 있으면 꼭 의사 몇 명을 데리고 같이 간다.
그래야 빨리 다친 사람을 지혈하고 치료할 게 아닌가.
“급소를 피하시긴 했는데, 찔린 상처가 세 군데나 되고 베인 상처는 열 개가 넘습니다. 솔직히 이런 상처로 어떻게 이리도 태연히 말씀하실 수 있는지가 놀라울 뿐입니다.”
찔린 곳이 세 군데나 된다고?
거기다가 베인 상처가 열 개나 된다면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부상이다. 그런데도 권용일은 덤덤한 얼굴이라니.
정말 괴물은 권용일이 아니었을까?
“그럼 얼른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 되도록 빨리요. 이미 차를 부르긴 했습니다. 급한 대로 응급 처치는 했지만, 제 거처로 옮겨서 수술을 받으셔야 합니다.”
“에잉. 그 꼬질꼬질한 곳에 가서, 꼭 그래야겠어?”
“가셔야 합니다, 회장님. 꼭 가셔야 합니다.”
당장 죽진 않겠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소리다.
“큰 형님. 가셔야죠. 큰 형님께서 건재하셔야 화진파가 살 수 있는 게 아닙니까.”
“나 참….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또 할 말이 없지.”
권용일의 대답에 나는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뻔뻔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니. 저것도 아마 권용일만의 능력이지 않을까.
* * *
“큰 형님은 괜찮으시답니까?”
“아까도 이 박사가 그랬잖아. 운이 좋았다고. 정말 우리 큰 형님은 천운을 타고난 분이라니까. 아슬아슬하게 급소를 잘 피해간 모양이야.”
성일환의 말에 이제야 안심이 되었다.
다른 간부들도 나와 똑같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권용일이 없으면 무너진 화진파를 재건할 수가 없다는 것을.
“그래서, 피해 상황은 좀 어때?”
나는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안 좋습니다. 반타작도 안 될 정도로요.”
“시발. 이진용 그 새끼가 날뛰는 바람에 일이 꼬였네. 어떻게 된 게 오성파랑 싸우는 것보다 우리끼리 싸우는 게 더 피해가 크냐? 이런 걸 두고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거야.”
현재 화진파의 상황은 정확한 수치를 내놓지 않아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를 건드릴 수 있는 조직이 대한민국에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삼대 조직 중 하나였던 대룡파가 여전히 건재했다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그러나 이진용의 반란으로 화진파가 큰 피해를 입은 건 사실이지 않은가.
기업형 조직이 되면서, 지금과는 많은 점이 달라지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벌여놓은 사업은 유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을 계속 운영한다면 인력이 필요하고, 그렇다면 당장 조직의 복구가 시급하다.
그리고 우리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세력을 넓히려는 벌레들도 꼬일 터.
아무리 범죄와의 전쟁 중이라지만, 살아남는 녀석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앞으로 할 일이 참 많아진 것 같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넌 좀 어때? 이렇게 나와 있어도 되는 거야? 너도 환자잖아.”
“전 괜찮습니다, 형님.”
“야 이 새끼야. 칼에 찔렸는데 괜찮은 게 어디 있어, 인마. 너도 어서 가서 치료받아!”
정말 괜찮은데 성일환은 나를 막무가내로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눈치 빠른 간부들도 나를 부축하며 말했다.
“그래. 김 사장. 자네가 아무리 젊어도 칼에는 장사가 없어. 그러니까 어서 가자고.”
“맞는 말이야.”
결국 나는 강제로 끌려가 의사한테 진료를 받아야 했다.
조금 이상한 점은 야매 의사들의 거처가 아니라, 동네 작은 병원으로 옮겨 갔다는 거다.
* * *
“아니. 이 사람아! 이런 상처를 가지고 아직 치료를 안 받으면 어떡해!”
“아…. 그게 응급 처치는 이미 받아서….”
“젊은 놈이 대가리에 든 게 없구먼! 그건 응급 처치고! 치료는 따로지, 이 답답한 양반아!”
내 상처를 살펴본 의사가 질겁하며 내게 삿대질까지 해 댔다.
하긴. 칼에 찔려 놓고 지금까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가.
긴장이 점점 풀려서인지 정신이 멍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어떤 새끼가 찔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급소를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로 빗겨 나갔어. 천운인 줄 알아.”
“그… 정도입니까?”
“이놈아. 급소 피했다고 다 사는 줄 알아? 2차 감염이 얼마나 무서운 건데. 너 좀만 더 지체했으면 감염돼서 뒤졌을 거야.”
입이 구수한 의사다. 옆에 있던 성일환이 낄낄거리며 웃자, 이 양반은 성일환에게까지 욕설을 날렸다.
“넌 옆에서 그렇게 쪼개지 말고 썩 나가기나 해. 네 덩치만 보면 한숨이 나와, 이 새끼야.”
“알겠어요, 형님. 우리 동생, 잘 좀 부탁드립니다.”
“얼른 꺼지라니까?”
성일환이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면 꽤 인연이 깊은 모양이다.
“링거 좀 맞으면서 자라. 이 정도 했으면 알아서 낫겠지.”
치료가 다 끝났는지 그 의사는 나를 입원실에 놔두고 나가 버렸다. 그제야 성일환이 슬쩍 눈치를 보다 내 곁으로 다가왔다.
“어휴. 성질머리는 여전하네, 저 형님은.”
“아시는 분입니까?”
“우리 큰 형님 친동생이야.”
난 순간 숨이 막힐 뻔했다.
권용일의 친동생이 의사였다고?
“몰랐구나. 아무튼, 우리 형님 못지않게 성질 더러운 분이니까 알아서 조심해. 그래도 실력은 좋으신 분이니까, 괜찮을 거야.”
하나는 깡패 두목.
다른 하나는 병원 의사라.
이건 도대체 무슨 엉뚱한 조합인지….
“그나저나 이창호 그 새끼는 잡았어?”
그러고 보니 제일 중요한 타깃을 잠깐 잊어버리고 있었다.
“황규혁 형님이 잡았습니다. 무슨 지하 벙커 같은 곳에 짱박혀 있는 걸 꺼냈다고 하더라고요.”
성일환과 나는 천안으로 왔지만, 황규혁은 부산에 남아 오성파 잔당들을 처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창호까지 잡는 쾌거를 이뤘다.
“그 새끼, 이진용이랑 한 패였던 거지?”
“이창호는 그렇게 생각한 거 같은데, 아무래도 이진용은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진용이 우리 뒤통수도 치고, 이창호 뒤통수도 쳤다는 거죠.”
성일환은 몇 번 눈을 껌뻑이더니, 이윽고 내 말을 이해한 것 같았다.
“이창호 그 새끼도 낚인 거야?”
“예. 이진용이 제대로 월척을 낚았어요. 이창호는 이진용이 오성파를 돕는 줄 알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가 우리랑 똑같이 당한 거죠.”
이진용은 처음에 이창호와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같이 작전까지 짰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거사 당일에 이진용이 배신을 하면서 오성파 조직원들을 싸그리 밀어 버리고, 마지막에는 우리를 친 것이라 볼 수 있다.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이진용의 작전은 거의 성공할 뻔했다. 내가 데려온 메데인 카르텔 조직원들이 아니었더라면 진작 끝났을 게임이다.
나는 다시 한번 자신을 질책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다음에도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순 없지 않은가.
“그 새끼 면상 보러 다시 부산에 가야겠네.”
“아. 지금 이쪽으로 올라오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큰 형님 곁도 지켜드려야죠.”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뭐.”
일을 마무리한 황규혁이 지금쯤 천안으로 올라오고 있을 것이다.
권용일이 병원에 있는 터라 당장은 그의 앞에 데려갈 수 없을 테니, 내가 먼저 이창호의 꼬락서니를 한번 봐 보도록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