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통수에 통수 (4)
위층에 올라와서야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건 더 이상 오성파와 화진파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형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성일환은 권총 탄창을 갈아 끼우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진용, 그 새끼가 아무래도 우리 뒤통수를 친 거 같다. 갑자기 이 새끼들이 우리한테 덤벼들잖아. 그래서 쏴 죽였어.”
가슴에 총알구멍이 송송 나 있는 채로 성일환 앞에 쓰러져 있는 간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놈은 분명 이진용 옆에서 온종일 아부를 떨던 놈으로 기억한다.
“다치신 곳은 없으시고요?”
“난 괜찮아. 문제는 우리 애들 피해가 만만치 않다는 거지. 거기다가 다른 구역에서도 지금쯤 한바탕 싸우고 있을 텐데….”
이진용이 정말 배신을 한 것이라면 성일환의 말대로 각 구역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 오성파 조직원을 몰아냈으니, 이진용이 속내를 드러낸 것이리라.
그렇다면 여기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조직원들을 모아 이진용 쪽 간부들을 저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쪽이 불안한 전황을 유지해 채 싸워야 할 것이다.
“형님. 서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지.”
성일환은 권총을 손에 꽉 쥔 채 소리쳤다.
“당장 싸울 수 없는 놈들은 전부 여기에 남고, 나머지는 전부 따라와!
“예, 형님!”
오성파는 더 이상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일을 벌이다니.
나는 문득 불안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진용이 설마 오성파에 붙은 것이라면?
그럼, 우리야말로 위급한 상황이 아닌가?
이진용과 뜻을 함께하고 있는 간부들은 한둘이 아니다. 그들이 전부 등을 돌리고 오성파와 손을 잡는다면 이건 심각한 문제다.
한순간에 이 거리의 제왕이 화진파에서 오성파로 바뀔 수 있다는 것.
그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역시 장본인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여기까지 와서 배신을 때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형님.”
조직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오자, 이진용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주변을 포위했다.
현재 나와 성일환이 데리고 있는 조직원들 수만 120명.
그런데 상대는 200명이 훨씬 넘는 것처럼 보였다.
쪽수로는 우리가 밀린다는 것이다.
이진용은 능청스럽게 껄껄 웃으며 내게 말했다.
“이보게 김 사장. 어차피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게임이었잖아. 내가 가만히 앉아서 목이라도 내놓을 줄 알았나?”
당연히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설마하니 이렇게 배신을 하실 줄은 몰랐다는 겁니다. 이건 저에 대한 배신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조직에 대한 배신입니다. 그것도 큰 형님을 향한 배신이죠.”
이진용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김 사장이 모르는 게 있어. 누가 배신을 때렸다고 그러는 거야? 배신은 내가 때린 게 아니야. 큰 형님이 그러신 거지. 조직에 대한 배신이라고 했나? 맞아. 큰 형님이 아주 크게 배신하신 거야. 바로 우리 화진파를.”
“구차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하하. 그래? 너 같은 핏덩이에게 화진파를 넘기겠다는 생각을 한 게 배신 아닌가? 그분 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와 땀을 흘렸는데.”
그는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탄식 어린 목소리를 냈다.
“그걸 큰 형님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화가 나는데, 앞으로 너 같은 새끼 밑에서 고개 숙일 걸 생각하면 더 피가 거꾸로 솟는 거지.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니겠어?”
내가 왜 그걸 몰랐겠는가?
언젠가는 반드시 이진용이 나를 죽이기 위해 움직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권용일까지 배신하면서 일을 벌일 줄이야.
그만큼 궁지에 몰려 있었다는 것인가.
화진 그룹의 지분 관계도 그렇다, 이진용이 머리를 쓰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 가장 먼저 지분에 대해서 파악했을 테고…. 모든 것을 파악한 뒤로는 더 이상 뒤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도 권용일이 살아 있을 땐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있다. 지금이 딱 이 짝이려나?
“하긴. 형님이 곱게 죽을 리 없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알고 있는 양반이 미리 준비를 했어야지. 아무튼, 게임은 끝난 거 같네.”
이진용의 간사한 웃음소리에 따라 조직원들이 천천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성일환은 이미 총을 들어 다가오는 놈들을 향해 조준하는 중이었다.
여기서 또 한 번 진흙탕 싸움을 해야 하는 건가?
“동욱아. 그리고 정식아.”
“예, 형님.”
“응.”
숫자 싸움을 하면 우리가 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최대한의 이점을 살려서 우리에게 유리한 싸움을 이끌어 가면 된다.
“우리 셋은 이진용, 저 새끼 하나만 노린다. 다른 놈들은 전부 다 무시하고 이진용한테만 달려가. 누구라도 좋으니까 저 새끼한테 칼이라도 꽂아. 저놈만 죽으면 저절로 끝나게 될 싸움이야.”
“예, 형님.”
“알겠어.”
동욱이와 정식이가 함께라면 든든하다.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않은가. 우리 셋이서 달려든다면 속전속결로 이진용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태산아, 피해!!”
푸욱-!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마치 온 세상이 휘청거리는 듯한 기분이랄까.
나는 내 복부에 칼을 꽂아 넣은 동욱이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이게 무슨….”
정식이가 소리치지 않았으면 급소를 맞아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칼이 꽤 깊이 들어갔다.
“이 개새끼가!!”
정식이가 냅다 발을 날려 동욱이를 걷어찼다. 놈은 바닥을 잠깐 뒹굴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아깝네요. 조금만 더 빨랐으면 원큐에 보내드릴 수 있었는데.”
저게 내가 아는 동욱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소름 끼치는 목소리다. 그리고 저 차가운 표정까지. 모든 게 내가 알고 있는 동욱이의 모습이 아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 개 같은 새끼야!”
정식이는 나를 부축하며 동욱이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동욱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었다. 난 그런 동욱이를 보며 말했다.
“처음부터… 이진용이 보낸 쁘락지였냐?”
그 물음에 답을 한 것은 동욱이가 아닌, 이진용이었다.
“원래는 너한테 보낼 생각이 없었어. 처음부터 일환이를 노리고 보낸 놈이었지. 그런데 운 좋게도 동욱이가 네 옆으로 가는 게 아니겠냐?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했지. 너도 보면 알겠지만, 저놈이 능력도 좋고 사람 속이는 것도 아주 잘하거든.”
이제야 모든 의문점이 풀리는 것 같다.
왜 이진용이 성일환을 이길 수 있었는지.
어떻게 성일환을 그토록 빠르게 매장할 수 있었는지.
그 해답을 찾은 것이었다.
그 중심에는 김동욱이 있다.
김동욱. 저놈이 성일환을 파멸로 이끌게 된 것이리라. 하지만 내가 화진파에 들어가면서부터 미래가 바뀌었다.
목표가 성일환이 아닌, 나 김태산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함부로 역사를 바꾼 대가를 이렇게 톡톡히 치르고 있다.
“이 더러운 새끼.”
정식이는 뒤에 있던 조직원들에게 눈짓해 나를 부축하게 했다. 그런 다음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뭐라도 꺼내, 이 새끼야.”
동욱이는 피식 웃으며 애용하는 손도끼를 양손에 하나씩 잡았다.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한 번은 형님이랑 붙고 싶었습니다.”
“형님이라 부르지 마, 이 역겨운 새끼.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어.”
“정말요? 저번에는 저만 한 동생이 없다고 술자리에서 그러지 않으셨어요?”
저 능청스러움은 이진용과 완전히 판박이다.
누가 보면 둘이 부자지간인 줄 알겠다.
“입 닥쳐!”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지, 정식이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내가 동욱이를 믿었던 것보다 정식이는 훨씬 더 저 녀석을 믿어왔다. 그런데 이렇게 통수를 맞으니, 충격이 꽤 큰 것이다.
정식이가 저 정도로 화를 내는 건 나도 처음 본다.
“덤벼, 이 새끼야. 오늘 네 사지를 다 뜯어 줄 테니까.”
“예. 그러시겠죠. 그런데 제가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식이 형님인데요?”
얄미운 새끼.
동욱이는 절대 스스로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는다.
저놈도 충분한 실력을 갖추긴 했지만, 정식이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괜한 호승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다.
“뭐 하고 있어? 다들 가서 할 일들 해야지.”
동욱이가 눈짓을 보내자 이진용은 조직원들에게 손짓했다. 그러기 무섭게 그들이 우악스러운 함성을 지르며 사방에서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이 새끼들아! 멀뚱멀뚱 뭘 쳐다보고 있어! 얼른 태산이 지켜!!”
“예, 형님!!”
“태산 형님을 지켜라!”
젠장. 설마 내가 이런 방심을 할 줄이야.
그래서 사람은 함부로 믿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맞다. 그리고 그러지 않기로 결심까지 했건만, 난 또 사람에게 배반을 당하는 것인가.
이젠 지긋지긋하다.
“저 새끼 죽여!!”
“김태산부터 잡아!”
나를 잡기 위해 달려드는 이진용의 조직원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막는 나의 사람들.
머릿수로는 우리가 한참 밀리지만, 아슬아슬하게 균형이 맞고 있었다.
정식이가 활약을 해 준 것도 있고, 성일환과 그의 조직원 몇 명이 총을 쏘면서 상대를 주춤거리게 만드는 역할을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 아슬아슬한 균형이다. 또한 금방 깨질 수밖에 없는 균형이기도 했다.
“이 끈질긴 새끼들.”
정식이는 수십 명의 조직원에게 둘러싸인 채였다. 아무리 정식이라고 해도 무적이 아니지 않은가.
숨을 심하게 헐떡이는 것을 보니, 한계에 부딪힌 모양이다.
“오성파를 싹 뿌리 뽑는 이 기쁜 자리에서, 이 뭐 같은 상황이라니. 이진용, 이 더러운 새끼.”
성일환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미 그의 조직원들도 대부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상태. 그도 온몸이 성치 않아 보였다.
“일환아. 그건 걱정하지 마라. 오성파는 오늘부로 완전히 뿌리가 뽑힐 테니까. 내가 화진파를 배신한 게 아니라니까? 그저 화진파를 망치는 쓰레기들을 정리할 뿐이지.”
“말은 잘해요, 개새끼.”
이진용은 더 볼 것 없다는 듯 껄껄 웃으며 손을 내렸다.
그 신호에 맞춰 조직원들이 성일환에게 동시에 달려들었다.
저 정도 숫자가 한꺼번에 몰아치면 성일환도 끝이다. 그리고 협공을 당하고 있는 정식이도 얼마 못 가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진작 줄을 잘 서셨어야죠.”
더 이상 정식이에게 남은 힘이 없다고 생각한 동욱이가 드디어 전면에 나섰다.
손도끼를 돌리며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욱이를 보자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저게 정말 내가 아는 김동욱이란 말인가.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이 새끼야.”
으르렁거리며 말은 했어도, 정식이는 이미 한계다.
제대로 칼을 휘두를 힘도 남아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조직원들이 휘두른 연장에 맞아 다리를 절뚝이고 있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호랑이를 마무리하기 위해 동욱이가 나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까 저랑 싸우자고 하셨죠?”
또 한 번 김동욱은 능청스레 실실 웃으며 정식이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정식이는 꼴사납게 칼을 허공에 휘두르며 동욱이를 위협했다. 하지만 저런 힘없는 칼이 닿기야 하겠는가?
“이 개… 컥-!”
오히려 정식이는 동욱이의 발에 맞아 뒤로 넘어지기까지 했다.
이제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동욱이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 정식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날렸다. 그런 뒤 도끼를 높이 들어 그대로 정식이 정수리를 찍으려는 찰나.
타앙-!
긴 총성이 거리를 매우며 진하게 들려왔다.
나는 손을 따고 전해지는 반동에 더욱 격렬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김동욱이 내가 쏜 총에 맞아 털썩 바닥에 주저앉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통쾌했다.
“뒤는… 봤어야지, 멍청한 새끼.”
난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이진용에게 소리쳤다.
“아직 안 끝났어,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