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통수에 통수 (2)
최근에 여의도로 집을 옮겼지만, 들어가는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성파와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한 것도 있지만, 이리저리 일이 많다 보니 호텔에서 자는 날이 더 많았다. 그래도 오늘은 특별히 집으로 돌아왔다.
“정말이라니까, 엄마? 나 진짜 잘하고 있어.”
태혁이가 잠깐 휴가를 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날이다.
휴가라고 하니까 좀 웃기긴 하다만, 어머니는 태혁이가 온다고 해서 오늘은 가게도 안 나가셨다.
“그러니까 다음에 경기 보러 오세요. 아들 타이틀 따는 건 봐야지?”
“아이고. 나는 무서워서 그런 거 못 보겠다.”
아마 내년 초에 태혁이의 WBC 미들급 타이틀전이 열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전승무패를 이어 가고 있는 태혁이를 항상 걱정하고 계신다. 그래서인지 태혁이의 경기도 못 보고 계시는데, 보게 되면 심장이 떨어질 것 같다고 여러 번 말씀을 하셨다.
그래도 태혁이는 아쉬운 모양인지 계속해서 어머니를 설득해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저 우리 아들이 무사히 돌아왔으면 한다. 어디 가서 다치지 말고.”
“알겠어. 걱정하지 마세요. 나도 우리 엄마가 계속 건강했으면 좋겠어.”
오랜만에 집에 왔다고 태혁이는 그동안 떨지 못한 애교를 다 떨었다.
링에 올라가면 맹수보다 더 무서워지는 놈이 저러니까 왠지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막내라는 게 항상 저런 존재이지 않겠는가?
과학 연구를 보더라도, 부모가 막내에게 더 많은 애정을 쏟는다는 건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뭔가 좀 씁쓸하다.
“형은 요즘 괜찮아?”
든든하게 저녁까지 먹고 난 뒤, 동생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이놈은 술을 절대 입에 대지 않는 녀석이라 사이다 한 잔씩 따르는 거로 대신했다.
“항상 괜찮지.”
“여자 친구는? 요즘 연락해?”
“…응? 어. 그, 그럼.”
“아닌 거 같은데. 하긴. 형이 연애할 스타일은 아니지.”
“야.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이거나 먹어.”
태혁이는 피식 웃으며 말없이 안주를 먹다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아직 모르시지?”
“뭐를?”
“형이 하는 일.”
나는 사이다를 다시 컵에 채워 한 번에 들이켰다. 오늘은 왠지 술이 땅기는 날이다.
“글쎄다. 모르시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시는 건지….”
“엄마가 좀 순진해? 분명 형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겠지.”
“…그런가.”
쓰디쓴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아들이 깡패라는 걸 알면 어머니는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이 일도 조만간 끝이야.”
“정말? 그만두고 다른 일 하려고? 괜찮겠어?”
태혁이는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깡패라는 직업이 들어가는 건 자유라도 나오는 건 그렇지 않다. 하지만 난 그런 의미로 태혁이에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건 아니고. 이제 우리 깡패 아니야. 나름 기업인이라고.”
“그래?”
“응. 화진 그룹이라고, 꽤 큰 회사로 컸어. 이 일만 끝나면 이제 깡패 짓도 안 할 거야.”
예전처럼 깡패 짓을 하고 다니진 않겠지만, 화진 그룹이 되었다고 해서 나이트 관리나 마약 거래를 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외형은 기업으로 내실은 조직으로.
이것이 화진 그룹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겠는가?
“음. 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됐으면 좋겠다.”
“잘 될 거야. 형이 여기서 열심히 내실을 키우는 동안, 너는 벨트나 많이 따.”
“흐흐. 알겠어. 다음에는 내 얼굴을 신문 기사로 보게 될 거다. 동양인 최초 세계 미들급 챔피언, 김태혁. 괜찮지?”
동양인 최초 세계 미들급 챔피언이라.
거기다가 5체급을 석권한 챔피언이라면 더 폼 나지 않을까?
그것도 세계 무대에서 말이다.
“그래. 어디 형한테 자랑거리라도 줘 봐라. 매일 술 먹을 때마다 네 얘기만 하게.”
“기대하라니까?”
태혁이는 낄낄 웃으며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 모습은 어딜 봐도 순진무구한 내 동생이다. 하지만 싸움이 시작되면 그 누구보다도 무서운 존재로 탈바꿈한다.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강한 남자, 그 남자가 내 동생이 될 것이란 게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 * *
수화기만 바라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과연 전화를 해야 할까.
나는 결국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미약한 신호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헬로?”
“로이. 접니다.”
“오. 워커야?”
“예.”
“이야. 황송하게 나한테 전화를 다 주고. 무슨 일이야?”
이제 메데인의 카포가 된 사람인데도 여전히 그 목소리 그대로다. 참 한결같은 놈이다.
“아시아지부에 관한 이야기 때문인데요.”
“그렇지 않아도 언제 그 얘기를 할까 기다렸어. 직접 맡아 줄 거지?”
“물론입니다. 하지만 직접 얼굴을 내세울 순 없어요. 대리인을 세울 겁니다.”
“대리인? 누구?”
“그건… 제가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좀 다른 것 때문에 그래요.”
사실 로이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그래도 모든 것이 걸린 싸움인 만큼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일인데?”
“아시아 쪽에 메데인 카르텔이 있다면, 한국에도 있다는 소리겠죠?”
“있긴 한데. 그래 봐야 소수야. 왜? 사람 필요해? 한국에 워커 사람들 많지 않아?”
한국에는 별로 없다는 건가.
그렇다면 다른 나라에 있다는 건데.
“이번에 사람이 많이 필요한 일이 있어서요. 그래서 말인데, 조직원들이 중국이나 일본 쪽에 있습니까? 아, 물론 그쪽 현지인으로요.”
“물론이지. 일본은 야쿠자 천국이잖아. 우리가 활동하기도 편하고. 중국도 꽤 많아. 그쪽 유통은 삼합회 애들을 통해서 진행되거든.”
예상했던 대로 중국과 일본에 전부 메데인 카르텔의 손이 뻗쳐 있었다.
역시, 세계 어느 곳을 가도 메데인의 마약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그럼, 거기서 한 30명 정도만 빼 올 수 있나요? 되도록 실력 좋은 사람들이면 좋겠는데.”
“뭐…. 그건 어렵지 않아. 그런데 실력 좋은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를 얘기하는 거야?”
“총은 쓰지 않고 칼만 써야 해요. 가능하겠습니까?”
“칼잡이라-. 알겠어. 어마어마한 애들로 보내 줄 테니까, 기대해.”
로이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굉장한 실력자들을 보내 준다는 건데.
내가 실수를 한 걸까?
괜히 잘못 끌어들인 건 아닌지 걱정부터 앞선다. 그놈들이 넘어와서 깽판이라도 치게 되면 뒤처리가 매우 곤란하진 않을지….
“고맙습니다, 로이.”
이미 부탁한 거,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적절하게 잘 쓰면 되지 않겠는가.
“보스의 명령인데, 이 정도쯤이야.”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조만간 멕시코로 넘어갈게요.”
“그래. 꼭 와.”
전화가 끊기고 나서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것으로 나도 내놓을 수 있는 카드를 전부 내놓았다. 이제 남은 건 실행이다.
이 호랑이 사냥을 끝내야 할 때가 왔다.
* * *
“오셨습니까, 형님.”
약속된 장소로 가자 조직원들이 전부 창고에 모여 있었다.
이창호가 숨어 있다는 은신처를 치기 위해 우리 모두 부산항에 모였다.
“안녕하십니까, 형님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몇몇 간부들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고 다른 이들은 호의를 보였다.
“아이고. 김 사장 왔는가?”
“오늘도 잘 부탁해, 김 사장.”
슬슬 라인을 타기 시작하는 건가.
지금 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진용 쪽일 것이다.
얼굴을 기억해 두는 건 나쁘지 않겠지.
이진용이 제거되면 저놈들도 다 쳐내야 하니까.
“형님. 저희 쪽 애들도 배치 다 끝냈습니다.”
“몇 명 모았어?”
“120명입니다.”
많이도 데려왔다.
간부들이 데려온 숫자까지 합하면 오백은 될 것 같다. 그만큼 반드시 이겨야 하는 총력전이지 않던가?
“이창호 쪽이 몇 명 정도 있다고 했지?”
“200명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 영감도 참 많이 데리고 있네.”
오백 명이나 모은 이유가 있다.
이창호도 그냥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순 없다며 사람을 모은 것이리라.
마지막 발악은 해야 호랑이답지 않은가.
“애들 연장도 다 챙겨줬지?”
“예, 형님.”
“그래.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형님.”
나는 동욱이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욱이 이놈이 내 옆에 있다는 게 참 다행이다.
성일환이 잘 가르쳤는지, 일 처리도 빠르고 센스도 좋다. 거기다가 싸움 실력도 수준급이니, 이보다 더 다루기 좋은 부하가 어디 있겠는가?
내가 동욱이에게 모든 걸 맡기고 있진 않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동욱이가 내 업무를 다양하게 담당하고 있다.
조직과 관련된 일이라면 동욱이가 맡는다는 건데, 나중에 좀 더 크면 회사 쪽 일을 맡겨도 괜찮을 것 같다.
“정식이 너도 준비는 다 했지?”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거냐? 흐흐. 난 빨리 싸우고 싶다.”
동욱이는 차분하게 있는 반면, 정식이는 몸이 근질거리는 모양이다.
허리춤에 꽂혀 있는 칼만 해도 일곱 개나 된다.
오늘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하려고 온 것 같다.
“자자. 이제 그만 조용히들 하지. 김 사장도 왔는데.”
동욱이와 정식이를 대동한 채 공장 2층에 있는 사무실에 들어갔다.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던 간부들이 이진용의 말 한마디에 전부 입을 닫았다.
아직은 불편한 서열 관계다. 하지만 이 싸움 이후부터는 깨끗이 정리가 될 예정이다.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형님들. 그리고 송구하게도 제가 이번 싸움에 책임을 지게 되어 어깨가 무겁습니다.”
여기저기서 불편한 침음이 들렸다. 하지만 활짝 미소를 지으며 나를 눈동자를 빛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에게 라인을 대고 있는 간부들이다.
이진용이 썩은 동아줄이라는 걸 알아챈 것일까?
“앞서 말씀드리자면, 지금 이창호가 있는 은신처에는 오성파 조직원 200명이 집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연 정면 돌파를 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써서 그들을 잡을지는 형님들의 의견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들으라는 식으로 말을 꺼냈다.
“참나. 언제 우리 의견 물어본 적이 있다고. 꼴값 떨기는.”
순간 분위기가 차갑게 변했다.
“거참, 사람들. 이럴 거야? 지금 그 어떤 때보다 중요한 시기잖아. 그런데 그런 말을 해서야 쓰겄나? 안 그래, 오 사장? 성격이 그 모양이니까 자식새끼들이 가출한 거 아냐?”
하지만 이진용의 재치로 차가웠던 분위기가 다시 누그러뜨려 졌다.
이진용은 가증스러운 미소를 띠며 계속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정말 다른 의견이 없으십니까?”
“허허. 그냥 김 사장 의견을 말해 봐. 어차피 여기서 제일 똑똑한 건, 우리 김 사장이잖아.”
이진용이 한 번 더 나섰다.
나의 의견이라.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의견은 딱히 없다.
어차피 우리가 쪽수도 많고 실력도 좋다. 그에 반해 오성파와 이창호는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이지 않던가.
엉성하게 전술 같은 걸 쓰는 것보다는 단순하게 밀어붙이는 게 훨씬 좋다.
모든 것에서 우리가 앞서고 있으니까.
“복잡한 방법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냥 이대로 다 같이 밀어 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정말이야? 난 뭔가 다른 의견을 내놓을 줄 알았는데.”
“우리에게 아주 유리한 싸움입니다. 이창호는 궁지에 몰린 상태고요. 괜히 시간을 끌기보다는 한꺼번에 밀어서 깔끔하게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하. 완전히 우리 큰 형님 스타일이네.”
이진용은 주변에 시선을 쭉 돌리며 말했다.
“다들 어때? 오성파 같은 떨거지들을 상대하는 거에는 우리 김 사장이 머리 쓸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짧게 웃음이 터지고 나서 대부분의 간부가 동조했다.
“형님 말씀대로 그렇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냥 싹 밀어 버리고 다 같이 뒤풀이나 하러 갑시다.”
“그려. 자네들 말대로 깨끗하게 끝내자고, 우리.”
또 이렇게 일이 흘러가는 것인가.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진용은 간부들을 휘두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장악력도 좋다.
역시, 이 사람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절대 화진파를 가질 수 없다.
“의견이 다 모였네. 이 정도면 됐지, 김 사장?”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이진용의 미소에 나도 똑같은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예, 형님.”
조금만 기다려라.
그 독사의 혓바닥을 조만간 뽑아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