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129화 (129/325)

129화. 정복 (2)

80~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국군보안사령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며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다.

국가를 위해서라는 명분하에, 죄 없는 사람을 붙잡아 고문하기도 하고 납치에 감금까지 했다. 또한 정부는 국군보안사령부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등, 야당의 인물들을 지속적으로 감시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기 마련이다.

보안사에서 복무하던 윤기령 이병이 본부에 있던 플로피 디스크를 가지고 탈영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는 곧장 언론에 찾아가 플로피 디스크를 넘겼는데, 여기에는 정치, 종교, 노동, 재야 등등… 총 1,303명을 정치 사찰한 기록이 담겨 있었다.

이것이 바로 1990년에 터지는 청명계획 폭로다.

청명계획이란, 만일 친위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방해가 될 만한 민간인들을 붙잡는 것이다. 정치, 종교, 노동, 재야에서 활동 중인 방해자들을 붙잡아 쿠데타를 방해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것.

체포 계획을 만들고 동선을 파악해, 절대 도망가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작전을 짜 놓았다.

윤기령 이병이 청명 계획을 폭로하면서, 대한민국 헌정 사상 제5의 군사 쿠데타가 실행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에휴. 새끼들. 그만큼 해 먹었으면 이제 좀 잠잠해질 때도 됐는데 말이야.”

권용일은 연이어 쏟아지는 기사에 눈살을 찌푸렸다.

화진파가 정식 기업으로 출범하고, 대양 그룹까지 천천히 흡수해 가면서 차츰 그룹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때다. 그런데 화진과 가장 연관이 많이 되어 있는 군부에서 잡음이 나오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아직 화진의 돈줄은 군부가 아니던가?

“그런데 오늘 웬일로 네가 날 다 찾아왔냐?”

권용일은 심통이 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난 익살스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큰 형님. 그래도 화진 그룹을 위해 제가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로 봐 주세요.”

“예끼! 아직도 날 큰 형님이라 부르는 건 너 혼자야. 회장님이라 불러, 인마.”

그러고 보니 권용일이 회장으로 취임한 지 좀 됐다.

그렇다고 해도 화진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조직형 기업으로 점점 변해 가고 있긴 하지만, 화진파의 흔적이 영영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왜 왔어? 용건이나 말해.”

권용일은 시가를 맛있게 빨아들였다. 이 영감은 내가 시간 낭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회장님 얼굴이나 뵈려고….”

“허허. 우리 태산이가 농담도 할 줄 아는구나. 차라리 귀신을 속여라, 이놈아.”

역시, 말을 돌리는 건 여기까지라는 건가.

나는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했다.

“회장님. 아니, 큰 형님. 이제 때가 된 거 같습니다.”

나의 진지한 목소리에 장난기 가득해 보이던 권용일의 표정도 달라졌다.

“뭘 말이냐?”

“화진이 대기업으로 변하기 전에, 일단 아랫바닥에서부터 최고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찝찝하게 쓰레기들을 남겨 두고 갈 순 없죠.”

권용일은 귀신같이 내 말을 알아들었다.

그는 시가를 더욱 깊게 빨아들이다 뱉으며 내게 몸을 기울였다.

“오성파를 말하는 거냐?”

“예, 큰 형님. 미룰 때까지 미뤄왔고, 이제 정리할 때가 됐습니다.”

오성파와 화진파는 서로 으르렁대기만 할 뿐, 아직 이렇다 할 무력행사는 없었다.

맘먹고 전쟁을 벌이게 되면 둘 다 출혈이 크다는 것을 서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미룰 수도 없는 일.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흠….”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또한 오성파와 전면전을 벌이게 될 경우, 화진파도 적잖은 피해를 각오해야 한다.

그렇기에 권용일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태산아.”

“예, 큰 형님.”

“네가 줄곧 오성파 얘기를 꺼내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말을 꺼내는 건…. 설마 이번 정부에서 터진 일과 관련이 있는 거냐?”

역시, 권용일의 눈치는 백 단이다.

그는 뜬금없이 이런 말을 꺼낼 리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오성파를 치는 일과, 이번 청명계획 폭로 사이에는 깊은 연결 고리가 있지 않던가.

난 바로 그것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정부에서 조만간 크게 한 방 터트릴 겁니다. 저희는 그걸 잘 이용해야 하고요.”

“정부에서 터트린다?”

“예. 청명계획이 폭로되면서 지금 여론이 굉장히 좋지가 않아요. 이럴 때 정부에서 쓸 수단이 뭔지 아십니까?”

“그거야….”

권용일은 잠깐 눈을 깜빡이다, 이내 손뼉을 크게 쳤다.

“설마 깡패 소탕이냐?”

“맞습니다. 정부에서 뭔가 잘못을 저지르면, 일부러 시선을 다른 곳에 돌리려고 악을 쓰죠. 이미 저번 정부에서부터 알차게 썼던 방법이지 않습니까?”

정부와 관련된 스캔들이 터지면 우리 같은 조직들이 긴장을 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미지 쇄신을 이유로 정부에서 범죄 조직들을 탈탈 털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걸로 여론을 붙잡겠다는 건데, 사실 이런 고전적인 방법은 예전이나 좀 통했지 지금은 그냥 그렇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번 정부가 수박 겉핥기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저번 정부와는 다르게 강도를 매우 높여 확실하게 붙잡는 것이 이번 정부의 방침이 될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범죄와의 전쟁이다.

노일영 정권은 청명계획 폭로를 덮어 버리기 위해 강도 높은 범죄와의 전쟁으로 수많은 조폭을 감옥에 처넣게 된다.

“그런데 그거야 자주 있던 일 아니냐? 이번에도 뭐 하는 척만 하다가 끝내겠지.”

조금만 있으면 노일영 대통령이 긴급 선언문을 발표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아마 그때 대부분 사람이 권용일처럼 생각할 것이다.

그냥 하는 척만 할 거라고.

하지만 현 정부가 우리의 뼛속까지 드러낼 작정이라는 걸 알게 되면, 저렇게 웃는 얼굴을 보일 순 없을 것이다.

“그때와는 차원이 다른 전쟁이 될 겁니다. 예전과는 그 강도부터가 다르다는 뜻이죠.”

권용일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네 말은, 아예 확 뒤집어 버릴 거다?”

“예. 완전히 솎아 버리려고 작정했을 겁니다.”

이제야 권용일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조직형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는 화진이다. 그런데 이런 악재가 끼어 버리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런 개새끼들.”

평소에 욕을 잘하지 않는 권용일이지만, 오늘은 찰지게도 험한 말을 뱉으며 인상을 썼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보니,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너무 겁만 준 건가. 좀 진정을 시켜 줘야겠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부에서 저 난리를 치고 있어도 우리 화진을 함부로 건드릴 순 없을 겁니다. 오히려 이걸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줄곧 인상을 일그러뜨리고 있던 권용일의 얼굴에 호기심이 일었다.

“기회로 삼는다?”

“예. 일단 제가 정부 쪽에 약을 좀 쳐 놓겠습니다. 그쪽과 타협을 봐서 저희가 오성파를 정리하는 쪽으로 몰아갈 생각입니다.”

“오성파를 미끼로 던지자?”

“어차피 대형 조직을 솎아내려면 정부 입장에서도 부담스럽긴 하겠죠. 그걸 저희가 덜어 주겠다고 권하는 겁니다.”

오성파와 화진파가 전면전을 벌이게 되면, 정부는 이걸 제지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그냥 관망을 하다가 패배한 상대를 모두 잡아간다면?

대형 조직을 소탕했다고 언론에 띄울 수도 있고 별 힘들이지 않고 대형 조직을 하나 없앴으니, 정부 입장에서는 이보다 좋은 거래 제안이 없을 것이다.

맘 같아서는 정부의 힘을 빌어 오성파를 아예 부숴버리고 싶지만,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오성파에 제압은 오로지 화진파의 힘만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뒤처리만 정부에게 맡기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오히려 더 깔끔한 마무리가 될 것이다.

“일단 태산이 네 말대로 해 보자. 먼저 정부쪽 사람들이랑 쇼부를 봐.”

“예, 큰 형님. 확실하게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려. 이거, 오랜만에 우리 애들 다 모아서 한바탕 크게 하겠구먼.”

환갑이 한참 지난 나이인데도, 아직 권용일은 온몸에 피가 끓는 모양이다.

천생 싸움꾼이란 말이 저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지금도 칼 한 자루만 던져주면 혼자서 장정 열 명은 너끈히 쓰러뜨릴 것 같다.

하지만…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권용일의 살날이 말이다.

* * *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나는 이필기와 자주 가던 일식집에서 만남을 가졌다.

요즘 난리가 많아서 그런지, 이필기의 표정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청명계획이 고작 이병 따위에게 폭로 당했으니, 속이 쓰리긴 할 것이다.

어쩌면 이게 가장 큰 문제이지 아닐까?

국군보안사령부는 이번 사건으로 인해 국군기무사령부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그런데 웃긴 건 이들은 절대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국군기무사령부에서는 청명계획을 폭로한 윤기령 이병을 헐뜯는다.

기무사령부에 들어온 간부들에게도 윤기령 이병만 아니었으면 기무사령부의 위상이 위대해졌을 거라고 가르치는 등, 자신들이 저지른 행실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인데, 그게 왜 잘못이냐는 입장이라는 것.

이번 계획 폭로로 인해 국군기무사령부의 힘이 현저히 낮아지긴 하지만, 2008년에 이명구 대통령에 의해 다시금 그 힘이 부활해 민간인 사찰을 하게 된다. 또한 국가 기관을 이용한 언론 조작까지 행해지면서, 그야말로 막장 행보를 보여 준다.

이놈들을 아예 벗겨버리지 않는 한, 이 패악스러운 악행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생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이필기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예. 요즘 난리도 아닙니다. 이게 다 나라의 안보를 위해 했던 일인데, 언론이 너무 극단적으로 표현을 하는 바람에….”

나라의 안보를 위해 했던 일이라.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렇죠. 하지만 어떻게든 이 위기를 벗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제가 알기로는 곧 정부에서 중대한 발표를 한다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이필기의 표정이 싹 달라졌다.

그는 굳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무슨… 발표를 말입니까?”

“모른 척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범죄 집단을 소탕하는 명목으로, 여론의 시선을 돌리려는 거 아닙니까?”

노일영 대통령은 기습적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즉, 자기들끼리만 의논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필기가 저런 얼굴빛을 띠는 것이리라.

“그,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어떻게 알긴.

내가 직접 경험해 봤으니까 아는 거지.

“이거, 좀 섭섭한데요? 제가 그런 걸 뉴스를 통해 봐야 하겠습니까?”

“그, 그게….”

이필기는 매우 심경이 복잡한 표정을 띠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이걸 어떻게 알았느냐를 알아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뭐, 괜찮습니다. 그냥 까먹은 것일 수도 있죠. 제가 그리 중요한 사람도 아니니까요.”

“김 사장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말이에요 어차피 청와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매일 보고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소한 것들까지 알려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필기의 표정이 다시 한번 굳어버렸다.

청와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매일 보고 받고 있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물론, 그냥 블러핑을 쳐 본 것뿐이다. 내가 무슨 수로 청와대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받는단 말인가.

“아무튼, 제가 이렇게 만나 뵙자고 한 건 짐을 좀 덜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차분하게 말하자, 이필기도 당황한 얼굴빛을 감추고 말했다.

“어떤 짐을 말입니까?”

“사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다고 해서 여론이 확 바뀌진 않을 겁니다. 그러나 자극적인 내용을 곁들인다면 어떨까요? 가령… 오성파를 완전 분해하고, 그곳 두목을 붙잡았다는 걸요.”

이필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말씀은 오성파를 잡는 것에 힘을 보태겠다는 겁니까?”

“보태는 정도가 아니죠. 아예 저희가 그 일을 해 드리겠습니다. 군부가 나선다고 하면, 오성파가 요리조리 피해 나갈 수 있지 않나요?”

오성파도 군부에 라인이 깔려 있다.

저번 대선 때 보수에 줄을 대지 않아서 제대로 눈도장이 찍히긴 했지만, 지금은 천천히 신뢰를 회복하는 중이라는 것.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 잘라내는 게 좋다.

“깡패 잡는 칼에는 깡패가 제격이죠. 화진파를 이용해서 오성파를 분해시켜 놓겠습니다. 뒤처리만 해 주시면 깔끔할 겁니다.”

이필기는 힐끗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이거, 또 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역시, 내 제안이 결코 나쁘지 않다는 걸 이필기는 알고 있는 것이다.

대형 조직을 치는 일만큼 피곤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 수고스러움을 내가 대신 해 주겠다고 하니 보이는 행동이다.

나는 그에게 잔을 받으며 똑같이 미소를 보였다.

괘씸한 새끼.

하지만 너도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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