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마무리 되는 88. (2)
“윤아… 씨?”
권윤아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응? 태산아. 신입생이랑 아는 사이야?”
내 옆에 앉아 있던 박채린이 의심 어린 눈초리로 나와 권윤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런데 뭐?
신입생이라고?
“윤아 씨가 왜 신입생으로….”
권윤아는 내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이번에 1학년으로 입학한 신입생 권윤아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오오오-!”
당연히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물론, 남자 쪽만.
여자 쪽에서는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자리에서 일어나 몇몇 사람들에게 술을 받고 있는 권윤아에게 다가갔다.
“윤아 씨.”
“아! 태산 씨도 한 잔 줄까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갑자기 여기는 어떻게…. 거기다가 신입생이라니요?”
“호호. 우리 태산 씨. 분위기도 참 못 읽으신다. 이럴 땐 일단 마시고 보는 거예요.”
권윤아는 마치 이런 게 익숙하다는 듯 내게 잔을 주고 술을 채워 주었다.
가면 갈수록 알 수 없는 여자다.
“윤아야! 나도 한 잔 주면 안 돼? 너무 태산이만 챙기는 거 아니야?”
“놔둬. 김태산이 우리 과에서 제일 인기 많잖아.”
동기들의 말을 들은 권윤아의 눈빛이 달라졌다.
“정말이에요? 우리 태산 씨 설마 매일 여자 만나고 그러는….”
난 얼른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절대 아닙니다.”
사실은 사실이지 않은가.
학교 온 것도 백 년 만인 거 같은데.
“으음. 속는 셈 치고 한번 믿어보겠어요.”
권윤아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각 테이블을 돌아다녔다.
체력도 좋고 술도 잘 마시고, 거기다가 사교성도 좋아서 금세 친구들을 여럿 만드는 것 같았다. 나와는 정말 정반대의 사람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차가운 반응을 보였던 여학생들도 점차 권윤아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나저나 권윤아가 도대체 어떻게 천강 대학교의 신입생으로 들어온 것인가.
미국에서 대학을 잘만 다니고 있는 줄 알았더니.
설마 때려치우기라도 했나?
그 명문대를…?
권용일이 이 사실을 알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
* * *
“모두 안녕히 가세요!”
“윤아야! 또 봐!”
“오빠가 밥 사 줄 테니까, 꼭 시간 한번 내줘! 꼭이다!”
모임이 끝날 때까지 권윤아는 슈퍼스타 그 자체였다.
워낙 미모가 예쁜 이유도 있고, 활발한 성격이라 그런지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것 같았다.
난 그녀가 열렬한 구애 속에 손을 흔드는 것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그때 박채린이 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태산아! 그런데 너 왜 윤아랑 같이 가는 거야? 우리랑도 같이 가면 안 돼?”
“으응? 아. 그게….”
박채린의 의도적인 질문에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조금 난감한 상황인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잠깐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권윤아가 내 팔에 손을 넣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다들 모르시겠구나. 저랑 태산이, 예전부터 사귀는 사이였어요. 그러니까 태산이한테 눈독 들이시면 안 돼요?”
“뭐?!”
“정말이야?”
남학생들은 탄식을 터트리며 머리채를 부여잡고 절규했다. 몇몇 여학생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권윤아는 분위기가 더 이상해지기 전에 나를 끌고 갔다.
“그럼, 저희 먼저 가볼게요!”
순식간에 모임을 초토화해 버린 권윤아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우리 이제 뭐 할까요?”
“저기 윤아 씨. 갑자기 그렇게 터트려 버리시면….”
“왜요? 우리 사귀는 사이 아니었어요?”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고….”
권윤아는 내게 꼭 달라붙으며 말했다.
“남자친구라는 사람이 오지도 않고, 연락도 뜸하고… 기다리기만 하는 내가 바보 같기도 해서 그냥 확 다 던져 버리고 와버렸어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혼자 앉아서 애태우고 있는 거라서요.”
왠지 뜨끔했다.
요즘 일이 좀 많았어야지.
권윤아에 대해서 아예 잊어버리기까지 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죄송합니다. 제가….”
“알아요. 일 많다는 핑계를 대겠죠. 남자들은 다 그렇게 똑같은 레퍼토리를 쓰나 봐요?”
“그, 그게 아니고….”
“그럼 뭔데요?”
난 다시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뭐가요?”
“예?”
“뭐가 죄송하냐고요.”
이런…. 그 공포의 무한루프에 이렇게 빠지는 것인가.
하지만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권윤아가 깔깔 웃으면서 내 어깨를 세게 쳤다.
“왜 그렇게 긴장을 해요. 장난 한번 쳐 본 거뿐인데. 그리고 태산 씨가 아주 바쁜 남자라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또 여자한테는 일절 관심이 없다는 것도요. 그래서 제가 안심을 하고 있었던 거기도 해요.”
“그럼….”
“미국에서 다니던 대학은 이미 조기 졸업했어요. 그리고 제가 일찍 대학을 들어간 터라 남들보다 더 빠르게 졸업을 하기도 했죠.”
벌써?
그러고 보니 권윤아가 몇 학년이었더라.
그런 사소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아름 언니는 졸업식에 왔었는데, 누구는 끝까지 오지도 않더라고요.”
“…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우리 태산 씨가 바쁘다는 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으니까요.”
왠지 말에 가시가 있는 것 같다.
나는 권윤아의 눈치를 보며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솔직히 나도 여자인지라 안 삐지면 정상이 아니죠.”
“제가 뭘 해드려야 윤아 씨 기분이 풀릴까요?”
“흠. 싸게 먹힐 만한 건수가 아닌데….”
제발 권윤아가 이런 거에는 권용일을 닮지 않았기를 기도했다. 그 지독한 영감이었더라면, 이걸 빌미로 죽을 때까지 날 부려 먹었을 거다.
“아! 닭갈비 사줘요!”
“예?”
“저번부터 제가 그랬잖아요. 태산 씨 어머니가 만드시는 닭갈비가 꼭 먹어보고 싶다고.”
어머니가 닭갈비 장사를 하신다는 걸 듣고 그때부터 권윤아가 닭갈비 노래를 불렀던 것 같은 기억이 있다.
이 정도면 싸게 먹히는 건가.
“예. 그럼, 우리 2차로 닭갈비를 먹으러 가죠. 제가 확실하게 대접해 드릴게요.”
지금쯤이면 어머니가 아직 가게에 계시려나.
권윤아를 소개해 드린 적은 한 번도 없는데. 거기다가 내가 연애를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계신다.
사실, 내가 연애를 하고 있긴 한 건지 의문이 든다. 그래서 권윤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어서 오세요. 응? 태산이 아니냐?”
과연 어머니는 아직도 가게에 계셨다.
“아직 퇴근 안 하신 거예요?”
“응. 오늘 일손이 부족해서 나왔지. 그런데 옆에 있는 어여쁜 아가씨는….”
어머니는 내 옆에 착 달라붙어 있는 권윤아를 보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셨다. 권윤아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어머니에게 달려가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태산 씨, 여자친구 권윤아라고 합니다.”
“으응? 우리 태산이 여자친구라고?”
“예, 어머니. 잘 부탁드려요.”
“아이고. 오히려 그건 내가 할 말이죠.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우리 태산이 여자친구라니.”
섭섭해하시면 어쩌나 싶었는데, 의외로 굉장히 좋아하셨다.
어머니는 윤아 씨의 손을 꼭 붙잡고 고맙다는 말을 하며 자리에 앉혔다.
“우리 아가씨. 맛있는 거 해 줄 테니까 많이 먹어요. 알겠죠?”
“어머니. 너무 많이 하지 않으셔도 돼요. 오늘 과모임이 있어서, 저희 오늘….”
내 입을 권윤아가 얼른 막으며 대신 말했다.
“예, 어머니.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어머니는 흡족한 얼굴로 주방에 들어가셨고, 나는 권윤아에게 괜찮냐는 눈빛을 보냈다.
우리 어머니 손이 얼마나 크신데.
“그런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먹는 척이라도 해야죠.”
“그렇긴 한데….”
“자. 2차 왔으니까, 다시 한 잔 줘요. 소주로!”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태산 씨가 있으니까 취해도 괜찮죠. 설마 제가 취했다고 무슨 짓을 할 사람도 아니잖아요, 태산 씨는. 그렇죠?”
나는 피식 웃으며 권윤아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녀는 안주도 없이 잔을 잘만 넘겼다.
미국에서도 느꼈지만, 주량이 굉장한 거 같다.
“그런데 태산 씨. 학교에서 인기가 정말 많은 거 같아요. 여학생들 사이에서 아주 뜨겁던데.”
하마터면 나는 마시던 술을 뿜을 뻔했다.
난 억지로 술을 꿀꺽 삼킨 뒤 잔을 내려놓았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
“후후. 아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다니셨던데. 도대체 뭘 하고 다녔던 거예요, 그동안?”
“오해입니다.”
“정말요? 여학생들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양아치 같은 놈 하나를 제대로 손봐 줬다면서요?”
“그건…. 아무튼, 그것도 오해입니다.”
“호호. 어떤 여자애는 그러더라고요. 태산 씨가 여의도에서도 알아주는 재력가라는 걸 알고, 아빠가 잘해 보라는 말까지 했다고. 아주 매력을 풀풀 풍기면서 다니셨나 봐요?”
“….”
권윤아는 몰아치듯 나를 공격하며 마지막에 결정타까지 날렸다.
“그래서 나한테 연락 한 통이 없었던 건가. 졸업식도 안 오고….”
“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렴요. 그렇겠죠.”
역시, 아까로 끝난 게 아니었다.
사실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러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아 나는 얼른 화제를 옮겼다.
“근데 갑자기 이렇게 오셔도 되는 거예요? 큰 형님께서 아시면….”
“흐응. 왠지 억지로 화제를 돌리는 거 같은데. 이런 식으로 끝나지 않아요.”
“오, 오해이십니다.”
“호호. 아버지는 당연히 알고 계시죠. 오히려 좋아하시던데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고삐를 확!”
권윤아는 내 코앞에서 주먹을 빙 휘두르며 말을 이었다.
“붙잡으라고요.”
고삐를 붙잡는다라.
그게 무슨 뜻이겠는가?
나를 꽉 붙잡아 놓으라는 것이다.
역시, 그 아빠에 그 딸이다.
권용일의 피를 받았으니, 그 막무가내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아가씨. 오래 기다렸죠?”
“아! 어머니. 여기 앉으세요. 그렇지 않아도 어머니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이고. 미안해요. 자자 차린 건 별로 없지만, 이거라도 들어요.”
어머니는 금방 닭갈비를 요리해 오신 뒤 철판 위에 깔아주었다.
지글지글 익는 닭갈비 냄새에 배부르던 배가 순식간에 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 맡아봐도 맛있는 냄새다.
권윤아도 나와 비슷한 걸 느꼈는지, 눈을 반짝이며 닭갈비를 바라보았다.
“제가 어머니 닭갈비를 꼭 먹고 싶었거든요.”
“그래요?”
“예. 태산 씨가 미국에서 얼마나 어머니의 닭갈비를 칭찬하던지….”
어머니는 힐끗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미국?”
“어머. 설마, 태산 씨가 한 마디도 말씀 안 드린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가!”
“말도 말아요. 태산이 저놈이 제 어미 얼굴도 잘 안 본다니까요? 가끔 내 아들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니까.”
“진짜요? 우와. 태산 씨.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권윤아는 과하게 리액션을 하며 어느새 어머니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저도에요, 어머니. 미국에 혼자 저를 내팽개쳐 두고 연락 한 통 없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너무 화가 나서 한국까지 쫓아온 거 아니겠어요?”
“어이구. 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우리 태산이가 몹쓸 짓을 했구먼!”
“거기다가 학교에서는 얼마나 흘리고 다녔는지, 여학생들 사이에서 아주 말이 많더라고요.”
오해할 만한 소지가 충분히 있는 말들이었다. 내가 언제 흘렸다고….
하지만 어머니는 나를 완전 천하의 나쁜 놈으로 바라보시며 권윤아를 위로해 주셨다.
“우리 아가씨한테 내가 다 미안하네. 내가 교육을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저런 남자를 제가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게 문제죠.”
“아이고. 고마워요, 아가씨. 저런 놈이라도 좋아해 줘서.”
“괜찮아요. 이제 어머니도 있으니까요. 제 편, 해 주실 거죠?”
“그럼! 언제든 와서 말해요. 내가 태산이 저놈, 아주 혼구녕을 내 줄 테니까.”
나를 나쁜 놈으로 몰아가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어머니를 든든한 아군으로 만들었다.
그동안 김아름처럼 무서운 여자는 더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오늘로 그 생각이 바뀌었다.
정말 무서운 여자는 권윤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