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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120화 (120/325)
  • 120화. 엎드린다. (1)

    이철호와 원만하게 대화를 끝낸 뒤, 나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강혁 그놈, 이철호가 나설 일은 절대 없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막상 이철호가 나를 호출하자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역시, 그런 놈을 신뢰해 봤자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넥타이를 풀고 자리에 앉아 동욱이에게 말했다.

    “이제 용우 건설 쪽은 손 떼도 괜찮겠다. 애들 다 철수 시켜.”

    이미 박살 난 곳이다. 구태여 더 건드려봤자 나올 것도 없기에 철수를 시키는 것이다.

    “예, 형님. 그런데… 형님께서 자리를 비우고 계셨을 때 전화가 한 통 왔었습니다.”

    “어디에서?”

    “용우 건설 사장, 이강찬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제쯤 연락이 언제 오나 싶었는데, 결국 전화를 걸었던 건가.

    하긴. 그동안 전화하지 않고 있던 게 신기할 정도다.

    “그럼, 내가 다시 전화를 걸어줘야 하는 건가?”

    “더 기다려 보시죠. 급한 쪽에서 연락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나는 동욱이의 말에 따라 수화기를 다시 내려놓았다. 동욱이 말대로 급한 놈이 연락을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바로 그때, 조직원 하나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형님. 이강찬이란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전화를 안 받으니, 아예 쳐들어온 것이다.

    난 피식 웃으며 동욱이와 눈을 마주쳤다.

    “급하긴 더럽게 급했나 보다, 동욱아.”

    “어떻게 할까요? 형님께서 불편하시면 그냥 쫓아내는 게….”

    “그럴 수 없지. 나와는 돈독한 사이를 유지해야 할 아군인데. 정중히 안으로 모셔라.”

    “예, 형님.”

    동욱이가 나가고 얼마 안 있어, 초췌한 모습으로 이강찬이 사무실 안에 들어왔다.

    맘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게 훤히 보일 정도였다.

    “어서 오세요, 실장… 아니. 이제 사장님이시군요.”

    비록 초췌하기 그지없는 모습이긴 하나, 나를 바라보는 이강찬의 눈빛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화가 단단히 난 게 분명하다.

    “저번에 뵙고 꽤 오랫동안 뵙질 못했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천연덕스럽게 먼저 내가 말을 걸자, 이강찬은 가시 돋친 말로 대답했다.

    “잘 지내려고 노력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제대로 수렁에 빠뜨리더군요.”

    “그랬습니까? 이런…. 그런 안타까운 일이.”

    인내심에 한계가 왔는지, 이강찬은 눈을 부릅뜨고 내게 언성을 높였다.

    “김태산 씨! 나는 당신을 내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큰 형님과 손을 잡고 제 뒤통수를 칠 줄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생각보다 이런 일에 이강찬이 냉정하지 못하다.

    속에 얼음처럼 차가운 것만 가득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아직 성장 단계에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 걸까.

    “이강찬 사장님.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시는군요.”

    “…예?”

    “제가 언제 사장님 편이라고 했습니까? 제가 한 번이라도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있던가요? 난 누가 뭐래도 이강찬 사장님의 편이라고 말입니다.”

    “그, 그건….”

    “착각하지 마세요. 전 제 이익을 쫓아 간 것뿐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이강찬 사장님도 다른 건 없을 텐데요? 사장님이 설마 인간적으로 저를 좋아해서 손을 잡은 건 아니지 않나요?”

    말을 하려면 똑바로 하라는 것이다.

    이강찬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참는 듯, 짙게 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그건 곧 저와 화해할 여지가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이지요.”

    내가 너무 꼬집기만 한 건가.

    이제 이 양반을 살살 다독여 줘야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이강찬을 붙잡았다.

    “뭘 그렇게 서두르세요? 일단 앉으세요.”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됩니다만…. 이미 용우 건설은 김태산 씨 덕분에 끝났습니다. 회생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살길을 열어 주려는 거 아닙니까?”

    이강찬은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다, 이내 자리에 다시 앉았다.

    이왕 속은 거, 한 번 더 속아보겠다는 심산이다.

    “이강찬 사장님. 솔직하게 묻겠습니다. 사장님은 천성 그룹의 회장이 되고 싶은 거죠?”

    내 물음에, 이강찬은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아버지의 아들 중, 그런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죠. 하지만 정말 천성 그룹의 회장실을 갖고 싶다면, 방법부터 바꾸셔야 할 겁니다.”

    “…방법이요?”

    그제야 흥미를 드러내는 이강찬이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 이강혁 부회장에게 대항하기 보다는, 지금은 스스로 타협하며 엎드려 있는 게 최선이라는 거죠.”

    큰 형한테 개기지 말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으라는 말에, 이강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를 설득하려는 겁니까? 형님한테 영원히 대항하지 못하게? 나중에 형님이 죽고 나면 그때 회장직을 이어받아라, 뭐 이런 소립니까? 우리 큰 형님이 저한테 그 자리를 넘길 거로 생각하세요?”

    이런. 말귀를 전혀 못 알아듣고 있군.

    “그런 말이 아닙니다. 지금은 이강혁 부회장한테 복종하는 자세를 보이며,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겁니다. 혹시, 삼국지에 나오는 사마의를 아십니까?”

    이강찬이 왜 사마의를 모르겠는가.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니, 삼국지의 최종 승리자인 사마의가 누군지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이강찬에게 붙게 되는 별명이 바로 ‘사마의’이지 않던가?

    “그건 왜….”

    “사마의가 되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금은 바짝 엎드리고 계세요. 어차피 지금 사장님의 힘으로는 절대 부회장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럼, 도대체 언제까지 참으라는 겁니까? 수십 년을 참고 참아 여기까지 왔는데.”

    “제 말이 바로 그겁니다. 수십 년을 참았으니, 좀 더 참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이강찬은 내 말을 듣고 느끼는 바가 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 오랜 시간 참으라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저도 이강찬 사장님의 마음처럼, 부회장 이강혁이 천성 그룹의 회장 자리를 갖는 건 원치 않습니다.”

    “정말입니까?”

    “예. 저는 누구보다도 이강찬 사장님이 그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요.”

    줄곧 굳은 인상을 쓰고 있던 이강찬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혹시 또 이런 거로 저를 속이시는 건….”

    “하하. 섭섭한 소리 마세요. 그리고 제가 언제 사장님을 속였다는 겁니까? 전, 사장님을 한 번도 속인 적 없습니다.”

    내가 이강찬을 속인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게 맞다.

    그냥 이강찬이 그렇게 느낄 뿐이지.

    “그런데 왜 큰 형님을 도와 용우 건설을….”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지금은 아무리 이강찬 사장님이 발버둥을 쳐도 절대 부회장을 이길 수 없다고요. 정면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강찬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이강혁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난 그 해답을 알고 있다.

    “오늘 여기를 나가게 되시면, 이 길로 가서 이강혁 부회장에게 엎드리세요. 충실한 개가 되겠다는 맹세라도 하시라는 겁니다.”

    “기, 김태산 씨!”

    “그깟 자존심이 무에 대수란 겁니까? 나중에 회장 자리를 꿰차게 되면 그때 이 수모를 갚아 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싫으세요? 천성 그룹 회장 자리가 그리 쉽게 얻어지는 거였다면, 굳이 제 도움이 필요할까요?”

    이강찬은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제 말대로 하세요. 지금은 이강혁 부회장에게 엎드려야 합니다. 그가 하는 말은 전부 따르세요. 그리고 때가 올 때까지 칼을 갈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강혁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죽기보다 더 싫을 것이다. 하지만 이강찬이 이강혁을 짓밟고 올라가기 위해서는 바짝 엎드려야 한다.

    그래야 이강혁의 마음을 얻고, 그의 등 뒤에 비수를 꽂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정말 그 방법밖에는 없는 겁니까?”

    “예. 이강찬 사장님이 이강혁 부회장의 측근이 되셔야 합니다. 그 사람도 워낙 의심이 많아 완전히 측근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에 근접은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야만 기회가 옵니다.”

    “어떤 기회가 온다는 겁니까?”

    “그 기회는… 제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도 지금은 이강혁 부회장에게 바짝 엎드리고 있는 상황이라서요.”

    내 말에 이강찬은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그 기회를 위해서 말입니까?”

    “예. 바로 그 기회를 위해서요. 이강혁 부회장을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바로 그 기회를 잡기 위해서.”

    “그렇… 군요.”

    그제야 나에 대한 의심을 전부 풀었는지, 이강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태산 씨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말씀드렸잖아요. 천성 그룹 회장 자리에 이강혁이 앉고 있는 꼴은 못 보겠습니다.”

    “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한결 더 가벼워지네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건넸다.

    “앞으로도 이 관계가 깨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당연하지. 그러니까 내가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물론입니다, 사장님.”

    나는 그런 이강찬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는 이강찬의 손길에서 그의 결의를 느꼈다.

    “저는 이 길로 큰 형님께 갈 겁니다. 가서, 김태산 씨가 조언해 준 대로 따를 생각입니다.”

    천하의 이강찬이 이강혁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라-.

    그 광경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게 좀 아쉽긴 했다.

    “예. 제가 말한 바로 그 때가 오기 전까지는, 갖은 수모를 견디셔야 할 겁니다. 하지만 그리 긴 시간이 되진 않을 거예요. 제가 약속드리죠.”

    “제가 언제 김태산 씨의 말을 믿지 않은 적이 있던가요. 이번에도 믿겠습니다.”

    그렇다면 나야 땡큐지.

    나락으로 빠진 이강찬이 더욱 나를 의지한다는 건, 내가 원하는 그림이지 않던가.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천성 그룹. 그 천성 그룹을 지배하는 회장. 그리고 그 회장을 지배하는 사람, 김태산.

    이것이 내가 그리고 있는 로드맵이다.

    그리고 로드맵은 이미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 * *

    여의도를 빠져나온 이강찬은 차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

    “천성 본사로 가지.”

    “예, 사장님.”

    그는 회사로 돌아가는 동안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너무 깊이 생각에 빠져 있는 탓에, 회사에 도착해 비서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도착했다는 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차에서 내려 부회장실까지 올라가는 동안 심호흡을 여러 번 이어 갔다.

    그 역겨운 양반의 얼굴을 봐야 한다는 것부터가 고역이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 천성 그룹의 최고가 될 수만 있다면 어떠한 수모도 각오한 상태다.

    30분가량을 기다리고 부회장실로 들어간 이강찬은, 이강혁의 조롱 섞인 인사를 받았다.

    “네가 여기까진 무슨 낯짝이냐?”

    벌써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강찬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형님 얼굴이나 보러 왔죠.”

    “회사에서는 호칭 좀 제대로 할까?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이 사장.”

    “아.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오늘따라 유독 고분고분한 이강찬의 모습에 이강혁은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제대로 한 방 맞아 넉다운 된 상태이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네가 내 방에 다 찾아오고.”

    이강찬은 잠시 말이 없다, 이내 큰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부회장님. 저도 이제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응? 뭐를?”

    “사장인 제가, 가족으로서 부회장님을 잘 보필했어야 했는데…. 욕심이 지나쳤었나 봅니다.”

    이강혁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능청스럽게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우리 똑똑하신 이강찬 사장님이 왜 이러실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든 거야?”

    “부회장님. 아니, 형님. 내가 욕심 다 버릴게. 이제 형님과는 그만 싸우렵니다.”

    “그 말은… 더는 욕심을 갖지 않겠다?”

    “이미 벼랑 끝에 몰려있는 상태이지 않습니까? 회장님도 절 아예 내다 버리신 거 같고.”

    용우 건설이 그 꼴이 났는데도 이철호 회장은 그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없는 상태다. 그건 곧 이강혁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이지 않은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헛된 욕심은 버렸지만, 내 살길은 열어야 하지 않겠어? 형님을 보좌하면서 나름 살길을 열어 보려고요.”

    회장 자리는 깨끗하게 포기할 테니,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먹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강찬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마지막 못을 박았다.

    “이건, 형님의 동생으로서 하는 부탁입니다. 옆에서 형님을 열심히 보좌할 테니까. 형님이 이 천성의 주인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돕겠소. 가족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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