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몇 없는 VVIP (3)
천성 그룹 회장실에 가는 건 참 오랜만이다.
지금쯤 분노로 얼굴을 붉히고 있을 이철호의 표정이 어떨지 궁금하긴 하다.
사실, 천성 그룹 회장실을 갈 때마다 나는 이런 상상을 해 본다.
만일 내가 천성 그룹의 회장이라면 어떨까.
어떤 삶을 살게 될까?
한 가지 확실한 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 나라에서만큼은.
천성 공화국이란 이름이 괜히 붙여진 게 아니지 않은가?
이강찬이 회장직을 맡으면서 천성 그룹이 몇 배로 성장하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것을 가능케 한 사람이 바로 이철호다.
그는 오래전부터 이 나라에 씨앗을 뿌려, 천성 장학생이라는 명분으로 각 행정 기관에 천성의 사람들을 심어 놓았다. 그리고 그들의 힘을 이용해 천성 그룹을 키운 것이 바로 이강찬이다.
법조계까지 점령당한 이상, 천성을 감당할 수 있는 정치계 인물은 없다. 그건 앞으로도 영원히 바뀌지 않는 불편한 진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발상은 어떨까?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천성 그룹. 그런 천성을 지배하는 그룹 회장. 그리고 그 회장을 지배하고 있는 한 사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권력이 아닐까?
천성 그룹의 회장을 지배하는 것만큼 강력한 무기가 또 어디 있겠는가.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나는 회장실 안으로 들어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왕의 그것처럼, 널찍한 소파에 앉아 있던 이철호는 심기 불편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뭐라도 하나 집어 던질 줄 알았더니. 나름대로 참는 모양이다.
“여전히 신수는 더럽게 훤하네. 그만 일어서 있고, 자리에 앉지?”
첫 마디부터 매우 날카롭다. 하지만 난 웃음을 잃지 않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마실 건 바라지도 마. 네 면상 보면서 뭐 마실 기분 아니니까.”
“화가 많이 나신 것처럼 보이네요.”
“안 나면, 그게 정상이냐? 솔직히 말해서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벌였는지 모르겠다. 우리 천성이 그렇게도 우스운 거냐?”
“그럴 리가요. 우습지 않기 때문에 그런 짓을 벌였던 겁니다.”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던 이철호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또 뭔 소리야? 우습지 않기 때문에 그런 짓을 벌였다니?”
“전 천성 그룹과의 관계를 항상 원만하게 이끌어 가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차기 회장으로 유력하신 분이 도와 달라 부탁을 하는데, 그걸 거절할 순 없지 않습니까?”
이철호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아니. 이미 그는 내가 이강혁과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완전히 강혁이한테 붙은 거냐?”
“대세를 따를 뿐입니다.”
“하하. 그 대세라는 거 말이다. 내 말 한마디면 금방 꺾어버릴 수 있어. 아무리 강혁이가 부탁하더라도 용우 건설은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자기 자식새끼가 하고 있는 사업을 망쳤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인가, 아니면 자기의 계획을 방해했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인가.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어디 한 번 더 건드려볼까?
“그래서요?”
“…뭐?”
“그래서 회장님께서는 무슨 벌을 저한테 주시려는 겁니까?”
단도직입적인 나의 말에, 이철호의 안면이 꿈틀거렸다.
“뭔가 보복을 하려고 하셨다면, 저를 이곳에 불러내기보다는 행동에 옮기셨겠죠. 그런데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 뜻은… 이미 알고 계신 거 아닙니까?”
나의 도발에 이철호는 당황하지 않고 내게 되물었다.
“뭐를 말이냐?”
난 편안한 자세로 등을 소파에 기대며 말했다.
“이 나라에 몇 없는 VVIP 중 하나가 바로 저라는 것을요.”
그제야 이철호의 얼굴이 싹 굳어 버렸다.
이철호는 노일영과의 내 관계를 분명히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으리라.
국정원에 버금간다는 천성의 정보력이지 않은가.
그동안 모른 척하며 일관하던 이철호가 포커페이스를 풀며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넌 언제 봐도 재수 없는 놈이다.”
이제부터는 서로 가식적인 모습을 버리고 제대로 대화를 하자는 신호탄이었다.
지금 당장은 서로서로를 건드릴 수 없는 위치이지 않은가.
비등한 관계일수록 대화는 깊어져만 간다.
“이번 용우 건설 일은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전 천성 그룹과 원만한 관계를 이끌고 싶습니다.”
“그 말은… 용우를 건드리기 전부터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는 건가?”
“예. 물론입니다. 세상 누구보다도 천성 그룹 회장님의 눈 밖에 나기는 싫으니까요.”
이철호는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며 내게 물었다.
“그게 뭔데?”
“노일영 대통령에게 이미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조만간 신도시 계획이 나올 겁니다.”
“신도시 계획?”
“예. 아직 구체적인 개발 계획을 밝히진 않았지만, 오래전부터 그곳을 점 찍어 둔 건 확실합니다.”
분당 신도시 계획은 노일영 정권이 출범되면서 정식적으로 시작한 첫 신도시 개발이다.
1974년, 박 전 대통령이 분당·판교 지역을 지나면서 앞으로 요긴하게 쓰일 땅이니 개발하지 말고 보존하라는 말을 남겼다.
그로 인해 1976년부터 1989년까지, ‘남단 녹지’라는 이름으로 분당과 판교 지역이 개발제한구역으로 설정된다.
그래서 지금도 논과 밭이 주변에 가득하고, 소규모 공장들이 들어선 상태.
바로 이곳을 노일영이 개발하게 된다.
“잘 아시겠지만, 이번 개발 목적은 어디까지나 논공행상에 있습니다. 자기 새끼들한테 밥그릇 챙겨 주겠다는 심산이겠지요.”
정부에서 추진하는 신도시 개발은 대부분이 논공행상이다.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 신하들에게 왕이 상을 주는 것이다.
개발 발표가 나기 전에 땅을 사놓게 하면, 꽤 큰 이득을 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때 눈치 없이 땅을 사려고 하는 기업이 있다면, 정부한테 단단히 미운털이 박힐 수 있어서 웬만한 기업들은 함부로 땅 투기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발에 참여할 순 있지 않겠는가?
“신도시 개발을 진행하게 되면, 사실 저희 화진 건설을 내세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저지른 잘못이 있으니, 신도시 개발은 전부 천성 그룹에게 넘기겠습니다.”
이철호는 재밌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 인심 쓰는 듯이 말을 하는 것 같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고집 한번 부리기 시작하면 신도시 개발… 완전히 쪼개져서 천성 그룹에 넘어가는 일도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지금 협박하는 거냐?”
“그럴 리가요. 현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간당간당한 줄타기 속에, 이철호는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우기보다는, 회사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지 않은가.
그는 내 제안이 결코 나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신도시 개발…. 그 정보가 나한테 넘어오기도 전에 먼저 너한테 갔다, 이거지?”
자기도 모르는 정보를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제가 그런 쪽에는 좀 귀가 밝아서요.”
내 대답에, 이철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리턴 컴퍼니. 그게 정말 존재하긴 하는 거냐?”
역시, 이 양반도 리턴 컴퍼니를 알고 있다.
내가 노일영에게 접근한 건 화진의 신분이 아닌, 리턴 컴퍼니의 신분이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의문형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이철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순순히 말해 줄 순 없다, 이건가?”
“딱히 말씀드릴 건 없습니다. 회장님이 리턴 컴퍼니에 대해 조사를 면밀히 해 보셔도, 이렇다 할 결과는 없을 겁니다.”
이철호의 표정을 보니, 이미 해 본 모양이다. 하지만 내 말대로 이렇다 할 성과는 분명히 없을 터.
왜냐하면, 애초에 리턴 컴퍼니는 서류만으로 존재하는 곳이 아닌가? 하지만 내가 열심히 포장해 놓은 덕분에, 사람들은 이곳이 무슨 비밀조직이라도 되는 것마냥 경계하고 있다.
이철호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분명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막상 조사해 보면 나오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것도 천성의 정보망을 전부 동원했는데도.
아무리 이철호라도 정체를 모르는 존재에 대한 의구심과 두려움을 품을 수밖에 없으리라.
“네 말은 사실이겠지? 신도시 개발은 우리 천성에게 모두 넘긴다는 거?”
“물론, 대마 그룹이 끼어들 순 있겠으나 그건 회장님이 알아서 해결해 주셔야 할 겁니다.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최고의 건설사는 대마 건설이지 않습니까?”
“그쪽은 괜찮아. 노일영 정권한테 한번 찍혔거든.”
대마 그룹은 대선 때 노일영을 버리고 진보를 택했다가 제대로 피를 보게 된다. 그로 인해 대마 그룹이 갈가리 찢어지는 경험을 겪지 않던가.
자식새끼들이 서로 왕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난리를 피운 것도 있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정부의 입김이 크기도 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신도시 쪽은 쳐다보지도 않을 겁니다.”
이철호는 의외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용우 건설은 겁도 없이 건드렸으면서, 왜 신도시 개발은 그냥 넘겨주는 거냐? 무슨 꿍꿍이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천성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이끌어 가고 싶다고요.”
“개소리는 그만하고.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권용일 그 영감이 가만있을 거 같아?”
틀린 말은 아니다.
권용일을 쏙 빼고 나 혼자 이철호와 쇼부를 보고 있으니까.
하지만 화진파가 제대로 성장을 꾀하기 위해서는 건설업보다 다른 곳에 집중해야 한다. 어차피 건설업은 조만간 쪽박을 차게 되지 않던가.
한때 건설업이 최고로 잘 나갔지만, 곧 시대가 바뀐다.
빈집들이 줄을 지어 나오게 될 것이고, 건설업은 곧 빚더미에 앉게 되는 지름길이라는 걸 많은 대기업이 깨닫게 될 터.
건설보다는 금융업에 손을 대는 게 훨씬 더 이득이라는 것을 알고 많은 기업이 주력 사업을 그쪽으로 전향하게 된다.
천성도 신도시 개발 때만 재미를 좀 보다가 나중에는 도저히 건설업을 이끌어 갈 수가 없어, 최소한의 모습만 갖춰놓고 건설 쪽에는 손을 뗀다.
어음으로 돌아올 건설업에 내가 왜 흥미를 갖겠는가?
지금 내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곳은 건설업이 아닌, 바로 화학사다.
“화진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건설보다 다른 곳에 치중하는 게 나을 거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아시다시피 저희가 군부 쪽과 연관이 깊지 않습니까? 그걸 장점으로 회사를 성장시키면 되죠.”
이철호는 내 말을 금방 알아들었는지 음흉한 미소를 보였다.
“화학 쪽으로 가겠다는 건가?”
“예. 그쪽 사업에 전력을 다할 겁니다.”
“허허. 우리 장병들이 앞으로 더 고생을 하게 생겼구먼.”
기업과 장성들 간에 오고 가는 어마어마한 방산 비리. 그리고 그 피해는 강제로 군에 차출되는 젊은이들에게 고스란히 넘어간다.
멀쩡할 땐 내 자식, 다치면 남의 자식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국방부가 은연중에 내거는 좌우명과도 같은 말이다.
“뭐…. 이렇게 된 거 술이라도 한잔 먹고 가라.”
이철호는 내게 술잔 하나를 건넸다.
처음에는 분위기가 험악했지만, 이것으로 서로에 대한 오해를 전부 풀었다는 신호다.
이로써 이철호는 더 이상 용우 건설에 대한 일로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용우 건설을 맡아 본격적으로 날개를 펴려 했던 이강찬만 똥을 밟은 셈이다.
“우리 강찬이가 누구를 아주 많이 원망하고 있겠어.”
지금쯤이면 용우 건설 사장, 이강찬도 나의 개입을 알게 되었을 터.
평생의 동지라고 여겼던 사람한테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으니 그 충격이 꽤 클 것이다. 누구보다도 내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보이던 사람이지 않았던가.
난 이철호가 따라주는 잔을 받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원래 세상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는 것 말입니다.”
이철호는 또 그걸 시원하게 받아 주었다.
“하하. 네가 내 아들들보다 훨씬 낫다. 원래 세상이 다 그런 거지.”
말은 그렇게 해도 술을 넘기는 이철호의 표정은 썩 밝아 보이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