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왕과의 만남 (4)
마약으로만 벌어들이는 금액이 연 수백억 달러에 이르는 거대 조직, 메데인 카르텔.
파블로 에스코바르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마약 조직 두목들이 전부 모여, 그를 제왕으로 받들었다. 그로 인해 그는 콜롬비아에서 제1의 재벌이 되었고, 자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자랑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
지금 나는 그 사람과 마주하게 되었다.
“로이.”
“예, 카포.”
“이놈인가? 그 건방진 놈이?”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사진은 몇 번 봐서 생김새는 알고 있었지만, 실물을 보니 차라리 사진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확실히 인상이 날카롭고 두 눈에 지독한 탐욕이 어려 있었다.
“하하. 저번에 말씀드린 워커 김이라는 친구입니다.”
로이의 대답에 파블로는 만지작거리던 총을 들더니, 총구를 내게 겨누었다.
“그래, 너구나. 우리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는 그 건방진 새끼가.”
영역을 침범했다라.
확실히 내가 미 정부로부터 마약을 받아 챙긴 뒤, 주변에 공급하면서 메데인에게도 영향을 줬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메데인에 비해 멕시코와 미국만이 주요 공급처이다. 그에 반해 메데인은 전 세계를 시장으로 삼고 있지 않은가?
나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하지.
“조금은 나눠 주셔도 좋지 않습니까? 그리고 메데인 카르텔처럼 길게 팔 것도 아닙니다. 단기간에 팔고 끝낼 거라서요.”
탕-!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총알이 내 옆으로 지나가 벽에 박혔다.
이 새끼가….
좀만 흔들렸어도 저 총알은 내 머리에 박혔을 것이다.
“어디서 감히, 내 앞에서 입을 놀리고 있어? 그 혓바닥을 뽑아 버려야 정신을 차릴 거 같군.”
더러운 똥통에 앉아 있는 마약왕다운 모습인가?
저 겉멋만 든 권위적인 어투에 구역질이 나온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네가 속해 있는 곳이 리턴인가 뭔가하는 곳이던데, 네놈들이 가지고 있는 마약, 전부를 내게 바쳐라. 그렇지 않으면 너를 시작으로 네놈 회사 전체를 없애 버리겠다.”
양아치 같은 놈이군.
내가 가진 마약을 거저 가져 보겠다는 건가?
지금은 내가 매우 불리한 상황이긴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 그리고 어차피 난 여기서 죽지 않는다. 이를 대비해 미리 깔아둔 것이 있다.
“말씀이 너무 과하신 거 아닙니까? 아무런 대가도 없이 우리의 약을 가지시겠다고요?”
“불만 있나? 이곳에는, 아니 그 어디에서도 내 말이 곧 법이다. 내 말을 따르지 않겠다는 건, 나와 전쟁을 하겠다는 뜻이지. 그걸 원하나?”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눈빛에 가득한 자신감. 그는 나를 완전히 아래 바닥에 있는 놈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꼬리를 내릴 순 없지 않은가.
“자신 있으십니까?”
“…뭐, 뭐야?”
“방금 하셨던 그 말. 책임질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파블로의 당황한 표정이 볼만하다.
제 딴에는 내가 고개를 숙일 거로 생각했겠지. 그러나 난 너 같은 놈한테 고개 따위 숙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미친놈. 내가 누군지 알고 지금 그런 소리를….”
“그러는 당신은 내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겁니까?”
“이 새끼가!!”
파블로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총구를 내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그의 곁에 있던 조직원들도 내게 다가와 총을 들이밀었다.
“한 번만 더 지껄여 봐라. 그땐 네놈 살갗을 벗겨 버릴 테니까.”
“카, 카포. 진정하세요. 그리고 워커! 너도 말조심해!”
로이가 중재에 나섰으나 파블로는 오히려 그런 그에게 발길질을 날렸다.
“넌 빠져, 이 병신 같은 새끼야!”
그리고 그는 다시 내게 험악한 눈길을 보냈다.
“너 같은 동양인 고기를 우리 개들이 아주 좋아할 거야. 그 살갗을 벗긴 다음, 잘 다져서 내 애완견들의 먹이로 던져 주마.”
난 미소로 그에 응수하며 말했다.
“자신 있으시면 해 보시죠. 대신, 한 가지 유의하셔야 할 점이 있습니다.”
“뭐?”
“당신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여기 있는 사람들도 전부 죽습니다. 이미 이곳 사방에 제 사람들을 깔아 두었거든요. 지금쯤 그들은 당신의 머리에 총구를 조준하고 있을 겁니다.”
이곳은 콜리나스 드 산타페에 있는 메데인 카르텔의 지부 중 하나다.
다행인 점은 이곳이 지하에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는 것. 그 뜻은 이곳 주변으로 저격수를 배치하면 언제든지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메데인에게 그런 미친 짓을 벌일 놈은 없기에, 이들은 아직 그런 공격을 당해 보지 않았을 터. 하지만 난 다르다.
정말로 이놈이 날 쏘려고 하면 내 신호에 따라 강철중과 그가 고용한 나의 조직원들이 전부 방아쇠를 당겨서, 이곳에 있는 놈들을 전부 벌집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더군다나 여기는 허름한 초가집마냥 벽이 군데군데 뚫려 있는 곳이라, 저격하기 훨씬 수월한 곳이다.
“설마, 제가 당신을 만나러 오는데 제 안전장치도 해 놓지 않았겠습니까?”
나는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내 파블로에게 보여 주었다.
“여기 있는 버튼 한 번만 누르면 됩니다. 그땐 저도 죽고, 여기 있는 당신들도 전부 죽는 거죠. 아, 제가 갑자기 쓰러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제야 파블로도 상황이 파악됐는지 총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갑자기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제법인데? 역시, 백악관을 그냥 쑤셔 놓은 게 아니었나 보네.”
태세를 전환한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자리에 다시 앉아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그만 폼 잡고, 가서 술이나 가져와.”
그는 내게도 손짓하며 말했다.
“너도 그만 앉지?”
기 싸움은 여기까지라는 건가.
나는 파블로의 말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로이는 짧게 신음을 뱉으며 바닥에서 일어나 내 옆에 섰다.
“방금 전 일은 잊어. 그냥 네가 어떤 놈인지 보려고 한 것뿐이니까.”
나는 그가 건네는 잔을 받으며 대답했다.
“예. 카포께서도 방금 전 일은 잊어 주시지요.”
파블로는 술잔 너머로 눈을 흘깃거리며 나를 살펴보았다.
썩 좋아 보이는 눈길은 아니었다.
내가 저격수 얘기를 안 했더라면 이놈은 분명 방아쇠를 당겨 나를 죽였을 것이다.
추잡한 새끼.
“리턴 컴퍼니. 나도 나름 조사를 해 봤어.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곳이던데…. 일단 여긴 주주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 그냥 페이퍼 컴퍼니였지.”
“저희 회사의 모토가 바로 그겁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 아무리 뒤져봐도 그 회사의 실체를 알아내실 순 없을 겁니다.”
파블로는 음흉하게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
“허세 부리지 마. 사실 까보면 별것도 없는 것들이겠지.”
나는 유하게 그 말을 받았다.
“상대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또한 저희의 의도이기도 하죠.”
술잔을 들이켜던 파블로의 손이 멈췄다. 그는 나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서? 너희 회사가 정말 존재한다는 거냐? 외형만 불려 놓고 속은 빈 게 아니고?”
“정말 그런 곳이라면… 백악관을 그렇게 들쑤셔 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카포한테 당당히 말을 하지도 못할 겁니다.”
내 대답을 들은 파블로는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건가?”
나도 힐끗 미소를 보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나와 파블로 사이에 이뤄지고 있는 기 싸움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질렸는지, 그는 본심을 드러냈다.
“약, 얼마나 들고 있나?”
약이라면 마약을 말하는 것이다.
“25톤 정도 될 겁니다. 자세한 수치는 모르겠군요.”
25톤이란 말에 파블로는 생각보다 양이 많다고 여겼는지 살짝 놀란 눈치였다. 그건 그 뒤에 있는 조직원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 약, 전부 팔 거지?”
“그럴 생각입니다. 하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희는 길게 팔고 있을 생각이 없습니다. 마약 판매를 주된 사업으로 여기지 않거든요. 단지, 자금 마련을 위해 팔고 있는 것일 뿐.”
“그 말은… 우리에게 그 약을 넘길 수 있다?”
“합당한 가격을 말씀하신다면, 가능합니다.”
점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는 흡족한 얼굴로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얼마를 원해?”
“1톤당 1억 달러. 25톤이면… 25억 달러 정도 되겠군요.”
파블로의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정가를 말하네. 그 정도 가격이면 내가 굳이 살 이유가 있을까?”
“어차피 크랙 코카인으로 판매할 거지 않습니까? 그럼 적어도 1톤당 1억 3천만 달러에 이윤을 남기실 텐데요?”
이것이 나와 메데인의 차이다.
나는 아무리 기를 써도 1톤당 1억 달러밖에 만들지 못한다.
구조도 그렇고, 약을 새롭게 제조할 인력도 부족하다.
하지만 메데인은 다르다.
저들은 1톤당 1억 3천만, 혹은 5천만까지 이윤을 더 남길 수가 있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생산 라인이 존재하고, 약을 빠르게 공급할 수 있는 루트도 있으니까.
“그래도 그건 너무 정가야. 솔직히 말해서, 너희들이 아무리 길고 날아봤자 크랙으로 1톤당 1억 밖에 못 만들잖아.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쪽 라인은 우리를 못 따라가.”
역시, 파블로도 이런 나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여기서 한 발 뒤로 물러나야 한다.
“좋습니다. 24억 달러에 팔겠습니다.”
“하하. 여전히 높네. 22억으로 하지.”
“23억 5천.”
“22억 5천.”
이 새끼…. 가진 돈도 많으면서 욕심도 많다.
“23억 3천.”
“22억 7천.”
결국, 내릴 때까지 내려야 하는 건가.
나는 마지막 베팅을 걸었다.
“23억 달러.”
“…콜.”
내가 마지막으로 가격을 깎았다는 걸 알아차린 것일까?
그는 빙긋 웃으며 내게 다른 잔을 건넸다.
“거래를 성사한 기념이야. 마셔.”
“감사합니다, 카포.”
25톤을 23억 달러에 판매한 건 결코 나쁜 선택이 아니다.
어차피 그 많은 약을 계속 쥐고 있을 순 없다.
차라리 가격을 좀 깎더라도 빨리 처분을 해서 자금을 만드는 게 나로서는 훨씬 더 이득이지 않겠는가.
내가 마약상으로 평생 일할 것도 아니니까.
난 실실 웃고 있는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얼굴을 바라보며 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메데인 카르텔과의 첫 거래가 끝났다.
* * *
나는 어떻게 자금을 보내주고 마약을 양도할 것인지, 파블로와 상의를 끝냈다. 어차피 자금이야 여러 나라를 거쳐 보내주면 되는 것이고, 선금이 먼저 오는 대로 그에 맞춰 약을 보내주기로 최종 합의를 봤다.
파블로 에스코바르도 멕시코를 떠나 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는지, 그는 떠나기 전 내게 은근슬쩍 물었다.
“아까 블러핑 친 거지?”
“어떤 걸 말입니까?”
“저격수들이 배치되어 있다는 거.”
난 씨익 웃으며 무전기를 들어 입에 가져다 대었다.
“이제 그만 철수하세요.”
“예, 사장님.”
파블로는 저 멀리서부터 은엄폐를 풀고 나타나는 내 조직원들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사람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솔직히… 저건 나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놀란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도대체 강철중은 어떻게 저런 사람들을 고용한 것일까.
난 내 속마음을 애써 숨기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특수부대 출신들만 모아뒀습니다. 왕년에 날아다닌 분들이 꽤 많더라고요. 어디 가서 실력이 딸리진 않을 겁니다.”
“하하…. 내가 한 방 먹었네.”
파블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내게 등을 돌렸다.
“다음에 또 보지. 시간 되면 콜롬비아에 놀러 와도 돼. 그땐 총구를 들이밀진 않을 테니까.”
“기대가 되는군요.”
그 말을 남기고 파블로는 조직원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그제야 로이가 크게 숨을 내뱉으며 내게 말했다.
“워커! 언제 저격수들을 배치해 놓은 거야? 난 전혀 몰랐어.”
하지만 그런 말을 일일이 받아 줄 수 없었다. 지금 나는 로이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말해야 했다.
“로이. 오늘로 마음을 확실하게 먹었습니다.”
“응? 뭐를?”
“파블로 에스코바르…. 메데인 카르텔의 카포를 빠른 시일 내에 죽여야겠어요.”
“…뭐?”
“그냥 천천히 유하게 끝장을 내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요. 이번 대선이 끝나는 대로 파블로를 죽일 겁니다.”
나는 얼굴이 굳어 가고 있는 로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차피 이렇게 하려고 했잖아요. 조금 시일이 빨라진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로이도 준비하세요. 순식간에 끝을 내버릴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