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114화 (114/325)

114화. 왕과의 만남 (3)

다니엘 로페즈와 강철중은 아직도 경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얼굴이었다.

“대단합니다. 정말 대단해요.”

로페즈는 기립박수까지 하며 링 밖으로 퇴장하고 있는 태혁이에게 환호성을 보냈다. 그건 강철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스터 김. 동생분이 저토록 뛰어난 복서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앞으로 저 선수를 주목해도 될 것 같군요. 충분히 스타가 될 만한 인재에요. 다만… 저대로는 안 됩니다. 저렇게 실력만 뛰어나고 쇼맨십이 없다면 마빈 해글러 꼴이 날 거예요.”

실력은 분명 월드 클래스이지만, 쇼맨십이 갖춰지지 않은 복서는 불완전하다는 것인가?

다니엘 로페즈가 예로 든 마빈 해글러는 딱 그 짝이었다.

마빈 해글러의 실력은 미들급 최강이지 않던가? 하지만 워낙 성격이 조용한 사람이라 쇼맨십이 없었다.

그에 반해 슈가 레이 레너드는 화려한 아웃복싱 스타일과 더불어, 상대를 도발할 줄 아는 쇼맨십 덕분에 80년대 최고의 복싱 스타가 되었다.

지금 로페즈는 바로 그걸 말하고 있는 것이다.

태혁이에게 필요한 건 실력이 아닌, 쇼맨십이란 것을.

“로페즈가 직접 알려주신다면야… 태혁이도 충분히 쇼맨십을 발휘할 수 있을 겁니다.”

“하하. 그럼요. 누구 동생인데요. 조만간 저 뛰어난 루키와 만남을 가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니엘 로페즈가 직접 조언을 해 주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복싱 세계를 주무르고 있는 큰 손이 아니던가?

“그럼, 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사실, 일이 밀려 있는데 경기를 보러 온 거라….”

로페즈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스터 김. 다음에 또 오십시오. 그땐 고급진 술을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예, 미스터 로페즈. 감사합니다.”

다니엘 로페즈는 나와 악수를 나눈 뒤, 자리를 떠났다.

강철중은 그런 로페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게 말했다.

“골든 마피아의 핵심 인물인 다니엘 로페즈가 저렇게 유쾌한 사람인 줄은 몰랐습니다.”

유쾌한 사람이라-.

뭐, 겉보기에는 그럴 수 있다.

“강철중 씨.”

“예, 사장님.”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겉모습으로 사람 판단하면 안 된다고요. 오히려 살인자들의 얼굴을 보면 섬뜩할 만큼 선해 보일 때가 많답니다.”

“하하. 그런가요?”

“예. 골든 아레나의 사장이 될 정도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겠어요? 저 유쾌한 성격도 믿을 순 없는 거죠.”

강철중은 내 말을 헤아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이란 달콤함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가야 하는 건 필수적인 요소이다. 더욱이 마피아 세계에서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두 손에 피를 가득 묻혀야 하지 않겠는가?

왠지 남 이야기 같지가 않아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저희도 그만 갈까요?”

* * *

경기가 끝난 뒤, 나는 태혁이를 만나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그리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눌 순 없었다.

비록 한 건 거의 없지만, 태혁이도 휴식을 취하긴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나도 라스베이거스에 오래 머물 순 없었다.

난 그 길로 곧장 워싱턴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목적지는 당연히 워싱턴에 있는 백악관이었다.

“오랜만일세.”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부통령님.”

부통령 부시는 저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핼쑥해진 얼굴이었다.

본격적인 대선 경쟁이 시작되면서, 강력한 경쟁자들이 꼬리를 물며 나오고 있어 걱정이 태산으로 쌓인 것이었다.

“리턴 컴퍼니가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덕분에 그래도 수월하게 대선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어. 정말 고맙네.”

오히려 감사할 사람은 나다.

부통령 부시가 힘을 써 준 덕분에, 그 많은 마약을 내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굳이 그걸 상기시켜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부시는 이대로 영원히 내게 감사한 마음을 품어 주면 된다. 그래야 내가 그에게서 원하는 것을 가져갈 수 있을 테니까.

“얘기는 들었습니다. 여러 기업부터 시작해, 보수 정당을 지원해 오던 골든 마피아도 지원을 끊었다고….”

“정보가 빠르군. 부끄럽지만 사실일세.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번 대선에서 내가 보란 듯이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면, 그때 이 수모를 갚아 줘야지.”

슬쩍 건드려봤더니, 과연 부통령 부시는 원한을 꽤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대로 대통령이 되어 준다면, 앞으로 골든 마피아가 어떻게 될지 볼만 할 것 같다.

“그런데 여기까지 발걸음을 했다는 건….”

“부통령님의 캠페인에서 도와줄 사람을 보내드릴 생각입니다. 선거 전략가인데, 믿어 보셔도 될 겁니다.”

“선거 전략가? 이미 나도 나름 전략가를 고용하긴 했네만.”

리 애트워터가 아니면 부시를 당선시킬 수 없다. 하지만 이미 그는 내 손에 죽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제 부시가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내가 보낸 사람의 말을 따라야 한다.

“부통령님. 이번 대선이 얼마나 부통령님께 불리한지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나 이번 대선은 반드시 뒤집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제가 보내드리는 선거 전략가의 말을 따르셔야 합니다.”

어둡던 부시의 표정이 환하게 바뀌고 있었다.

부시도 바보가 아닌 이상, 현재 여론이 얼마나 안 좋은지 알고 있을 터. 그리고 선거 전략가들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쉽사리 판도를 바꿀 만한 계획을 내놓진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다고 하니, 믿음이 절로 샘솟는 것이리라.

“자네의 말대로라면, 내가 어떻게 그 제안을 뿌리칠 수 있겠나?”

“감사합니다. 그럼, 조만간 부통령님 캠페인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래. 꼭 그렇게 해 주면 좋겠군.”

이제 길은 다 닦아 놓았다.

앞으로의 일은 전부 김아름에게 달렸다.

* * *

“김아름 씨.”

“예, 사장님.”

“앞으로 많이 바빠질 겁니다. 곧 대선 캠페인에 들어가야 하니까요.”

저번부터 내가 말을 해 놓은 거라 김아름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여전한 냉기에, 나는 걱정을 덜어 놓았다.

이 여자라면 군말 없이 내 명령을 따라, 부통령 부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난 백악관을 나와 미리 대기 중이던 차에 올라탔다. 그러기 무섭게 김아름이 내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바로 숙소로 갈까요?”

워싱턴에 온 지 별로 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곳에서 머물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내겐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던가.

난 잠깐 고민하다 김아름에게 말했다.

“뉴욕으로 가죠.”

* * *

솔직히 뉴욕에는 올 건덕지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냥 이곳을 지나치게 되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어떤 등쌀을 견뎌야 할지 모른다.

“태산 씨!”

나는 저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권윤아에게 희미한 미소를 보냈다.

김아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권윤아도 아름답고 청순한 미모를 자랑했다.

“언제쯤 오시려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만약 이대로 안 오시면 제가 라스베이거스로 날아가려고 했었는데.”

권윤아는 저번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것 같았다. 그녀는 자연스레 내 팔에 손을 감은 뒤, 나를 밖으로 이끌었다.

“그렇지 않아도 태산 씨가 오면 하고 싶던 일이 있었어요. 얼른 가요.”

“하고 싶었던 일이요?”

“예. 뉴욕에 왔으면 브로드웨이에 가 봐야 하지 않겠어요?”

브로드웨이라.

뮤지컬을 보자는 건가.

사실, 그런 문화적인 취미는 없는지라 좀 반신반의했다.

뮤지컬이 재밌나?

“얼른요!”

나는 권윤아의 성화에 못 이겨 차에 올라타 브로드웨이로 나갔다.

모든 연극과 뮤지컬이 태어나는 꿈의 장소, 브로드웨이.

맨해튼 길을 비스듬하게 가로지르는 길을 브로드웨이라고 하는데, 타임스퀘어에 자리한 극장들을 기반으로 다수의 연극과 뮤지컬이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배우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꿈의 장소라는 것이다.

“오늘 오후에 다른 스케줄은 없는 거죠?”

“네…. 뭐, 그렇긴 한데….”

“오늘 뮤지컬을 세 개 정도 볼 거라서요. 각오하세요?”

세 개나 본단 말인가.

벌써 아늑해지는 기분이다.

좁고 답답한 공연장 안에 몇 시간을 갇혀 있어야 한다는 거다.

공연 보기 싫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저렇게 기뻐하고 있는 권윤아의 얼굴을 보며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권윤아와 함께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게 된 뮤지컬의 이름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브로드웨이에서는 어마어마한 히트작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뮤지컬이다. 하지만 나는 별 감흥이 없었다.

딱히 노래 듣는 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순식간에 2시간이 흐르고 공연의 막이 내려가서야,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노래도 노래지만, 배우들의 연기도 굉장했고, 스토리도 아주 잘 만들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뮤지컬에 열광하며 보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꽤 신선한 경험이었다.

“어땠어요?”

“벌써 다음 공연이 기대되는데요?”

나는 권윤아와 함께 스트레이트로 나머지 두 공연도 관람을 했다.

나중에는 좀 피곤하긴 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다.

권윤아도 한을 풀었다는 듯이 밝게 웃으며 내게 팔짱을 끼었다.

“음…. 우리 진짜 오랜만에 보는 건데, 술이라도 한잔 할까요?”

권윤아와 오랜만에 만나는 거긴 하다.

거의 1년 만이니까.

그래도 예전처럼 친근하게 다가와 주니,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그럴까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좋은 곳 하나를 알아두긴 했습니다.”

“오. 센스가 있으시네요.”

나는 미리 알아둔 고급스러운 칵테일바에 권윤아와 함께 들어갔다.

칵테일 한 잔당 100불이 넘어가는 곳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고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조용했다.

거기서 권윤아와 나는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주로 대화를 이끌어 가던 건 권윤아였지만.

그러다 내가 방심하고 있을 때 권윤아가 훅 치고 들어왔다.

“태산 씨.”

“예.”

“우리 이제 서로 애태우는 건 그만하면 안 돼요?”

“…예?”

권윤아는 도발적으로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말을 이었다.

“저랑 진지하게 사귀어 보지 않을래요?”

멍청하게도 나는 몇 번 눈을 깜빡이며 권윤아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권윤아는 조금 실망했다는 듯한 눈치를 보였다.

“제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예요?”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고 워낙 갑작스러워서….”

“혹시… 아빠 때문에 억지로 만나는 거라면….”

이런. 얘기가 어째 더 심각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

나는 얼른 권윤아의 말을 잘랐다.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러자 굳어 있던 권윤아의 얼굴이 다시 활짝 피었다.

“정말요?”

“예.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이유 때문에 윤아 씨를 만나진 않을 겁니다. 저도… 좋아서 만나는 거니까요.”

권윤아는 씨익 미소를 보이며 잔을 들어 살짝 부딪혔다.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이에요?”

이번에는 얘기가 또 그렇게 되나.

“아…. 예, 윤아 씨.”

얼떨결에 나도 대답을 해 버리고 말았다.

왠지 내가 권윤아에게 말려든 것 같은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 * *

보통 아메리칸 스타일이 그날 사귀면, 그날 바로 호텔로 직행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와 권윤아는 아직은 건전한 80년대 젊은이들이었다.

우리는 건전하게 술을 마시고, 정말 건전하게 헤어졌다.

별로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막상 그렇게 헤어지니 기분이 참 묘했다.

이것도 권윤아에게 내가 휘말린 건가.

“워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나는 로이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흐흐. 정신 차려. 지금 누굴 만나러 가는지 알기나 하는 거야?”

나는 억지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 말대로 지금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가 아니지 않은가.

난 흐트러진 정신을 바로 세웠다.

“곧 있으면 내린다?”

놀랍게도 지금 우리는 헬기를 타고 멕시코 상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메데인 카르텔은 수십 톤의 마약을 비행기로 운반하지 않던가?

그들은 수십 대의 헬기까지 동원하며 마약을 운반하기도 하고, 이렇듯 교통수단으로 쓰기도 한다.

헬기가 지상에 무사히 착륙하자, 로이는 문을 열고 먼저 밖으로 내렸다. 나도 그의 뒤를 따라 헬기 밖으로 나오자 수십 명의 조직원이 총을 든 채로 우릴 맞이했다.

“카포가 정말 오긴 왔나 보군요. 이렇게 조직원들이 많은 걸 보면.”

“알다시피 우리 카포가 좀 유명인이야? 목숨 노리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까 이러는 거지. 아무튼, 얼른 내려가자. 우리 카포, 기다리는 거 싫어해.”

막상 여기까지 오니, 점점 긴장감이 커지는 것 같다.

그럴수록 나는 이번 만남이 매우 기대되었다.

과연 메데인의 카포,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어떤 사람일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