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돈이 최고다. (1)
“형님.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동욱이의 목소리에 난 이끌리듯 눈을 떴다. 그리고 내 앞에는 열다섯 명의 조직원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들은 천강 대학교에서 날 공격하다 붙잡힌 놈들이다. 이들을 심문해,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볼 차례였다.
그 뒤로는 내 조직원들이 험악한 인상을 띠며 서 있었는데, 여차하면 매타작이라도 하려고 몽둥이를 각자 하나씩 들고 있었다.
“시작해.”
“예, 형님.”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직원들이 몽둥이를 번쩍 높이 들었다. 그리고 상대를 무참히 가격하기 시작했다.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때려 놓는 것이다. 그래야 대화가 좀 더 편해지지 않겠는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나는 다시 손을 들어 매질을 멈추게 했다.
“어디 조직에서 나온 거냐?”
“그, 그게….”
“아직 덜 맞았나 보네. 뭐해? 더 부드럽게 해 놔.”
“예, 형님!”
“자, 잠깐! 크악-!”
하는 걸 보니, 이번 심문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 * *
“군산파?”
“예. 들어 보셨습니까?”
“아니. 내가 그런 떨거지들을 어떻게 알아.”
듣도 보도 못한 이름에 성일환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애들 시켜서 족쳐 보니까. 대양에서 준 돈으로 군산파가 움직인 것 같습니다.”
“나참. 대양 놈들도 알만 하다. 양아치 같은 놈들한테 돈이나 퍼주고.”
확실히 대양은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한 조직을 선택해 나를 공격했다.
“아. 저번에 알아본다고 하신 건….”
“그렇지 않아도 그거 말해 주려고 했다. 너, 차로 받아버리려고 했던 새끼들 누군지 알아놨어.”
“군산파입니까?”
“아니. 다른 놈들이야. 새로 생긴 곳 같던데, 내가 위치 알려줄 테니까 가서 엎어 버리고 와.”
군산파처럼 생긴 지 별로 안 된 소규모 조직을 이용했단 말인가.
왜 그런 시답잖은 놈들한테 일을 맡긴 걸까?
“왜 대형 조직이 아니고 소형 조직에 일을 맡긴 걸까요?”
“글쎄다. 자금이 딸린 것일 수도 있고, 좀 큰 데에다 의뢰했다가 거절당한 걸 수도 있지. 규모가 좀 되는 곳이라면 미치지 않고서야 화진파를 건드릴 생각은 하지 않겠지.”
역시, 그런 이유에서인가.
화진파의 영향력이 워낙 크다 보니, 규모가 좀 되는 곳에서는 절대 우리를 건들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막 신설이 되고 뭐가 뭔지도 모르는 놈들은 일거리가 들어오면 무조건 받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무작정 대양 그룹의 의뢰를 받아 나를 공격한 것이다.
“대양 그룹 자금 사정은 아직도 똑같습니까?”
“그래. 일 터지고 나서 내가 명동에다 소문을 쫙 뿌렸어. 대양이 감히 화진파를 건드렸다고. 그러니까 혹시라도 대양을 도와주는 곳이 있다면 우리와 전면전을 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역시, 성일환이 이런 일에는 참 발 빠르게 움직여 준다.
내가 부탁할 일을 미리 해 주다니.
“설마 오성파가 돕진 않겠죠?”
“오성파가 아무리 멍청해도 대양이랑 짝짜꿍하려고 하진 않을 거야. 좀 더 큰 그룹이면 모를까, 대양은 이제 막 중소기업 티를 벗어난 곳이잖아. 그리고 돈 많이 들어가는 곳을 왜 오성이 건들려고 하겠어?”
대양이 사업 몇 개를 말아먹고 급속도로 하락세를 보이는 곳이지 않던가.
그런 곳을 오성파가 함부로 건드릴 리 없다.
잘못 손을 댔다가는 오성파까지 수렁으로 빠질 수 있을 테니까.
“그럼….”
“그놈들 이제 슬슬 똥줄이 탈 거야. 명동에서 돈 빌려주는 곳이 없잖냐. 혹시라도 대양을 도와주려고 하는 놈이 나오면 내가 못 하게 막을 거다.”
성일환이 그 정도로 엄포를 내놓았다면 아마 대양 그룹을 돕고자 하는 간 큰 놈은 없을 것이다. 그럼, 이제 그쪽 사람들이 내게 와서 무릎 꿇기만을 기다리면 된다는 건가?
* * *
“김 마담. 그러지 말고 조금만 땡겨 달라니까?”
대양 그룹 회장 하장만은 명색이 회장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그에 걸맞지 않은 꼴불견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돈 앞에서는 회장이란 직책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당장 급한 불을 꺼야 하는 심정에, 하장만은 직접 명동까지 찾아왔다.
“회장님. 여기까지 찾아오셨어요?”
“너무 급해서 그래. 내 계열사 사장들이 다 뛰어다니는데도 돈을 빌려주는 곳이 없잖아. 우리 대양 그룹이 당장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내가 진짜 약속할게. 두 배로 갚아준다니까?”
명동에서는 다섯 번째로 돈을 굴린다는 김영숙이지만, 이번 일만큼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물론, 대양 그룹에게 돈을 빌려주고 챙기게 될 이득은 꽤 될 것이다. 그러나 잠깐의 이익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순 없지 않은가.
“어머. 우리 회장님. 명동 소식에 좀 둔감하신가 보다.”
“둔감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대양 그룹이라면 솔직히 사채업자들이 너도나도 다 돈을 빌려주려고 하겠죠. 그런데 왜 안 그러는 줄 아세요?”
“그러니까! 내 말이 바로 그거야. 도대체 왜들 그러는 거야?”
김 마담은 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비며 말했다.
“혹시 화진파에 김태산이라고 아세요?”
“김… 태산?”
“예. 그 친구랑 좀 트러블이 있다면서요.”
“그거야 그 어린놈이 감히 내 아들을 건드려서 그랬지. 그런데 그게 왜? 깡패 하나 손 봐주는 게 무슨 대수라고.”
하장만의 말에 김영숙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금 자신이 누굴 건드린 건지 전혀 모른단 말인가.
“우리 회장님. 명동이 어떤 바닥인지 잘 모르시는구나. 그것도 화진파의 김태산이라면 진짜 잘못 건드리신 거예요.”
“뭐야? 그게 무슨 말이야? 그래 봐야 깡패 새끼 아니야? 그런 놈 하나 족쳤다고 문제 될 게 뭐가 있어?”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건드리실 거면 그냥 깡패를 건드리지 왜 하필이면 대물을 건드리셨어요?”
하장만도 슬슬 감을 잡았는지 안색이 굳어 가고 있었다.
“화진파가 오성파를 제친 지 꽤 된 건 아세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화진파는 오성파의 한참 밑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화진파를 대한민국 최고의 조직으로 만든 게 누군지 아세요?”
“서, 설마 지금 그게….”
“맞아요. 바로 김태산이라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화진파가 굴리는 자금력이 얼마나 강한데요? 그것도 다 김태산이 불렸다는 소문이 있어요. 그러니까 회장님이 김태산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화진파가 길길이 날뛰고 있는 거예요. 덕분에 저희도 돈을 빌려드리기 힘들고요.”
설마, 그 정도란 말인가….
하장만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그래서, 나한테 돈을 빌려줄 수가 없다?”
“이해 좀 해 주세요. 저희가 회장님께 돈을 빌려드리는 순간, 전 끝이에요. 이 바닥에서 절대 살아남을 수가 없다고요.”
“그, 그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예요. 지금 명동 바닥에서 화진파의 말을 거스르는 사람은 없어요. 그거 아세요? 김태산이란 사람의 영향력은 지금 여의도에서도 알아줘요. 그 사람이 여의도를 관리하고 있거든요.”
명동에 이어 여의도까지?
거기는 조직폭력배들과 거리가 먼 증권맨들이 있는 곳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거기까지 손을 뻗쳤다는 걸까?
“여의도가 개발되기 전부터 화진파의 김태산이 거기를 장악했다고 해요. 그리고 천천히 땅을 사들여서 지금은 여의도에 들어서는 건물 중 대다수가 화진파 소유라고 알려져 있어요. 당연히 그쪽 사람들에게도 입김이 작용할 수밖에 없죠.”
여의도에 있는 은행이나, 대부업체에서도 절대 대양 그룹을 받아 줄 리 없다고 못을 박는 것이었다.
“그, 그럼… 난 도대체 어떻게 하라고? 지금 당장 융통해야 할 돈이 얼만데!”
“그러니까 사람을 가려서 건드리셨어야죠. 하필이면 화진파의 김태산을 건드리시다니…. 거기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데.”
“기, 김 마담. 그러지 말고 좀만 빌려줘. 내가 꼭 비밀은 지킬 테니까….”
“어머. 회장님. 돈에 비밀이 어디 있어요? 제 쪽에서 돈이 나갔다는 건 금방 소문이 쫙 퍼질 텐데.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화해하세요.”
하장만은 난색을 표하며 되물었다.
“화, 화해?”
“예. 화진파와 화해하시라고요. 명동에 성일환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명동에 엄포를 놓은 건 바로 그 사람이에요. 그쪽과 먼저 대화를 해 보세요.”
성일환이라.
그렇지 않아도 김 마담을 만난 후에 그쪽에게도 손을 뻗어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화진파란 말인가. 그것도 대양 그룹의 자금줄을 말려 버리라고 엄포를 내놓은 곳이라니.
벌써 속이 쓰리고 열불이 올라왔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시발. 내가 이 나이 먹고, 이 무슨 개쪽을….”
욕을 퍼부으며 중얼거리는 하장만을 보며 김 마담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래서 사람이 위치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했던가.
저 오만함 때문에 누굴 건드렸는지도 모르고 날뛰다니.
그래도 과연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긴 했다.
화진파와 대양이 원활하게 화해를 할 수 있을까?
* * *
“아빠!! 그 새끼가, 김태산 그 새끼가!!”
하장만의 셋째 아들 하동석은 막내인 데다가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란 녀석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앞뒤 분간할 줄을 몰랐다.
오늘도 사내자식이 눈물을 짜내며 허락도 없이 서재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예전 같았으면 하동석의 어리광을 전부 받아 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지 않은가.
“나가라. 지금 아빠 바쁜 거 안 보이냐?”
“아빠! 아들이 다쳐서 왔는데 일이 중요해?”
첫째와 둘째를 불러 심각하게 회의를 하고 있던 하장만은 막내아들의 철없는 행동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런 한심한 새끼!”
결국, 화가 폭발한 하장만은 재떨이부터 전화기까지 전부 하동석에게 던져 버리며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이런 병신 같은 놈아! 지금 너 때문에 회사가 어떤 위기에 처했는지 알기나 해? 그리고 이 아비가 무슨 수모를 당하고 왔는지 알기나 하냐고!”
“아, 아빠….”
“썩 꺼져! 대양 그룹 이름이 없으면 버러지처럼 살다 뒤질 새끼가 어디서 감히!”
자신의 아버지가 저렇게 열을 내는 건 처음 보았기에, 하동석은 어안이 벙벙해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보다 못한 하장만의 첫째 아들 하영석이 셋째와 아버지를 타이르며 말했다.
“막내, 너는 나가 있어. 얼른! 그리고 아버지도 진정하세요.”
“어휴! 어디서 저런 새끼가 나왔는지.”
하동석을 밖으로 내보낸 하영석은 다시 자리에 앉아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가 따로 알아보니까, 그 김 마담이란 사람의 말이 틀리지 않은 거 같더군요. 생각 외로 김태산이란 사람의 영향력이 굉장합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화진파가 김태산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를 정도라고 합니다.”
“그 정도야? 화진파라면 그 권용일인가 뭔가 하는 영감이 보스로 있잖아.”
“예. 근데 그 영감이 김태산을 친아들처럼 여기면서 무슨 말이든 다 들어 주고 있답니다. 왜냐하면, 화진파를 그 정도로 성장시킨 게 김태산이기 때문이죠.”
하장만은 손으로 이마를 잡으며 탄식 어린 한숨을 뱉었다.
처음에는 감히 자신의 막내아들을 저 꼬라지로 만든 놈이 누군가 싶어 하며 손봐주려고 했던 건데, 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
사실, 좀 이상하긴 했다.
김태산을 밟아 놓기 위해 의뢰를 하는 곳마다 다 거절을 했던 것. 그러다 돌고 돌아 결국 작은 조직에게 일을 맡겼더니, 제대로 사고를 쳐버렸다.
성공은커녕 오히려 대양 그룹이 의뢰했다는 걸 다 까발릴 줄이야.
“그래서, 영석이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자존심을 지키시려면 회사를 포기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회사를 지키시려 한다면 자존심을 버릴 수밖에요.”
그 말은 화진파에게 가서 머리를 숙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네 말은 이 아비가 그 어린놈한테 가서 싹싹 빌고 오라는 거냐?”
“…회사를 위해서라면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야. 하영석!!”
하장만의 언성이 높아지자 하영석 옆에 있던 둘째 하준석이 형을 거들었다.
“아버지. 며칠 내로 25억을 만들지 못하면 대양 그룹은 그날로 부도에요. 정말 그렇게 되고 싶으세요?”
“너까지 지금….”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저도 아버지가 그런 새끼들한테 고개를 조아리는 게 싫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하장만은 아들들의 권유에 신음을 짧게 뱉었다.
자신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화진파와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면 대양 그룹은 곧 부도를 당하게 된다.
첫째 하영석 말대로 자존심을 지키려면 회사를 포기해야 하고, 회사를 지키려면 자존심을 버릴 수밖에 없다.
“시발. 어쩔 수 없나….”
결국 하장만은 후자를 택해야 했다.
자존심이란 곧 돈에서 나오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