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자살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4)
“여기서 뭐 해, 회장. 혼자 재미 보고 있었나 보네?”
정식이는 성큼성큼 무리 사이를 걸어가며 능청스럽게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놈들이 저런 꼬락서니를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뭐야, 넌. 이 새끼랑 아는….”
콰직-!
예상대로 한 녀석이 정식이를 제재하려고 하자, 곧바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뭐에 맞았는지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저 자세에서 공격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센스가 돋보이는 동작이었다.
결국 상대는 털썩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뭐, 뭐야 이 새끼!”
깜짝 놀란 패거리가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정식이를 노려보았다.
최정식은 그들을 스윽 둘러보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너희들 지금 누굴 건드렸는지 알기나 하냐?”
그리고 능청스러웠던 목소리가 차츰 무겁게 변해 가고 있었다.
“어쩌면 너희들은 지금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을 건드린 거나 마찬가지야. 알아?”
“입 닥쳐, 이 새끼야!”
정식이의 뒤에 있던 놈 하나가 파이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변칙적으로 치고 빠지는가 싶더니, 상대가 힘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 순간, 압도적인 정적이 찾아왔다.
이놈들도 느낀 것이다.
눈앞에 있는 상대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또한 얼마나 강한 상대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당장 아군인 나도 위협적이라는 걸 느낄 정도인데, 저놈들은 어떻겠는가?
역시, 나이를 먹으면서 품고 있던 살기가 더욱 날카롭게 다듬어졌다는 느낌이 든다.
“회장. 이 새끼들 무기 하나씩 들고 있는데, 나고 하나 꺼내도 되나?”
잠깐.
이놈 이거 제정신인가?
여기서 칼을 들면 어쩌자고.
만약 정식이가 여기서 칼을 들게 되면, 여기 있는 이 스무 명의 장정들이 줄초상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이 상당히 복잡해진다.
난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와. 치사하네. 그럼, 맨손으로 상대하라고?”
“여기 학교야. 이놈들 죽는 건 고사하고, 피가 흥건해 봐.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내 말을 들은 정식이가 짧게 입맛을 다셨다.
“그것도 그렇네. 어쨌든 적당히 손보면 된다 이거지?”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럼, 간다.”
정식이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허리춤에 있던 칼 두 개를 꺼냈다.
청강도는 칼을 잘 쓰는 야쿠자들이 주로 쓰는 칼이라고 알려져 있다. 정식이가 꺼낸 저 두 칼이 바로 그것인데, 원래는 사시미 전용 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굉장히 날카롭고 가벼워 칼잡이들이 애용한다고 한다.
물론, 나도 정식이에게 들은 내용이라 확실한 건 아니다. 하지만 언뜻 봐도, 저 두 칼에 살짝만 베여도 살점이 통째로 잘려나갈 것 같았다.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적당히 손 본다더니, 칼을 빼 드는 미친놈이 어디 있는가?
“정식아!!”
난 저놈이 정말 큰 사고를 치기 전에 최소한의 제한선을 만들어 두었다.
“무조건 죽이면 안 돼! 그리고 찔러서도 안 돼! 제압만 시켜!”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건가.
정식이는 들고 있는 칼처럼 예리한 눈으로 자신을 둘러싼 패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젠장.
정식이가 나타나 준 건 다행이지만, 이렇게 되면 일이 너무 커지게 되는데.
이러다가 저놈들이 정식이 손에 다 죽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내가 힘을 쓴다고 해도 경찰들이 이 일을 그냥 덮을 순 없을 것이다.
“어디서 허세야, 이 새끼가!”
“한꺼번에 쳐! 아주 죽여 버려!!”
차라리 저놈들이 전부 도망이라도 쳐 준다면 살 가능성이 있겠다만, 역시 이놈들은 물러설 생각이 없다.
아무리 정식이의 기세가 대단하다고 해도 이놈들은 쪽수를 믿고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쪽수에 장사 없겠지만, 정식이는 보통내기가 아니지 않는가.
더군다나 정식이가 칼까지 들었으니, 이런 오합지졸들로 정식이를 막을 순 없다.
회귀 전에, 내가 저놈 한 번 잡아보겠다고 특공대까지 동원하지 않았던가?
바로 그런 놈이다.
내가 검사 시절 때, 대한민국에서 S급 위험군으로 뽑히던 사람이 바로 최정식이란 남자다.
“어차피 혼자야!”
“그깟 칼 들었다고 무서워할 줄 알았냐?!”
그런데 저놈들이 쪽수만 믿고 정식이를 상대하겠다고?
미친놈들. 아무리 보는 눈이 없어도 상대를 조금은 봐 가면서 건드렸어야지.
콰직-!!
입으로 떠들기만 하던 놈들에게 또 한 번 무서운 정적이 찾아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정식이는 한 놈을 제압했다. 그리고 축 늘어진 상대의 얼굴을 한 손으로 붙잡은 채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칼이 뭐 어쨌다고…?”
“이 새끼가!!”
“밟아!!”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정신 줄이 끊긴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또한, 방금 전 한 명을 눕혔을 때도 칼 손잡이 끝으로 관자놀이를 때려 기절만 시켰다.
그렇다는 건 칼을 이용하되, 최대한 피를 보지 않는 쪽으로 쓰겠다는 건데.
차라리 저럴 거면 그냥 맨손으로 싸우는 게 낫지 않나….
콰콱-! 뻐억-!
순식간에 포위된 정식이는 집중 공격을 받았지만, 여전히 표정은 여유만만이었다. 그리고 아직 한 대도 맞지 않은 채 요리조리 상대의 공격을 피하며 반격했다.
간간히 칼로 상대방을 베어 버리긴 했지만, 절대 치명상은 주지 않았다.
“뭐, 뭐야…. 저 새끼 뭘 저렇게 잘 싸워?”
“전문 칼잡이인가….”
포위망에 끼어들지 않은 몇몇 사람들은 정식이의 실력에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
이놈들 완전히 정식이에게 시선이 빼앗겨 날 잊고 있구먼.
하긴. 저놈 싸우는 걸 보면 감탄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여기서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난 이놈들과 마찬가지로 정식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하동석을 바라보았다.
그래. 다른 놈들은 정식이에게 맡기고, 난 저놈을 잡아 족쳐야겠다.
“안 싸우려면 저리 꺼져.”
정식이에게 대부분이 붙는 바람에, 내 앞을 막고 있는 사람은 고작 세 명에 불과했다. 그중 제일 덩치가 커 보이는 이놈부터 처리를 해야겠다.
“넌 또 뭐….”
빠악-!!
무조건 한 방에 끝내야 한다.
두세 번 치는 거로 끝내면 임팩트가 없지 않은가.
난 온 힘을 주먹에 실어 상대의 턱을 그대로 후려쳤다.
사람이 갑자기 턱을 제대로 맞으면 대부분 기절하게 된다. 과연 상대는 짧은 신음도 내뱉지 못한 채 철퍼덕 바닥에 쓰러졌다.
그제야 나머지 두 놈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빈틈을 보인 이상, 내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퍼억-! 콰직-!
내 예상대로 이 두 놈은 딱히 위협적일 게 없었다.
한 놈은 주먹을, 다른 한 놈은 발을 써서 동시에 쓰러뜨릴 정도로 아주 간단했다.
이 두 놈까지 쓰러뜨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하동석의 파랗게 질린 표정이 훤히 다 보였다.
지금 거품 물며 쓰러진 이 세 놈을 제외하고, 나머지 놈들은 전부 정식이에게 매달려 있지 않은가?
즉, 하동석을 지켜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너, 너희들!! 거기서 노닥거리지 말고 빨리 와서 나를 지켜!!”
애처롭게 불러보았지만, 놈들은 정식이한테 정신이 팔린 터라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난 음흉하게 미소를 지으며 하동석에게 다가갔다.
“오, 오지 마!”
“싫은데?”
“나, 나 건드리면 너 진짜 죽는 수가 있어!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해!?”
“당연히 알지. 대양 그룹 회장 아들이잖아.”
“그, 그걸 알고도 감히…!”
천성 그룹 회장 아들이라면 모를까.
중소기업 티도 벗어내지 못한 대양 그룹의 이름 따위를 팔다니.
이놈, 제깟 놈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아직도 모르는 건가?
“그럼, 난 누군지 알고 건든 거야?”
“너, 너는….”
“똑똑히 기억해. 난 화진의 김태산이다. 넌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린 거야, 알아?”
“그, 그래 봤자 깡패잖아!”
“맞아. 깡패지. 그런데 세상은 아직 법보다 주먹이 앞선다는 거 알지? 그리고 화진은 양아치 집단이 아니야. 너랑 네 잘난 아빠 정도는 소리소문없이 죽여 버릴 수 있는 곳이라고.”
하동석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웃기지 마!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 죽이긴 누굴 죽여!?”
“과연 그럴까?”
난 음산한 미소를 보이며 녀석의 뒤를 가리켰다. 내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하동석은 이내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형님!!”
“저희가 왔습니다, 형님!!”
어떻게 알았는지, 학교 내에 있던 화진파 조직원들이 모두 모인 것이었다.
“어떤 놈이 감히 우리 형님을 다굴 치려고! 이건 명백히 화진파에 대한 도전입니다, 형님!”
“형님! 이 새끼들 다 묻어 버릴까요!?”
“바다에 다 던져 놓겠습니다, 형님!”
정식이와 정신없이 싸우던 놈들이 전부 손발을 멈추고 몰려든 조직원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았다.
“드, 들었어? 지금 화진파라고….”
“화진파? 저, 정말이야?”
“이런 미친!! 진짜야?”
이놈들 동요하는 것을 보니, 내가 화진파 소속이라는 걸 몰랐던 모양이다.
하긴. 알았다면 날 건드리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성파도 건드리지 못하는 사람을, 고작 이런 놈들이 건드린 거니까.
“저, 저기 저희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화진파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이놈들은 금방 태세를 전환해 버렸다.
들고 있던 연장을 전부 바닥에 던져 놓고, 구차하게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입니다! 저희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화진파에서 나오신 분들이라는 걸 알았다면 이런 미친 짓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이놈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다. 아무리 내가 화진파라는 걸 몰랐다고 해도 날 건드렸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앞일을 위해서도 철저하게 밟아 줄 필요가 있다.
난 조직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뭐해? 다 눕혀.”
“예, 형님!”
내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직원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순식간에 패거리를 때려눕혔다.
죽이지는 말라는 내 말을 들은 모양인지, 살벌하게 주먹을 휘두르긴 했으나 죽을 정도로 때리진 않았다.
난 바들바들 몸을 떨고 있는 하동석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직도 네가 최고인 줄 알아?”
“너, 너 지금 실수하는….”
난 하동석이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주먹을 날렸다.
세게 때리지도 않았는데 녀석은 엄살이란 엄살은 다 피우며 바닥에 쓰러졌다.
“하동석 씨. 상황 판단이 잘 안 되는 모양인데, 너 지금 나한테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이야.”
“거, 건드리지 마! 안 그러면 가만 안 둬!”
역시, 이놈은 더 맞아야 한다.
이런 놈에게는 매가 약이라는 진리의 말씀이 있지 않던가. 하지만 단순히 때리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난 아직 멀쩡한 하동석의 왼팔을 붙잡아 다리에 걸쳤다.
“뭐, 뭘 하려는…!”
“네 아빠한테 가서 똑똑히 보여주고 와라. 그리고 할 말 있으면 여의도에 있는 김태산을 꼭 찾으라고 하고.”
“아, 안 돼!”
콰작-!
하동석이 비명을 질러 보았지만, 난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놈의 팔을 비틀어 버렸다.
그러자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악-!!”
난 아등바등 몸부림을 치고 있는 하동석을 뒤로 하고, 뭔가 아쉬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정식이에게 다가갔다.
“다친 곳은 없냐?”
“응.”
무서운 놈.
진짜 스친 상처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옷에 흔한 먼지조차 묻지 않다니.
무슨 만화책에 나오는 사기 캐릭터도 아니고….
“오늘은 시원하게 칼 좀 쓰나 했더니. 괜히 흥만 잡쳤네.”
정식이는 입맛을 다시며 칼을 다시 허리춤에 집어넣었다.
이 정도로는 갈증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인가.
“좀만 참아. 조만간 크게 한탕 할 건수가 있으니까.”
“정말? 뭔데?”
“당장은 말 못 하지만, 기대해도 좋아.”
내 말대로 큰 건수가 여러 개 잡혀 있다.
오성파와의 전쟁도 있고, 이진용과의 싸움도 있지 않은가.
이때 정식이의 활약이 아주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근데 저거 그냥 놔두고 가도 되나?”
정식이는 엉엉 울면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하동석을 가리켰다.
“괜찮아. 저놈은 놔두고 이놈들을 데려가야지.”
굳이 저놈을 데려가서 어디에다 써먹겠는가?
난 하동석의 의뢰를 받아 나를 치려고 온 이 조직원들의 정체가 궁금하다.
이놈들을 데려가서 어디 조직에서 나온 건지 털 작정이다. 그리고 감히 날 건드린 대가가 무엇인지 톡톡히 보여 줄 것이다.
“너희들은 이 새끼들 다 끌고 여의도에 있는 창고로 와. 이놈들이 어디서 나온 건지 알아봐야 하니까.”
“예, 형님.”
“최대한 소란스럽지 않게, 빠르게 끝내자. 학교에서 괜히 문제 일으키면 안 되니까.”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학교 안에 소문이 퍼지고 퍼져 걷잡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기 전에 빨리 몸을 빼야 한다.
“가자.”
난 학교 밖을 나가기 전, 계속 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반복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하동석을 잠시 바라보았다.
과연 저놈이 날 먼저 죽일지, 아니면 내가 먼저 저놈과 저놈의 아비를 먼저 죽일지는…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