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자살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2)
“1학년 새끼들이 아주 개판이라고 하더니, 진짜였네.”
이름 모를 놈이 선배랍시고 고성을 지르며 1학년들을 훈계했다.
역시, 어느 대학이나 이런 똥군기는 존재할 수밖에 없는 건가.
“그리고 넌 뭐야? 뭔데 선배들 말을 개무시해? 6시까지 오라고 했으면 올 것인지 어딜 집에 가려고?”
사실 군기를 잡든지 말든지 크게 상관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런 놈에게 맞을 줄이야.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도, 동석아. 여기 이 애는….”
옆에 있는 놈은 친구인지, 한참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던 동석이란 놈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이놈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깡패? 아니. 깡패 새끼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온 거야?”
그러더니 기어코 내 머리채를 붙잡았다.
“야. 진짜냐? 너 깡패야?”
대양 그룹의 회장의 아들이라고 했던가.
대양 그룹이라면 아직 대기업 축에는 끼지 못하는 곳이다.
그냥 외형만 실컷 불려 대기업인 척하는 곳이라는 건데, 이놈 꼬락서니를 보니 자식 교육이 엉망이라는 건 알겠다.
그리고 대양 그룹이라면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이놈들은 IMF 때 싸그리 날아간다.
난 아무 대답 없이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러기 무섭게 그놈은 내 뺨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왜 대답이 없어, 이 새끼야. 그렇게 노려보면 뭐 어쩔 건데. 치기라도 하게? 넌 내가 누군지 모르냐?”
그리고 내 인내심도 거기서 바닥이 났다.
콰직-!
난 내 머리채를 잡고 있던 상대의 팔을 붙잡곤 그대로 꺾어버렸다.
“으, 으아아악-!!”
“꺄아악!”
처음에는 기세 좋게 어깨를 쭉 펴고 있던 놈이, 지금은 바닥을 뒹굴며 아등바등하고 있었다. 깜짝 놀란 여학생들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고통 때문에 눈물까지 흘리고 있는 동석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아프냐?”
“너, 너 이 개새끼. 내가 누군지 알고!!”
아프긴 아프겠지.
팔이 부러졌는데.
난 그놈 앞에서 쭈그려 앉아 똑같이 머리채를 붙잡아 주었다.
“너야말로 내가 누군지 알고 쳤어? 상대를 치려면 누군지는 알고 쳐야 할 거 아니야, 이 새끼야.”
잔뜩 일그러진 상대의 못생긴 얼굴에 거침없이 싸대기를 날려 주었다.
그럴 때마다 녀석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신음만 터트릴 뿐이었다.
“그, 그만해, 1학년!”
보다 못한 옆에 있는 선배가 나를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너, 동석이가 누군지 알고 그러는 거야? 대양 그룹 회장님 아들이라고! 여기서 더 그랬다가는….”
“놓으세요.”
“야! 그만하라고 했잖….”
“놓으시라고요.”
눈을 번뜩이자 날 붙잡고 있던 선배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난 바닥에 떨어져 있는 가방을 다시 집은 뒤,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냈다.
“불만 있으면 이쪽으로 와. 네가 잘난 건 네 아빠밖에 없잖아? 그 잘나신 분도 같이 데려오던지.”
쓰러져 있는 놈에게 명함을 던진 다음, 나는 강의실 밖을 나왔다.
뒷일이야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속이 시원해진 것 같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긴 했던 모양이다. 고작 이 정도로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 다 들다니.
하지만 내가 너무 생각 없이 행동한 건 아닐까.
이제야 조용히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는데, 이번 일로 다시 주목을 받게 됐으니….
아무튼, 당분간 학교에 나오면 안 되겠다.
* * *
“도, 동석아. 괜찮아?”
“크으으…. 시, 시발. 내가 저 새끼 꼭 죽여 버릴 거야!”
하동석은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그를 일으켜 주던 학생이, 이 모든 상황을 경악 어린 시선으로 보던 1학년에게 소리쳤다.
“오늘은 다들 집에 가! 다음에 집합시킬 거니까! 얼른!”
“아, 예.”
학생들은 그 말에 따라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쌤통이라는 듯 은근하게 조롱 섞인 눈빛을 하동석에게 보냈다.
그걸 느끼지 못할 리 없던 하동석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새끼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아. 기, 김태산이라고 했던가.”
“김태산? 좋아. 내가 꼭 그 새끼 족치고 만다.”
하동석은 살기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김태산이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놈의 사지를 다 부러뜨려 놓으리라. 그 후에도 영원히 그놈을 두고두고 괴롭힐 계획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더 편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 * *
통일민주당에서 결국 탈퇴를 선언한 김일중.
민주당 내에서 김강산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김일중은 탈당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그는 민주당을 나와 창당 의지를 밝혔고, 이로써 양 김이 완전히 등을 돌렸다.
선거 패배를 직감하고 있던 전인환과 노일영에게는 아주 황금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으리라.
그렇지 않아도 미국에 있는 자금을 끌어와 여러 나라를 거쳐 노일영에게 전달해 주었다. 벌써 투입된 금액만 해도 수십억이 넘는다.
뭔 놈의 욕심이 그렇게도 많은지, 노일영은 돈을 아주 물 쓰듯 쓰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어차피 그 양반이 당선되면, 그때부터 내가 그 양반의 힘을 마음대로 쓸 테니까.
“어. 왔냐?”
“아…. 응.”
내 사무실에는 처음 와보는 거라 그런지, 정식이는 어울리지 않게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뭘 그렇게 어깨에 힘을 넣고 있어. 긴장 풀어.”
“어. 그, 그래야지.”
이렇게 정식이가 내 옆을 지켜주게 되었다.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다. 이놈이 내 옆을 지켜준다면, 어디 가서 죽을 일은 없을 거다.
“그나저나 진짜 출세했네. 이렇게 넓은 사무실이라니…. 설마 여기 건물도 네 거야?”
“내 건 아니고, 화진파 소유지.”
“아…. 아무튼, 네가 관리한다는 거네?”
“뭐. 일정 구역은 화진파에서 관리하고 있어. 내가 여기 여의도 책임자고.”
여의도뿐만이 아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기 무섭게 성일환은 기다렸다는 듯이 여의도부터 시작해 대룡파의 관리 구역이었던 곳까지 맡겨버렸다.
거기다가 대진 건설을 관리하는 일도 던져 주는 바람에, 요즘 많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또한, 미국에 있는 김아름과 강철중에게도 주기적으로 소식을 받으며 지시 사항을 줘야 하는 터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하지만 기쁜 소식이 있다면, 강철중 쪽일 것이다.
마약 판매 루트를 제대로 뚫어 놓으면서 엄청난 수익을 보고 있다.
벌써 수십 개의 차명 계좌에 입금된 돈만 해도 3억 달러가 넘어간다. 이 정도 수순이면 조만간 5억 달러를 돌파하게 될 것이다.
5억 달러라….
실로 어마어마한 양의 돈이 아닌가.
여기서 좀 더 불리면 나라를 통째로 흔들 수 있는 자본력이 갖추어지게 된다.
“그럼… 난 이제 뭐 하면 돼?”
“음. 그냥 내 옆에 따라다니면 돼. 네가 잘하는 건 싸움이잖아? 내가 위험하면 날 지켜주는 거지.”
“보디가드. 뭐 그런 건가?”
“그런 셈이지. 다른 건 시키지 않을 거야. 그냥 내 옆에만 붙어 있으면 돼.”
정식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행이다. 난 또 험한 일 맡기는 거 아닌가 했네. 그렇지 않아도 서열로 보면 내가 막내잖아. 그럼, 밑바닥부터 빌빌 기어야 한다는 거니까. 그게 힘들까 봐 걱정했지.”
험한 일이라.
내 옆을 지키고 있는 게 어쩌면 상당히 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이쪽 세계야, 언제 어디서 뭐가 날아올지도 모르니까.
“뭐, 조직 일이야 언제 뭐가 터질지 모르는 거니까. 항상 경계하도록 해.”
“그래. 그리고 고맙다. 받아줘서.”
고맙기는.
오히려 내가 고맙지.
난 음흉한 웃음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그래도 오늘 너 왔는데 밥이나 한 끼 같이 해야지. 그리고 이따가 우리 애들이랑 인사 좀 나누고.”
“그럴까?”
우린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밖을 나섰다.
축하 기념으로 맛있는 걸 먹어야 할 텐데, 아무래도 이런 날에는 소고기가 딱 이겠지?
* * *
“감사합니다, 형님!”
정식이랑 단둘이 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건물에 있던 조직원들도 같이 딸려오게 되었다. 그동안 내 밑에 있는 조직원들이 전부 모여 회식한 날이 거의 없는 것 같아 계획을 변경한 것이었다.
“괜찮아. 오늘 다들 배 터질 각오하고 먹어. 알겠냐?”
“물론입니다, 형님! 그런데 오늘 소고기 먹는 겁니까?”
“그래.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라.”
스물다섯 명 정도 되려나.
이 정도 인원이면 가게 하나 거덜 내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돈도 꽤 나오겠는데….
“태, 태산아!!”
끼이이익-!!
조직원들을 대동하고 별생각 없이 걷고 있는데, 갑자기 차 하나가 내 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정식이가 날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
“뭐, 뭐야!”
“어떤 새끼가 감히!!”
“저 차, 쫓아!!”
깜짝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조직원들은 버럭 화를 내며 사라져 가고 있는 차를 두 발로 쫓기 시작했다. 난 그런 그들을 불러들였다.
“호들갑 떨지 말고 돌아오라고 해, 다들.”
뭐지.
왜 갑자기 차가 나한테 돌진한 거지.
단순히 운전 실수인가, 아니면….
“괜찮아?”
“아. 고맙다. 정식아.”
“아니야. 그런데 방금 건 진짜 위험했어. 도대체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야?”
뭔가 구린내가 났지만, 깊게 생각해봤자 정답은 나오지 않는다. 나는 정식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별일 아니겠지. 일단 얼른 가서 먹자. 다들 빨리 와.”
“예, 형님!”
나는 조직원들과 함께 자주 가던 한식당에 들어갔다.
다른 식당들은 우리 때문에 제대로 장사도 하지 못할 터. 그런데 이곳은 권용일이 소유하고 있는 곳이라, 우리를 거북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래서 조직원들과 함께 이곳에 와, 두어 번 회식을 하곤 했다.
“아이고, 사장님. 오셨어요?”
“아. 네. 오랜만입니다.”
“호호. 우리 사장님은 언제 봐도 참 잘생기셨단 말이야. 자자. 어서 들어와요.”
중년의 여사장이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 주자, 조직원들도 허리를 접으며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그래요. 다들 와서 앉아요.”
이곳은 권용일의 소유라 따로 보호세를 내지 않는다.
주변 가게에선 보호세를 받고 있긴 하지만, 내가 관리를 맡으면서 보호세를 제외한 비용은 감면해 주는 중이다.
보호세를 내는 것만으로도 불만을 가질 만도 한데, 대부분 지역에서 폭력배들이 보호세 외 것을 거두고 있으니 다들 무감각한 것이다.
그런데 여의도는 다른 지역보다 보호세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
여러 개의 조직이 분산되어 있어 항상 세력 다툼을 하고 있는 지역에선 보호세가 상당히 높다. 왜냐하면, 이 조직 저 조직에서 떼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는 화진파의 구역이 아닌가?
뭣 모르는 깡패들이 이곳에 발을 들였다가 초상을 치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여의도 상권에 있는 소상인들은 화진파를 불만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조직들에게 돈을 갈취당하느니, 차라리 우리한테 보호세를 내고 편안하게 장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게에서 난동을 피우는 놈이 있으면, 경찰보다 우리 조직원들을 찾을 정도니 말 다 했다.
“맛있게들 먹고, 앞으로도 잘해 보자. 그리고 여기는 최정식이라고, 이번에 새로 들어온 우리 식구다. 경서 연합에서 간부역을 맡았고, 내 옆에서 도와준 놈이다. 사실상 식구 생활만 안 했지, 너희들보다 선배일 수 있어. 그러니까 낮잡아 보지 말고. 괜히 그랬다가 이놈한테 죽는 수가 있다.”
이왕 회식하게 되었으니, 나는 정식이를 조직원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다행히 다들 크게 불만을 가지지 않고 대답했다.
“예, 형님!!”
나는 조직원들을 짧게 격려해 주며 잔을 기울였다.
배에 걸신이라도 들어 있는지, 이놈들은 쉬지 않고 입에 고기를 넣었다.
정말 이러다가는 가게가 거덜 나게 생겼다.
“그런데… 형님.”
피식 웃으며 허겁지겁 고기를 먹고 있는 조직원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 김동욱이 조용히 속삭였다.
김동욱은 원래 성일환 밑에 있던 조직원인데, 여의도 일을 맡으면서 성일환이 나 편하라고 보내 준 사람이다.
실무적인 일을 잘하는 편이라, 나는 김동욱을 비서처럼 쓰고 있다.
“아까 그 차 말입니다.”
날 칠 뻔한 그 차를 말하는 건가?
“그게 왜?”
“아무리 봐도 너무 고의성이었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돌진했으니까요. 분명 길을 건널 때만 하더라도 차가 없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것을 보면….”
“일부러 나를 노렸다?”
“예. 그렇게밖에 설명이 안 됩니다.”
나를 노렸다고?
도대체 누가?
설마, 이진용이 보낸 건가?
“진용이 형님이라면 이런 방법을 쓰진 않았을 겁니다.”
가끔 보면 김동욱은 내 생각을 잘 읽는 것 같다.
“이진용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짓을?”
“오성파일 수도 있고… 아니면 형님한테 원한이 있는 사람이 한 짓일 수도….”
내게 원한이 있는 사람이라.
내가 깡패 짓을 하고 있긴 하지만, 나한테 원한을 질 사람이 누가 있지?
그럴 만한 놈은 벌써 다 제거를 했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문득 얼굴 하나가 뇌리에 스쳤다.
잠깐만.
혹시 그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