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지독한 놈 (2)
“정신이 좀 드십니까?”
“여, 여기는….”
정신을 차린 김민식 사장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삭막하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조직원들과 쾌쾌한 먼지 냄새가 가득한 창고 내부일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양팔을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편하게 말 좀 나누려고 자리를 옮겼습니다.”
회사에서 그 난동을 피웠으니, 곧 오성파에서 입질이 올 것이다.
지금쯤 그들도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갈지 걱정하고 있을 터.
군부의 손을 빌리자니, 정권의 항복 선언으로 지금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대진 건설을 돕기 위해선 화진파와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는 건데….
글쎄. 과연 오성파가 그런 도박을 하려고 할까?
난 아니라는 데에 걸겠다.
“김민식 사장님. 여기서 당신을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 똑바로 들으세요.”
“….”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대진 건설은 우리 화진파가 인수할 겁니다. 하지만 사장님이 좀 더러운 짓을 해 주신 덕분에, 저희가 여기서 잘못 치고 들어가면 모두 덤터기를 써야 한다는 건 아시죠?”
김민식은 내 말에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자신이 저지른 온갖 비리를 어찌 모르겠는가.
“우리가 그걸 책임질 의사는 없습니다. 하지만 건설사는 인수를 해야겠고…. 그래서 생각해낸 게 하나 있습니다.”
난 옆에 있던 조직원에게 손을 까닥였다. 그러자 종이 한 장과 펜 하나를 김민식 앞에 놓아 주었다.
“이게… 뭡니까?”
“뭐겠습니까?”
내 눈을 쳐다보고 있던 김민식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서, 설마 다, 당신들!”
“눈치는 빠르시네요. 그러신 분이 왜 일을 이 지경까지 몰고 가셨습니까?”
“나, 나는 아무 잘못 없어! 그냥 오성파에서 시킨 대로 한 것뿐이야!”
“그래요? 건설사로 돈 빼돌리고, 혼자 주머니 두둑이 채운 것도 오성파가 시켜서 한 일입니까?”
“그, 그건….”
더는 들어 줄 이유가 없다.
난 그에게 마지막 제안을 던졌다.
“결정하세요. 여기서 유서 쓰고 전부 조용히 무덤으로 가져갈지. 아니면 어디 한 번 끝까지 가 볼지.”
“이, 이러지 말고 우리 좋게 대화로 푸는 게 어떻습니까? 굳이 대진 건설이 아니더라도 인수할 곳은 많지 않나요?”
제 목숨 건져보겠다고 대진 건설을 우리더러 포기하라는 건가.
난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사장님이 화진파에 대진 건설을 팔겠다고 하셨잖아요. 이미 그걸로 큰 형님의 마음은 정해지셨습니다. 큰 형님이 한번 결정하신 건 누구도 되물릴 수 없습니다.”
“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김민식 사장. 당신 가족을 생각해. 여기서 당신이 선택 잘못하면 그쪽 가족까지 다 죽는 거야.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하는 게 일 처리가 더 깔끔하지. 그런데 내가 왜 안 하는 줄 알아? 당신 죄는 당신이 지고 가야지. 자식새끼들한테까지 피해 줄 필요는 없잖아?”
자식 이야기가 나오자 김민식은 벌리던 입을 다문 뒤 고개를 푹 숙였다.
“저 혼자 짊고 가면… 가족들은….”
난 흥분감을 가라앉히고 평정심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제가 깡패이긴 하지만, 이런 약속은 꼭 지킵니다.”
내 대답을 들은 김민식은 결심을 했는지 펜을 들고 종이에 뭔가를 써 내려갔다.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으로 인장까지 찍으면서 완벽한 유서를 만들어냈다.
“…이제 어떡하면 됩니까?”
망연자실해 보이는 김민식이 좀 딱해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가 겁도 없이 화진파에게 사기를 치려고 한 순간부터 끝났다고 봐야 한다.
권용일이 이런 작자를 곱게 살려 둘 리 없지 않은가.
차라리 내 손에 조용히 눈을 감는 게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도 훨씬 나을 것이다.
“이미 대진 건설의 주식들은 화진파에서 전부 사 놓았습니다. 곧 주주총회의가 열리게 될 거고, 대진 건설에 쌓여 있는 먼지들을 털어내려고 할 겁니다. 그때 사장님께는 구속 영장이 발부되겠지요.”
“…그리고 전 시체로 발견되는 겁니까? 사인은 자살로?”
“예. 안타깝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피해가 커집니다. 그걸 바라시진 않겠죠?”
김민식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오성파가 시켰다고 스스로 변론을 하긴 했지만, 누가 그런 순진한 말을 믿겠는가.
아무리 오성파의 압박이 있었다고 해도 김민식은 자신이 지은 죄를 전부 화진파에게 덮어씌우기 위해 열심히 협조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자업자득이라는 것.
“데려가. 연락이 가면, 그때 조용히 보내드려라.”
“예, 형님.”
김민식은 조직원들 손에 붙들려 터덜터덜 어디론가 끌려갔다.
난 쓸쓸한 그의 뒷모습을 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 * *
“주주총회?”
“예. 김민식은 이미 처리를 해 둔 상태입니다. 주주총회를 열어서 정식으로 그를 고소하게 되면 대진 건설에 있는 먼지들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주주총회가 열리게 되고 정식으로 고소장이 발부되면 화진파가 뒤집어쓸 오물은 모두 사라지게 된다.
대진 건설이 화진 건설로 완벽하게 탈바꿈된다는 뜻이다.
“그래. 그럼, 그렇게 준비를 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형님.”
겉으로 보면 이진용이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의 속에서 불이 나고 있다는 것쯤은 틀림없으리라.
권용일의 명령으로 내가 조직 전체를 주무르고 있지 않은가?
이번 대진 건설 일도 내가 진두지휘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만일 이진용이 태클을 걸려고 허튼짓을 했다가는 권용일이 가만두지 않을 터.
그렇기에 지금 그가 협조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사케가 담긴 잔을 천천히 들이켜며 나를 불렀다.
“태산아.”
“예, 형님.”
“넌 완전히 나랑 갈라선 거냐?”
술잔 너머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진용의 눈빛이 날카롭기 그지없다, 당장이라도 칼을 꺼내서 나를 찌를 것처럼 노려보고 있다.
난 비워진 그의 잔을 채워주며 대답했다.
“처음부터… 형님과는 걷던 길이 다르지 않았습니까?”
날카롭던 이진용의 눈빛이 서서히 풀리더니, 이내 그는 넉살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새끼. 많이 컸네. 이제 개길 줄도 알고. 발톱을 드러낼 줄도 아는 놈이구먼.”
“언제까지 고개만 숙이고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미소에는 미소가 답 아니겠는가.
이진용은 빙긋 웃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내 잔에도 술을 채워주었다.
“그래. 호랑이 새끼가 계속 승냥이로 살 순 없겠지. 야수의 본능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런데 태산아. 아직 넌 호랑이 새끼야. 새끼가 다 큰 사자한테 덤비면 어떻게 되겠냐? 제대로 반항도 해 보지 못하고 뜯겨 죽는 거야.”
협박을 해 보겠다는 건가.
“이빨 빠진 사자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호랑이 새끼라도 호랑이는 호랑이니까요.”
내가 호랑이 새끼에 불과하다고 내리깔면 넙죽 엎드릴 줄 알았겠지. 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다. 난 오래전부터 이진용과의 전쟁을 준비해왔다.
지금 당장 이진용이 전쟁을 선포한다고 해도 두려울 건 없다. 화진파의 최고 수장인 권용일이 바로 나를 지지하고 있으니까.
“하하. 그거참, 새끼. 말 한번 잘하네.”
이진용은 뭐가 그리 웃긴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잔을 깔끔하게 비웠다. 그리고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살기 어린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네 마음은 잘 알았다. 아무래도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겠구먼.”
“제가 먼저 죽는 일은 없을 겁니다, 형님.”
“허허. 이쪽 세상에 발을 들인 순간, 나이순으로 가는 게 아니야. 간덩이가 부은 놈 순서대로 가는 거지.”
“그런데 그 간덩이 부은 놈들이 항상 기적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겁먹은 꼬맹이처럼 혼자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보단 낫죠.”
예전처럼 이진용의 기분에 맞춰 줄 필요가 없다.
이미 난 재력도 갖추었고, 차기 대통령과의 관계도 넓혀가는 중이다. 더군다나 화진파 내부에서는 권용일이 나를 지지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나와 이진용의 싸움에 권용일을 끌어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리고 권용일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이진용이 먼저 나를 치진 못할 것이다.
“역시, 강단도 있고 그 지독한 면도 참 좋아. 성일환이가 애 하나는 정말 잘 뽑았단 말이지. 내가 그 새끼한테 부러운 거 하나 없다고 생각했는데, 널 보니까 생각이 달라진다.”
“과찬이십니다, 형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구태여 나랑 싸워서 개죽음당할 필요 있어? 차라리 내가 건넨 손 잡아. 그럼, 넌 남 부럽지 않게 살 수 있어.”
난 힐끗 미소를 지으며 사케 잔을 내려놓았다.
“형님.”
그리고 정면으로 독사의 눈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날개 달린 호랑이가 왜 늑대 밑에서 기어 다닐 거로 생각하십니까?”
이진용의 표정이 단번에 달라졌다. 그는 표독스럽게 나를 노려보았다.
“마지막이라고 했다, 태산아.”
“저도 그럼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형님이야말로 제가 건넨 손을 잡으세요. 그럼, 여생은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쯤 되면 저 사케 잔을 나한테 던질 법도 한데, 이진용은 전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참 혀를 내두를 만큼의 평정심이다.
“늦었다. 얼른 돌아가라.”
“…예, 형님.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인가. 하지만 수확은 있었다.
이로써 이진용과 나는 완전히 틀어졌다. 절대 상종할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 둘이서 피 터지게 싸울 날만 남은 것 같다.
그전에 난 내 힘을 더 키워 놓을 필요가 있다.
* * *
이진용은 홀로 방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따라 술이 참 달다. 전혀 쓴맛이 나지 않는 게, 기분이 좋긴 좋은 모양이다.
처음에는 전혀 적수라고 생각하지 않은 어린 꼬마 놈이 여기까지 올라왔다.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에.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랜만에 생긴 호적수에 이진용은 몸이 다 근질거릴 정도였다.
“밖에 누구 있냐?”
“예, 형님.”
이진용의 부름에 달려온 것은, 그의 오른팔 역할을 하고 있는 정우식이었다.
“우식아.”
“예, 형님.”
“그 오성파에 이재욱이한테 연락 좀 넣어라.”
이재욱이라면 오성파에서 두뇌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이다.
갑자기 그자를 왜?
궁금증이 들었으나, 정우식은 이유 따위나 묻는 무례를 범하진 않았다.
“알겠습니다, 형님.”
하지만 직감할 수 있었다.
이진용이 저렇게 실실 웃으며 뭔가를 꾸밀 때는, 항상 재밌는 일이 일어난다는 걸 정우식은 알고 있었다.
과연 저 독사 같은 양반이 이번에는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일까?
* * *
대진 건설 주식을 매집하는 업무를 맡은 건 이진용 쪽이었다. 사실, 대진 건설은 반쯤 내놓은 기업이라 한 주당 몇백원도 하지 않는 동전 값 주식이었다. 그래서 화진파가 대진 건설의 대주주가 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이진용은 곧바로 형식적인 주주총회를 열어 김민식 사장을 고소했고, 갖은 비리에 대한 수사를 요청했다. 하지만 수사는 금방 흐지부지됐다.
김민식이 회사 사무실에서 목을 맨 채로 발견되며 사건이 종결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유서에는 전부 자기 잘못이라는 것과 다른 사람들은 아무 죄가 없다는 내용뿐이었다.
그것을 끝으로 대진 건설은 완전히 화진에게 넘어갔다. 회사 이름도 대진에서 화진으로 바꿔, 새로운 건설 기업 루키가 나타났음을 시장에 알렸다.
“이쪽입니다.”
대진 건설을 성공적으로 인수한 영감에게 축하 인사라도 전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었다.
난 검은 양복을 입은 어깨들의 뒤를 따라가 호텔 맨 꼭대기 층에 있는 스위트룸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백발의 중년 남성 하나가 앉아 있었다.
날 보자마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도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훗날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노일영 대표와의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