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폭풍 속으로 (4)
“또 뵙는군요. 소장님.”
“아,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돈 앞에서는 나이도, 신분도 없다는 걸 오늘에서야 다시금 깨닫는다.
저번에는 반말을 서슴지 않던 양반이, 오늘은 얌전한 강아지처럼 온순하게 대해 주고 있었다.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소장 이필기는 정중함이 묻어나오는 어투로 내게 차까지 권했다.
지금 이 사람과 이 양반이 모시고 있는 노영일이 얼마나 급한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소장님.”
다소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이필기는 자리에 앉아 먼저 운을 뗐다.
“저번에 제안하셨던 거… 아직 유효한지 궁금하군요.”
“변함없습니다. 소장님은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저야 뭐 그런 권한이 있겠습니까?”
자신의 결정이 아닌, 노영일의 결정이라는 걸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군요. 그런데 요즘 상황은 좀 어떻습니까? 들리는 말에는 대부분 대기업이 전부 진보 정당에 손을 뻗었다고 하더군요.”
아픈 곳을 건드리니, 이필기는 인상을 구기며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마십시오. 전부 등을 돌렸습니다. 그나마 천성에서 좀 챙겨주고 있긴 한데, 아무래도 그쪽은 아직 간을 보고 있는 것 같아요. 금양은 아예 손을 뗐고요.”
역시, 천성답다.
한쪽에만 돈을 몰지 않고, 양쪽에 분산시켜 적당히 무게를 재고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금양 그룹은 보수 정당을 완전히 버렸다. 그동안 쌓아온 우정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것이다.
이로 인해 금양 그룹은 두고두고 보수 정당에 공격을 받으며 천성에게 모든 걸 빼앗기지 않던가?
이래서 썩은 동아줄이라도 일단 한쪽에 묶어는 놔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 같다.
아무튼, 지금 노영일은 막바지에 몰린 상태다. 보수 정당 전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아직 조간신문에 실리지 않은 건가.
양김이 서로 등을 돌렸다는 게?
물론, 그들이 등을 돌린다는 뉴스가 전국을 강타해도, 대기업들의 행동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끝까지 양김 중 하나가 대통령이 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고심이 많으시겠군요. 하지만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리턴 컴퍼니와 화진은 노일영 대표님을 적극 지원할 생각입니다.”
“화진… 이요?”
“아. 진작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화진이라면 알고 있으시죠?”
“깡패 아닙니까?”
“예. 하지만 계속 깡패로 남아 있을 곳은 아닙니다. 조만간 건설사도 인수하고, 크게 성장하게 될 겁니다.”
이필기는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리턴 컴퍼니가 화진과 연관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서로 협력하는 겁니다. 조만간 화진도 천성 못지않은 대기업이 될 것이라는 게 리턴 컴퍼니의 판단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노일영 대표님을 전적으로 도와 드릴 것이고요.”
“어차피 화진파는 군부 쪽과 라인이 연결된 곳 아닙니까? 우리나라에서 오성파 다음으로 가장 큰 조직으로 성장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이 천성 같은 대기업으로 변한다라…. 상상하기 어렵군요.”
조직형 기업이라는 개념이 아직 우리나라에는 익숙하지 않은 시대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면, 조직형 기업이 크게 성장하면서 뿌리 깊게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이필기는 화진파라고 해서 거부감을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군부와 조직폭력배는 서로 상생하는 관계였으니까.
“리턴 컴퍼니에서도, 그리고 화진파에서도 도움을 준다면야 든든하겠습니다.”
“예. 그리고… 소장님 차량에 따로 박스를 넣어 두었습니다. 앞으로 일하실 때 돈 쓸 일이 많을 텐데, 그때 유용하게 쓰시면 됩니다.”
이필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세상에서 돈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신세만 지는군요.”
“괜찮습니다. 앞으로 쭉 소장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은 게 우리 회사의 마음입니다.”
“하하. 저도 환영입니다.”
돈도 줬겠다, 이제 이필기에게 일감을 던져 줄 차례다.
“그런데 요즘 오성파가 군부와 손을 잡고 장난질을 하는 것 같던데… 혹시 뭐라도 아는 게 있으신가요?”
“오성파라…. 그쪽은 전인환 계 장성들과 친분이 있죠. 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시국이 완전히 뒤집어진 거. 그래서 장성들도 서로 살겠다며 주변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어요.”
내 생각대로다.
대진 건설로 화진파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던 오성파였다. 하지만 독재 정권이 무너지면서 오성파를 비롯해 군부에서도 대진 건설 일은 완전히 까먹고 있는 상태다.
서로 살길을 여느라 바쁠 때이지 않은가.
지금쯤 오성파는 양김과 어떻게 하면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한참 고민하고 있을 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이필기의 물음에 난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사실, 이번에 화진파가 대진 건설을 인수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쪽에서 이미 누군가가 장난질을 쳤더군요.”
“아. 그렇습니까? 그게 혹시 오성파인가요?”
“그런 셈이죠. 아무래도 군부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일단 화진파에서도 대진 건설 인수를 멈춘 상태입니다.”
“이런…. 그거참 난감하군요. 지금 당장 제가 도와드릴 방법이 없으니….”
이필기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이 일은 이필기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뒤처리가 곤란할 뿐이다.
“괜찮습니다. 당장 급한 일도 아니니까요. 나중에 잘 대표님께 말씀드려 주십시오.”
대통령이 되고 나면 힘을 써 달라는 말이었다. 이필기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다가 색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지 말고 이렇게 하시죠. 다음에 시간을 잡아서 대표님과 따로 만나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대표와 만난다?
그 말은 노일영과의 독대를 주선해 주겠다는 소리다.
역시, 돈을 주니 알아서 이필기가 먹잇감을 내놓는다.
“그렇다면 저야 영광입니다. 언제든 괜찮으니 시간만 알려 주십시오. 그때 꼭 가겠습니다.”
“하하. 대표님께서도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그럼, 제가 조만간 날을 잡아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일이 술술 잘 풀린 것 같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노일영과 만남이라….
차기 대통령이 될 사람의 현재 얼굴이 어떨지, 궁금하던 차였다.
과연 그를 만나서 우린 무슨 말을 나누게 될까?
* * *
[양김, 전쟁을 선포하다.]
큼지막하게 쓰인 신문 헤드라인을 보고 있자니, 참 속이 씁쓸했다.
아주 잠깐이나마 기대를 했던 내가 바보겠지.
역사는 역시 그대로 흘러가고 있다.
민주 항쟁의 영웅이라 불리던 두 사람도, 결국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이라는 걸 본인들이 증명했다.
처음에는 둘 다 아양을 떨며 대통령 자리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을 잘도 공식 석상에서 해댔다. 그런데 가면이 벗겨진 두 사람의 행태를 보라.
숨겨진 내연녀부터 시작해, 숨겨둔 자식새끼가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둘 다 더러운 진흙탕 싸움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싸움이 얼마나 심했던지, 한때나마 둘을 영웅으로 추앙했던 젊은이들까지 다시 보수 정당에 눈을 돌리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민주 항쟁으로 보수 정당을 완전히 끝장낸 사람들이 다시 보수에게 시선을 돌릴 만큼 두 김 씨의 싸움은 그만큼 심각했다.
“확실한 거냐? 오성파도, 군부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게?”
“예. 오성파야 대진 건설 쪽에 뿌려둔 조직원들이 있을 테니 완전히 무신경하게 대응할 순 없을 겁니다. 하지만 군부는 지금 제 살길을 찾느라 바쁩니다.”
권용일은 기분이 좋은지 술잔을 들이켜며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단 말이지? 그거 아주 좋은 소식이구나!”
“예. 그리고… 조만간 노일영 대표와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으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노일영 대표와 만나다니.”
“그쪽에서 먼저 보고 싶다더군요. 그래서 잘 이야기하고 나올 생각입니다. 그리고 대진 건설을 인수하고 나서 묻게 되는 때들은, 그쪽이 나중에 잘 처리해 달라는 말도 잊지 않고 할 생각입니다.”
내 말을 들은 권용일이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도대체 너란 녀석은…. 이번에는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그 양반이 직접 널 만나겠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냐?”
“하하. 원래는 큰 형님께서 만나 보셔야 하는 건데… 죄송합니다.”
“아니야. 내가 그 양반 만나서 뭘 하겠다고. 그냥 나중에 그 양반이 당선되고 나서 나한테 전화 한 통만 해 주면 되는 거야. 고맙다는 말은 들어야지.”
직접 만나는 것보단 전화로 감사를 받는 게 훨씬 좋다는 건가.
차라리 그런 게 나을지도 모른다.
괜히 서로 만났다가 뒷말만 나오고, 계속 이렇게 쭉 전화상으로만 대화하며 서로의 이득을 취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아무튼, 너란 놈은 보면 볼수록 대단하다. 그 양반이 정말 대통령이 되면, 넌 차기 대통령이랑 밥 먹는 사이가 되는 거야.”
“그렇게 되면 화진파에도, 그리고 큰 형님께도 훨씬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허허. 물론이지. 잘했다, 욘석아.”
권용일은 짧게 내 머리를 쓰다듬은 뒤 시가를 입에 물었다.
“이제 거리낄 게 없구먼. 오성파 놈들이 감히 우리 화진파를 건드린 대가가 뭔지 톡톡히 보여 줘야겠어.”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지, 이 영감 눈빛에서 투지가 샘솟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대진 건설 인수하는 거는 전부 너한테 맡기마. 네가 알아서 해.”
“제가… 그래도 되겠습니까?”
“괜찮아. 네가 알아서 해. 그리고 대진 건설에 붙어 있는 오성파 새끼들도 다 치워 버려. 애들 필요하면 간부들한테 다 지시 사항 전달하고. 저번에 내가 말해놨잖아. 네 말이 곧 내 말이라고.”
그 말은 내 마음대로 간부들을 부려먹어도 괜찮다는 건가.
난 터져 나오려는 음흉한 미소를 간신히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형님. 그럼, 힘 좀 쓰겠습니다.”
“허허. 후딱 해결하고 와라. 기념으로 맛 좋은 소고기라도 사 놓을 테니까.”
승리 후에 먹는 소고기라.
이건 마치 식기 전에 적장의 목을 베고 돌아오겠다던 관우가 된 기분이다.
하지만 그 맛은 분명 달콤한 것이다.
* * *
“안녕하십니까, 형님들.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성일환을 비롯해 이진용까지.
총 10명의 고위 간부들과 35명의 행동 대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 중 절반 이상이 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았지만, 몇몇은 나를 존경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여기 모이시게 된 이유는 아직 전해 듣지 못했을 겁니다. 조만간 우리 화진파가 대진 건설을 인수하게 될 텐데, 그전에 대진 건설 내부에 있는 오성파 조직원들을 쳐내야 해서 이리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 말은 오성파와 전쟁을 하겠다?”
불만스러운 어조로 누군가가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오성파와 전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가벼운 충돌로 끝날 수도 있죠. 그건 어디까지나 오성파가 결정할 일입니다. 우리는 그저 대진 건설을 장악하면 됩니다.”
이번에는 다른 곳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게 쉽나? 오성파가 군부와 쇼부 봐서 예전에 인수했어야 할 곳을 아직도 못하고 있는 거잖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군부는 어차피 움직이지 못할 테고, 오성파도 이번 일로 우리와 큰 싸움을 벌일 순 없을 겁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시국이 많이 혼란스럽지 않습니까?”
간부들은 웅성거리며 여러 가지 반응을 보였다.
대다수가 나를 욕하는 건 확실하다.
나이도 어린 게 까분다고 무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그들을 모두 잠재울 만한 방법을 알고 있다.
“이진용 형님. 형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발언권을 이진용에게 넘기자 거짓말처럼 모두 고요해졌다.
이 사람도 내 의도를 알아차린 것인지, 제법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뭐…. 우리 태산이 말이 언제 틀린 적이 있던가? 자네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어차피 길게 두고 볼 일도 아니었잖아.”
항상 그랬듯, 이진용은 넉살스럽게 웃으며 자연스레 대화를 주도해 갔다.
“대진 건설은 큰 형님께서 오래전부터 인수하려고 했던 곳이다. 그런데 오성파 새끼들이 감히 분탕질을 하고 있는 거잖아? 솔직히 군부만 아니었으면 내가 먼저 달려가서 그 새끼들이랑 맞다이 깠을 거야.”
이진용의 말에 간부들과 행동 대장들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도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이 딱 적기지, 안 그래? 우리가 지금 큰 형님의 숙원을 풀어드려야지. 아니면 누가 이런 걸 하겠어. 그렇지?”
“맞습니다, 형님.”
간부들이 동조하자, 분위기도 차츰 바뀌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도끼눈 뜨고들 있지 마. 태산이도 결국 큰 형님이 시켜서 하는 것뿐이잖아. 높은 사람들이 아랫사람을 도울 줄 알아야지, 싸울 생각을 하면 어떡하나?”
“예, 형님.”
단숨에 간부들을 굴복시킨 이진용은 다시 내게 바통을 넘겼다.
“자. 우리 태산이, 아까 했던 말 계속해.”
그리고 그는 슬쩍 가소롭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역시 무서운 사람이다.
하루라도 빨리 저 사람을 제거해내지 못하면 내가 먼저 제거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