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폭풍 속으로 (3)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
확성기를 타고 도시 곳곳에 울려 퍼지는 함성.
1987년 6월 10일.
6월 항쟁이 시작되었다.
“종진이를 살려내라! 한산이를 살려내라!”
갖은 고문으로 두 명의 젊은 투사들이 끔찍한 시체로 발견되면서 항쟁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마치 불에 기름을 던진 꼴이랄까.
전인환 대통령이 대담화를 통해 독재 정권을 계속 이어갈 것을 암시하면서 투쟁의 불꽃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그리고 투쟁의 끝은 민주쟁취였다.
국민의 손으로 직접 독재를 끝낸 것이었다.
[우리 모두 신성한 한 표를 행사할 권리를 간직한 채, 청년은 이상을 향하여 실력을 배양하고, 근로자 농민은 안심하고 일하며, 기업가는 창의적 노력을 더하고, 정치인은 대화와 타협의 묘를 기울여 미래를 설계하는 사회를 이룩해 나갑시다.]
TV로 생중계되는 노일영의 6.29 선언.
독재 정권이 국민에게 백기를 든다는 뜻이었다.
노일영은 자신의 선언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대표직을 내려놓고 물러나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바로 다음 날 청와대는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겠노라 공식 발표하면서 항쟁에 참가한 국민들은 모두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훗날 밝혀진 내용이지만, 전인환 대통령이 일부러 노일영을 시켜 6.29선언을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차기 대권을 위해 철저히 이미지 메이킹에 들어간 것이었다.
속뜻이 어떻게 되었든, 무려 27년 동안 이 나라를 지배해왔던 독재 정권이 끝났다. 드디어 제6공화국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 * *
“다 모였나?”
“예, 큰 형님.”
간부 소집을 하는 건 참 오랜만인 것 같다.
아니. 내가 외국에 있을 때 몇 번 모였다고는 하던데, 내가 참석하는 건 참 오랜만이다.
“그저께 봤지? 그 양반들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우리가 손 모아서 싸바싸바 했던 놈들이 개밥 신세 된 거야.”
간부들의 표정이 별로 좋지가 않다.
여러 가지로 얽혀 있던 군부가 사라지니, 앞으로 큰 변화가 있을 거라는 걸 모두 직감한 것이다.
“큰 형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대로 진보에 손을 돌리실 겁니까?”
저 양반 얼굴도 오랜만에 보는군.
이진용의 말에 권용일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나한테 달린 게 아니야.”
“그러면….”
“태산아. 이제 네가 일어나서 말해 봐.”
모두의 이목이 내게 쏠리기 시작했다.
다들 경계의 눈빛을 띠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오늘 모인 형님들께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화진파는 앞으로도 보수 정당과 그리고 군부와의 관계를 계속 이어갈 겁니다.”
내 말을 들은 간부들이 웅성거리며 가지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권용일이 상을 강하게 내려쳤다.
“뭔 놈의 말이 이렇게 많아! 입 닫고 듣기나 해!”
다시 조용해진 간부들을 한 번 쭉 둘러본 뒤, 나는 말을 이었다.
“이번 사태로 보수 정당이 지대한 타격을 입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차기 대권을 이양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독사의 눈매로 나를 노려보고 있던 이진용의 물음에 난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진보 정당에서 영웅으로 추대 받는 양김을 알고 계실 겁니다. 지금은 둘 다 대통령 자리에 관심이 없다고 내숭을 피고 있긴 하지만, 정말 그럴 거로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양김? 이미 두 사람 다 서로 대통령 자리를 양보하겠다며 공식 발표까지 했어. 그런데 둘이 등이라도 돌린다는 거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봄날입니다. 그런데 정말 두 사람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기회를 놓치려고 하겠습니까? 확실합니다. 둘은 반드시 등을 돌리게 될 겁니다. 그게 바로 사람 욕심이니까요.”
다른 간부들이라면 몰라도 이진용이라면 내 말을 이해했을 것이다. 저 양반도 사람의 욕심이 가진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알지 않겠는가?
똑똑한 사람이니, 절대 미련한 판단은 내리지 않을 터.
“양김이 등을 돌린다는 건 아무래도 말이 안 됩니다. 두 사람이 등을 돌리게 되면 표가 다 갈리게 될 텐데요?”
“맞습니다. 두 사람은 결국 합의를 봐서 한쪽에 표를 몰아주겠죠.”
이진용은 차분하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른 간부들은 길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반발부터 했다. 내가 아니꼽거나, 아니면 현재 여론 전체가 진보에 쏠려 있으니, 당연히 진보의 승리를 점치는 것이리라.
하지만 이 사람들이 간과한 게 하나 더 있다.
많은 사람이 6월 항쟁에 참가를 했지만, 정작 가장 많은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기성세대는 민주주의 항쟁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게 현실이다.
그로 인해 훗날 노일영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고등학생들이 들고일어나 시위를 벌이기까지 한다.
“내가 입 닫고 들으라고 했지!”
권용일이 다시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어수선했단 분위기가 단숨에 정리되었다.
그는 좌우를 둘러보며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이미 난 결정을 내렸다. 태산이 이 녀석 말대로, 우린 보수 쪽에 패를 던진다.”
“큰 형님! 이번 대선 결과는 보나 마나 진보의 압승입니다! 그런데 다 죽어가는 쪽에다가 돈을 거시는 건….”
“어차피 진보가 이기던, 보수가 이기던 군부와의 관계는 철저히 맺어야 해. 그게 우리가 살 방법이다.”
“그럼 진보 정당과 관련이 있는 장성들에게 돈을 걸면 되지 않습니까?”
“제정신이냐? 단결회가 이미 군부를 다 장악하고 있는데, 진보 정당과 관련된 장성들이 있을 거 같아?”
권용일의 말이 맞다.
단결회가 살아 있는 한, 진보 정당에 손을 벌릴 장성은 없다.
군부에서 단결회의 말을 거역하는 건, 대통령의 말을 거역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한 죄로 치부되지 않던가?
물론, 단결회도 점점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전인환 계의 단결회와 노일영 계의 단결회가 서로 나누어져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인환은 임기 말에 언제라도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게, 자신의 사람들로 군 핵심 요직을 채워 넣는다. 하지만 노일영이 대통령에 오르며 속전속결로 그들을 전부 쳐내고, 정권을 제 손으로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여론을 핑계로 전인환을 귀양 보내기까지 한다.
2인자로 평생을 살며 겪은 갖은 수모를 그제야 풀게 되는 것이다.
“큰 형님의 말씀과, 태산이의 말을 듣고 보니….”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진용이 입을 떼면서 간부들은 전부 말문을 닫았다.
“아무래도 두 양반이 등을 돌릴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역시, 이진용은 눈이 밝은 사람이다. 시세를 정확하게 볼 줄 아니까, 나중에 화진 그룹을 통째로 삼키는 것이다.
“뭐…. 진용이 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저도 생각해 보니 두 사람이 등을 돌릴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이진용이 그렇다고 말을 하니, 간부들은 줏대 없이 동의의 뜻을 나타냈다.
지금 간부 중에서 실세가 이진용이라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또 한 가지. 군부와의 관계를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군부와의 관계를 정리하다니?”
“전인환 계의 군부 쪽 사람들과는 이제 손을 끊고, 노일영 계의 사람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겁니다.”
권용일은 짧게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인환 그 양반이 자기 쪽 사람들을 전부 풀어놓고 갈 텐데…. 이렇게 물러났다가는 다 개쪽 된다는 거 뻔히 알고 있을 테니까.”
권용일도 눈치가 백단이다. 전인환이 물러난다고 발표를 하긴 했지만, 순순히 물러날 일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노일영이 그동안 2인자로 생활하면서 쌓인 울분이 꽤 되지 않겠습니까? 원래 전인환과는 동기였으니까요. 그리고 무시도 많이 당해왔다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또 전인환은 저번 대담화에서 노일영을 꼭두각시로 세워 정권을 계속 이어 가겠다는 의중까지 은밀히 드러내지 않았습니까?”
“노일영이가 전인환 뒤통수를 칠 거다?”
“예. 이제 1인자가 되었으니,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원래 그 사람 스타일이 쌓인 원한을 줄곧 숨기고 있다가, 한꺼번에 푼다고 합니다.”
노일영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당했던 걸 끝까지 기억하고 있다가, 나중에 전부 갚아 준다는 건 훗날 밝혀지는 일이다.
실제로 그는 전인환 밑에서 쌓아온 설움을 대통령이 되자마자 전부 폭발시키지 않던가.
“너희들 생각은 어때?”
간부들은 은근슬쩍 이진용의 눈치를 보았다.
저 사람이 예스를 하면 전부 예스를 할 것이고, 노를 하면 전부 노라고 할 것이다.
저번에도 느끼는 거지만, 이진용이 대부분의 간부를 장악했다는 게 확실히 느껴진다. 당장 나도 느끼고 있는 것을 권용일이 느끼지 못할 리 없다.
그런데도 이런 상황을 묵과하고 있다는 건, 장차 화진파를 이끌어 갈 사람은 이진용이라고 생각했던 게 틀림없을 것이다.
“솔직히 뾰족한 수가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둘 중 하나는 선택을 해야겠죠. 그리고 태산이 말을 듣고 보니 일리도 있네요. 하지만 만약 이번 선거에서 양김 중 하나가 된다면….”
또 책임론인가.
이젠 지겹기까지 하다.
“그땐 제가 모든 걸 책임지겠습니다.”
“그래? 하긴. 사람이 말을 했으면 책임을 지긴 해야지.”
음흉한 새끼.
하지만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책임이란 응당 양쪽이지는 것이지 않은가?
“예. 그리고 형님께서도 한 가지 약속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뭘 말이냐?”
“제가 조언을 해 드린 대로 화진파가 움직이기로 했으니, 앞으로 선거가 끝나기 전까지는 여기 계신 모든 형님이 제 지시를 따라야 할 겁니다.”
“뭐, 뭐야?”
사방에서 격한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권용일이 없었다면 칼이라도 꺼낼 기세였다. 하지만 난 거리낄 것이 없지 않은가.
난 나대로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했으니, 저들도 나와 약속을 해야 한다.
“제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건 곧 조직에 반기를 드는 것으로 간주해 처벌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래야 저도 맘 편히 움직일 게 아닙니까?”
“이런 어린놈의 새끼가 어디서 건방지게!”
“네가 제정신이야, 이 새끼야!”
간부들은 아우성을 치며 갖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들을 일일이 상대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내 옆에는 권용일이 있으니까.
“그만.”
“큰 형님! 저 오만방자한 새끼를 두고 볼 생각이십니까!”
“그만 입 닥치라고 했잖아, 이 새끼들아!”
권용일의 호통에 간부들은 잔뜩 움츠러들며 고개를 수그렸다.
“태산이 말이 틀린 게 뭐가 있어? 이번 일에 실패하면 이놈이 모든 걸 책임지겠다고 하잖아. 거기다가 솔직히 말해서 우리 조직이 급성장하게 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 태산이 없었으면 너희들이 지금 돈방석에 앉아 있었을 것 같아? 이런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나이만 처먹어가지고. 쯧쯧.”
역시, 권용일은 내 편을 들어 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태산이 너도 잘 생각해야 할 거야. 이번 일이 정말 실패하게 되면, 우리 조직은 막대한 피해를 본다. 그동안 네가 쌓아왔던 게 전부 무너질 수도 있어.”
쓸데없는 걱정이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권용일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태산이가 내리는 지시는, 내 지시라 생각하고 따른다. 알겠냐?”
“크, 큰 형님!”
간부 중 하나가 반발을 하자 권용일은 무섭게 눈을 치켜뜨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박 사장?”
“…아, 아닙니다.”
“그럼, 입 닥치고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 하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옷 벗고 나가든가. 정 꼬우면 오랜만에 칼춤이라도 춰 볼까? 내가 요즘 나이 들었다고 무시들 하나 보지?”
권용일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간부들이 전부 몸을 쭈뼛쭈뼛 세우며 소리쳤다.
“아닙니다!”
“그래? 너희들 면상을 보니까,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어디 오늘 다 같이 칼이라도 꺼내서 놀아 볼까? 누가 살아서 이 방을 나가나, 어디 한번 보자고.”
“아닙니다!”
날이 선 권용일의 목소리에 간부들은 똥개마냥 깨갱거렸다.
역시, 권용일은 권용일인가.
이진용에게 간부들이 전부 넘어갔다고는 하지만, 권용일이 살아 있는 한 이들 중 누구도 감히 반기를 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진용의 행태를 그냥 묵과해 준 것.
덕분에 나는 앞으로 이 얄미운 양반들을 마음대로 부려 먹을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