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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98화 (98/325)
  • 98화. 폭풍 속으로 (2)

    전인환 대통령이 민정당 대표 노영일에게 정국 주도권을 부여하면서 사실상 정치적 권한은 노영일이 갖게 되었다. 이 일로 훗날 노영일은 대통령에게 정식으로 반발하며 독재정권을 마무리하라는 압박을 가하게 된다.

    폭풍전야가 끝이 나고, 이제 본격적인 폭풍이 불어 닥치고 있었다.

    김강산과 김일중, 진보 정당의 영웅이자 양김으로 불리고 있는 두 사람은 신당 창당을 선언하며 독재 정권과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6월 항쟁이 시작될 조짐을 점점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난 4월 13일이 되기만을 천천히 기다렸다.

    4월 13일을 기준으로 폭풍이 시작될 터.

    제1640호 대통령 특별 담화문.

    난 TV에 나와 대담화를 하고 있는 전인환 대통령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와 함께 본인은 평화적인 정부 이양과 서울 올림픽이라는 양대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합니다.”

    오래전부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야당이 요구했고, 지금은 많은 국민이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전인환 대통령은 서울 올림픽을 핑계로 이를 거부하며 체육관 투표를 계속하겠다고 공표했다.

    체육관 투표가 무엇인가?

    지금처럼 온 국민이 투표권을 갖는 것이 아닌, 지정된 사람만 투표할 수 있는 권한을 받게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조작 선거라는 건데, 이걸 과연 국민들이 받아들이겠는가?

    전인환 대통령의 담화문이 끝나자 방송도 함께 끝이 났다.

    조금 전 저 양반이 한 짓은 화약이 잔뜩 저장된 창고에 화염병을 던진 꼴이었다.

    이제 폭풍이 시작됐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폭풍이.

    * * *

    7년 임기를 마치면 무조건 물러나겠다고 했던 약속과는 달리, 전인환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실권을 유지하기 위해 내각제를 구성하고 있었다.

    자신의 후계자인 노일영을 허수아비 국무총리로 내세워 실권을 장악하겠다는 음모인데, 4.13 담화문이 바로 그 흉계를 드러낸 것과 마찬가지였다.

    국민들이 바보처럼 속기만 할 거라고 생각한 대통령의 치명적인 실수라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어마어마한 역풍이 불어, 결국 27년간 이어온 군부 독재가 막을 내리게 된다.

    현재 시기가 1987년 4월. 앞으로 2개월 남았다.

    이 사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 난 잘 알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소장님.”

    “그래. 생각보다 젊은 사람이었군. 반갑네.”

    소장 이필기.

    12.12 정변의 일원이며 단결회 소속이자 노일영 계의 사람이다.

    노일영이 정권을 잡게 되면 훗날 합참의장을 역임하게 되는, 군부에서는 절대 파워를 휘두르게 될 인물.

    “이렇게 만나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 많은 돈을 내미는데 어찌 만나지 않을 수가 있겠나?”

    정말 돈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가 궁금했다.

    내가 은밀히 이 사람에게 건넨 돈은 2억.

    이 정도면 충분히 흥미를 느낄 만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사람은 노일영의 핵심 멤버이자 두뇌 역할을 하게 될 사람이다.

    단순히 돈만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훗날 노영일 정권이 끝나고 차기 대통령이 될 김강산에게 단결회가 숙청될 때, 유일하게 쥐구멍을 통해 빠져나간 사람이기도 하다.

    “정말 돈 때문에 저를 만나 주시는 겁니까?”

    내 은근한 물음에 이필기는 슬쩍 미소를 보였다.

    “이 사람아. 2억이면 염라대왕이라도 일단은 만나봐야 하지 않겠나?”

    대놓고 액수까지 말하는 것을 보니, 역시 돈 때문이 아니라는 느낌이 왔다.

    과연 그는 내게 잔을 하나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리턴 컴퍼니라…. 미국을 한바탕 뒤집어 놓은 정체불명의 회사가 왜 나를 찾아왔을까? 돈도 돈이지만, 리턴 컴퍼니란 이름을 듣고 도저히 안 만나 볼 수가 없었네.”

    역시 예상대로 이 사람은 리턴 컴퍼니에 대한 존재를 알고 있었다. 나도 그걸 노리고 일부러 리턴 컴퍼니란 이름을 강조해 돈을 넣어 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나한테 돈을 전달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무슨 술수를 부린 건가?”

    난 미소로 화답하며 대답했다.

    “미국 백악관까지 들락날락할 수 있는 게 바로 리턴 컴퍼니입니다. 소장님 주변 사람들이 누군지 파악하고, 그들에게 접근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하하. 솔직하게 말하는군. 그럼, 나한테 접근한 이유는 뭐지?”

    “불순한 의도를 가진 건 아닙니다. 단지, 소장님과 소장님께서 모시는 분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다는 게 우리 회사의 마음입니다.”

    이필기는 표정이 좀 어두워졌다.

    “진심인가? 내가 썩은 동아줄이라는 걸 알 텐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답답했는지 이필기는 담배 한 개비를 물며 대답했다.

    “이번에 대통령이 대담화를 하는 것을 보면서 알았지. 저 양반은 절대 일선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걸. 마치 이방원처럼 상왕으로서 차기 정권까지 휘어잡겠다는 게 빤히 보이지 않던가?”

    생각 외로 이필기도 속내를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만 가면 대화가 잘 풀릴 것 같았다.

    “소장님. 소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번 대담화가 최악의 수가 되었다는 것을요.”

    이필기는 길게 연기를 내뿜으며 슬쩍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조금 전 드렸던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 회사는 조만간 현 정부가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현 정부의 음모라는 것도 알아냈지요.”

    이필기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그는 반밖에 피지 않은 담배를 비비며 내게 몸을 기울였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음모라니?”

    “이번 대담화를 통해서 정부가 개헌은 없다는 걸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그로 인해 지금 사람들이 모든 걸 다 내팽개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그동안 본 적 없는 규모의 시위가 연이어 벌어지고 있죠. 이렇게 가다가는 현 정부가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서?”

    “그래서 현 정부는 한 가지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국민들에게 사실상 항복을 선언하며 국민 투표로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걸 발표할 겁니다.”

    이필기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내게 되물었다.

    “그게 어딜 봐서 음모라는 거지? 누가 봐도 항복 선언이지 않은가?”

    “예. 누가 봐도 항복 선언이죠. 바로 그걸 노리는 겁니다.”

    “그걸 노린다?”

    “예. 정부에서 항복을 선언하는 순간, 민주 투사이자 진보 정당의 영웅인 양김이 서로에게 등을 돌리게 될 테니까요.”

    양김이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마치 전쟁터에 같이 나가 있는 전우처럼 서로를 위하던 두 사람이 등을 돌린다는 건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

    “그게… 가능한 일인가?”

    “물론입니다. 인간의 욕심이란 항상 똑같으니까요. 아무리 영웅으로 추대를 받아도 결국 인간이지 않습니까?”

    내 말에 이필기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네 말대로라면 정말 대통령이 그런 짓을 꾸미고 있다는 건데….”

    사실, 정말 대통령이 그런 짓을 꾸미고 있는지 아닌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난 그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적절히 꾸며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필기는 노일영 계의 단결회 멤버라며 전인환 대통령에게 견제를 받고 있는 신세가 아닌가?

    그는 청와대에서 무슨 작당을 꾸미고 있는지 제대로 아는 바가 없을 것이다.

    “자네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인데.”

    “소장님. 저희는 백악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까지 매일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하물며 청와대라고 다를까요?”

    내 말에 이필기는 적잖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백악관에 이어 청와대까지?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건가?”

    “믿지 않으신다고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 말이 곧 사실이라는 걸 조만간 알게 되실 겁니다.”

    그는 의심쩍은 눈초리로 일단 대답을 했다.

    “좋아. 자네 말을 믿어 보지. 그런데 이상한 건 왜 나를 돕겠다는 거지? 자네 말대로라면….”

    “예. 제 말대로라면 양김이 돌아서게 되고 투표 결과는 아무도 모르게 될 겁니다. 하지만 누구도 보수 정당의 승리를 점치진 않겠지요. 그러나 거리에 나오지 않고 여전히 보수 의식이 깊게 뿌리를 내린 기성세대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보수 정당에 표를 던지면 상황은 급변하게 될 겁니다.”

    “투표로 우리가 이긴다?”

    누구도 노일영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다. 그러나 양김이 서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실망한 국민들이 노일영에게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다. 또한, 이미지 쇄신을 노린 슬로건이 대박을 치면서 영향을 끼친다.

    30년이 지나도 쭉 회자가 되는 ‘나 노일영은 보통사람입니다.’라는 문구가 굉장한 효과를 보게 된 것. 결정적으로 북한 간첩이 우리나라 비행기를 폭파하면서 생긴 안전 불감증이 보수 정당에 표를 몰아주게 되었다.

    그야말로 어부지리로 노일영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이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그렇습니다.”

    “하하. 왜 현 정권이 대통령 직선제를 그렇게 반대하는지 알 텐데? 국민 투표로 대통령을 뽑게 되면 무조건 진보가 다 먹게 되어 있어.”

    계속 부정적으로 나오는 이필기에게 이제 따끔하게 한마디 해 줄 때가 됐다.

    “소장님. 그래서 소장님은 그냥 이대로 포기하실 생각입니까?”

    “뭐?”

    “그렇게 안일한 생각을 가지신 분이라면 저희도 소장님께 투자할 생각이 요만큼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 생각은 확고합니다. 우리 리턴 컴퍼니는 노일영 대표를 전적으로 지원할 겁니다.”

    내 말에 조금 놀랐는지 이필기는 입을 다문 채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계속 말씀이 없으시다면…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하자 그제야 말문이 열렸다.

    “얼마큼 도와줄 생각인가? 정말 우리가 이길 거라고 확신하는 건가?”

    난 웃으며 그에게 확답을 주었다.

    “저희 리턴 컴퍼니는 절대 지는 게임에 베팅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도 그렇고, 대한민국에서도 그럴 겁니다.”

    나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이필기에게 짧게 인사를 건넨 다음, 그의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 * *

    “웬일이냐. 네가 술을 다 먹자고 하고.”

    “그런 일이 있어.”

    난 황규혁이 선물해 준 잔을 전부 꺼낸 다음 하나씩 술을 따라 마셨다.

    내 여의도 사무실에는 처음 와 본 연욱이는 이리저리 구경하느라 바빴다.

    “오늘… 이필기 만났다.”

    그런데 이필기라는 이름이 나오자 연욱이의 안색이 확 달라졌다.

    “이필기라면… 단결회?”

    “그래. 그 이필기.”

    단결회는 군부 독재에 앞장을 선, 군 내부의 사조직이다.

    쉽게 말해서 군부 일진들이 모여 나라 하나를 장악했다는 것이다.

    “시발. 나도 한 잔 줘라.”

    “그래.”

    내 말을 듣지 않아도 대충 알겠다는 듯 연욱이도 술을 들이켰다.

    “설마, 그 새끼들한테 돈 뿌리고 온 거냐?”

    “어. 그랬지.”

    “왜?”

    “왜긴 왜야. 곧 있으면 그놈들이 이 나라의 실세가 되는데.”

    씁쓸한 현실이다.

    맘 같아서는 그놈들이 정권을 잡지 못하게 하고 싶은 게 내 마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혼자서 막을 순 없지 않은가.

    차기 정권은 문제없이 노일영에게 양도될 것이고, 단결회는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이 나라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아직 나에게는 그들을 심판할 힘이 없다. 오히려 그들과 손을 잡고 힘을 키워야 하는 내 처지가 참 서글펐다.

    “백악관에서 그 난리를 쳤을 때만 하더라도 그다지 마음이 무겁진 않았거든. 그런데 그때보다 절반도 안 되는 일을 하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답답한지 모르겠다.”

    “당연한 거 아니냐. 네가 수십 년을 여기서 검사질을 했는데. 왜 화가 안 나겠냐?”

    연욱이는 내 잔에 술을 채워 주며 조용히 말했다.

    “태산아. 우리 그냥 여기서 다 끝내고, 새롭게 시작하자. 너도 지금 더러운 꼴 보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리고 그놈들이랑 손잡고 일해야 하는 것도 역겹고. 네가 제일 역겨워하던 짓을 하려니까 몸이 안 따라 주는 거야.”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제일 혐오하던 인간들에게 돈을 대 주고, 그들과 같이 손을 잡아야 하다니.

    “이제 돌아갈 길은 없어.”

    하지만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었다.

    내 손에 묻은 이 피는 오로지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한 희생이지 않았던가.

    내가 여기서 멈추게 되면 그동안 해 온 모든 것이 다 무(無)로 돌아간다.

    “태산아.”

    “그만. 그 얘기는 그만하자.”

    연욱이도, 그리고 나도.

    이미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기에는 틀렸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정해진 목표에 따라 달려나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여기서 멈추면 또 죽을 것을 알기에,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모두를 짓밟고 올라가는 그 날이 오기까지는.

    그렇게 우리 둘은 밤이 새도록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 술잔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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