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폭풍전야 (2)
“어이구. 바쁜 분이 여기까지는 어인 일로 오셨는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큰 형님.”
여전히 정정한 권용일은 껄껄 웃으며 나를 맞이해 주었다.
“와서 앉아라. 그렇지 않아도 너 오면 주려고 아주 좋은 찻잎을 준비했다.”
권용일이 끓여주는 차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난 소파에 앉아 그가 건네는 잔을 받았다.
“그래. 미국에서의 일은 잘 끝났고?”
“예.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리고… 울진항에서 물건은 아직 안 온 건가요?”
“뭐, 몇 주는 더 기다려야겠지. 거리가 있으니까.”
나도 메데인 카르텔처럼 비행기를 띄워서 마약을 운송해 볼까 싶었지만, 그건 너무 일이 커진다.
밀항이야 항상 해 오던 것이니 비교적 쉽지만, 비행기를 잘못 띄우게 되면 국방부가 북한이 보낸 적기라고 오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미사일이 날아들어 추락하는 비행기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메데인 카르텔은 몇 번 비행기로 마약을 운송을 하다가, 나중에는 잠수함을 이용해 약을 운반하는 대범함을 보였다.
나중에 돈 좀 생기면 러시아 마피아들한테 잠수함이라도 사놔야 하나?
“흠흠. 그런데 말이다. 그, 잘 만났느냐?”
권윤아 얘기를 하는 건가.
“윤아 씨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허허. 그래. 우리 막내딸, 아주 예쁘지? 그놈한테 눈 돌아가는 남자 놈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아마 지금도 넘쳐날 게다.”
확실히 매력적인 여성이긴 하다.
청순함이 주된 무기랄까.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덕분에 주말 동안 재밌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허허. 그 아이도 네가 마음에 든 것 같던데, 자주 만나서 놀아 주고 그래라. 어차피 조만간 그 아이도 한국에 올 일이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나와 권윤아를 정말 이어 주려는 건가.
그게 무슨 뜻인지 이 양반이 모르진 않을 텐데.
“태산아.”
“예, 큰 형님.”
“난 널 믿는다. 그리고 넌 내가 아는 놈 중에 제일 난 놈이야. 그래서 내가 너한테 내 딸을 맡기려는 거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지?”
설마, 그걸 알고도 나한테 막내딸을 보내 주려는 것인가.
“…괜찮으시겠습니까?”
권용일의 막내딸과 내가 결혼을 하는 순간, 나도 권씨 집안의 가족이 된다. 그 뜻은 후계자로 선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뭐, 내 아들 녀석이 나를 대신해서 이 자리에 앉을 것도 아닌데.”
“하지만 큰 형님이 바라보시는 미래의 화진파는 현재의 상태가 아니지 않습니까? 단순히 우리 화진파가 조직폭력배로 남을 거라면 누구든 앉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정식으로 회사를 출범시키고 화진파가 아닌, 화진 기업이 된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권용일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역시, 다른 놈들보다 너랑 말하는 게 항상 편하다니까. 이리도 내 말을 찰떡같이 잘 알아들으니까.”
그리고 다시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내가 정말 화진이라는 회사를 크게 키우게 된다면…. 그땐 다른 재벌 놈들처럼 세습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이 화진이 저런 천성 같은 놈들 밑에서 빌빌댈 뿐이야. 그럴 바에는 화진을 이 나라의 최고로 만들어 줄 사람이 내 자리에 앉는 게 훨씬 나.”
“그게 저라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그래. 아직은 더 너를 지켜보겠다만, 내가 아는 너라면 충분히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된다.”
이 양반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줄이야.
지금 그의 발언은 나를 차기 화진의 주인으로 삼겠다는 뜻이 아닌가?
설마, 권용일이 내게 가진 기대감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를 영원히 아랫사람으로 부려 먹으며, 제의 큰아들에게 화진을 전부 넘겨 줄 거로 생각했는데.
“왜 갑자기 말이 없냐?”
“그게… 워낙 갑작스러워서….”
“허허. 네놈이 놀라기도 하는구나.”
“큰 형님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제가 정말 큰 형님의 자리를 앉게 되는 순간….”
권용일은 다 알고 있다는 듯 내 말을 대신 이었다.
“어마어마한 피바람이 불겠지. 하지만 한 번쯤 일어날 일이야. 어차피 내가 죽으면, 내 밑에 있는 놈들이 가만있을 것 같냐? 서로 칼부림하고 아주 난리를 치겠지. 그런데 그게 계속되면 안 돼. 그랬다가는 화진 전체가 무너져.”
권용일도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자신이 죽게 되면 화진파 내부에서부터 분열이 일어나고, 큰 피바람이 지나간다는 것을. 하지만 그게 너무 심해지면 화진파 전체가 무너지게 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럴 바에는 모두를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을 내세우시겠다는 뜻입니까?”
“그래. 그 게으르고 음흉한 나부랭이들을 한꺼번에 정리할 수 있는 한 사람. 내게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권용일은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난 그게 너라고 믿는다. 사실, 네가 나타나기 전까진 이진용, 아니면 성일환 둘 중 하나가 승리할 거로 생각했다. 아마 승자는 진용이겠지. 일환이는 그놈처럼 치밀하진 못하니까. 그다지 야망도 없고.”
소름이 돋는 통찰력이다.
권용일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인가.
자기가 죽으면 이진용이 성일환을 정리하고, 화진파를…. 아니, 화진 그룹을 장악하게 된다는 것을.
“진용이가 유독 내 큰아들과 가까워. 그놈은 분명 내 아들 녀석을 이용해서 조직을 장악하려 들 거야. 그리고 우리 미련한 아들놈은 허수아비처럼 휘둘려지겠지.”
“그걸 아시고도 이진용을 가까이 두시는 겁니까?”
“이렇게 말하면 내 욕을 하는 거겠지만, 오준이가 기업을 관리할 수 있을 만한 놈은 아니야. 그놈은 그릇부터가 안 돼. 하지만 진용이 옆에 있다면 그런 척이라도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진용이가 능력은 있어. 그놈이라면 내가 키운 걸 말아먹진 않겠지.”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 양반은 정말 생각하는 게 보통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다.
앞선 생각을 한다고 해야 할까.
나는 미래를 알고 있으니 그게 가능하다고 하지만, 이 사람은 나처럼 회귀한 것도 아닌데 모든 걸 다 꿰뚫고 있다.
왜 천성 그룹 회장 이철호가 권용일을 높이 평가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이만한 통찰력이라면, 결코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없으리라.
“성일환 형님만 불쌍해지는 전개군요.”
“뭐, 일환이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쩌겠냐? 사냥개는 주인이 죽으면 솥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 건데. 그렇다고 진용이가 일환이를 죽이기까지 하겠냐?”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내 물음에 권용일은 잠시 침음을 흘렸다.
이진용의 성정이라면 성일환을 백 번 죽이고도 남는다는 것을 어찌 권용일이 모를 수 있을까. 대를 위해선 소를 희생한다는 마음인 것이다.
“아무튼, 지금은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냐? 네가 버티고 있는 이상 일환이가 가만히 죽을 리도 없고.”
그건 모르는 일이다.
나도 권용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를 위해서라면 망설임 없이 소를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쉽게 너한테 모든 걸 넘겨주겠다는 건 아니야. 너도 그 두 손에 무수히 많은 피를 묻혀야 한다. 그래야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거다. 명심해라.”
“명심하겠습니다, 큰 형님.”
이로써 권용일의 마음은 잘 알았다.
그는 내게 모든 걸 넘겨 줄 마음이 있다. 하지만 저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애물이 있고, 그걸 넘기 위해서는 이 두 손에 피를 묻혀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해 주었다.
“상황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법이야. 그러니까 긴장 풀지 말고 있어.”
“예, 큰 형님.”
저 말이 맞다.
아직 마음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화진파 내부에도, 그리고 외부에도 내 적은 널리고 널렸으니까.
“오랜만에 왔는데, 어떠냐? 소고기라도 먹으러 가야지?
* * *
“이야! 얼마만이냐. 이거, 기념으로 소고기라도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권용일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여의도였다.
과연 예상대로 여의도 사무실에 성일환과 황규혁이 같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큰 형님과….”
“이러지 말고 자리 옮기자. 저번에 새로 생긴 소고깃집이 있던데, 거기 맛있더라. 내가 우리 태산이를 위해서 미리 탐방을 해 두었지.”
“저, 저기 형님. 소고기는 어제 큰 형님이랑 같이….”
“아아. 알겠으니까 가자, 가.”
난 성일환과 황규혁 손에 억지로 끌려가 새로 생겼다는 소고기 전문점에 오게 되었다.
“많이 먹어라.”
“꼭꼭 씹어 먹어. 저번처럼 허겁지겁 먹다가 또 체하지 말고.”
“….”
하는 수 없이 난 두 사람이 구워 주는 소고기를 우걱우걱 입안에 넣었다.
새로 생긴 곳이라 그런지 소고기 맛이 아주 좋긴 했다.
“아예 미국에서 안 돌아오는 줄 알았다. 형님들 얼굴은 다 까먹었던 게지?”
그런 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성일환이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황규혁도 덩달아 내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안부 전화라도 했어야지. 버릇없는 놈. 내가 언제 널 그렇게 가르쳤다고.”
“그게….”
“시끄러워. 큰 형님한테는 몇 번 전화했다며? 우리가 모를 줄 알았냐?”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이 양반들 어지간히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나 보다.
“죄송합니다.”
“말은 누가 못해?”
“그러게나 말입니다, 형님. 이놈 특기가 번지르르하게 말하는 거지 않습니까?”
“괘씸한 놈”
“소고기나 더 처먹어라.”
“….”
다음에 미국 갈 일이 생기면 한 번쯤은 꼭 전화를 해줘야 할 것 같다.
일단 얼른 화제를 돌려서 이 위기를 모면해야겠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 화진파에서 건설업 쪽 일을 시작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 잔소리꾼에게는 쉽게 먹힐 일이 아니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그런 밑장빼기 하다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은근슬쩍 넘어가려 하지 마라.”
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성일환이 피식 웃으며 잔에 담긴 술을 들이켰다.
“큰 형님한테 들은 거냐?”
“예. 대진 건설을 인수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자세한 건 두 형님께 들으라며….”
성일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큰 형님께서 단단히 마음을 잡수신 거지. 요즘 상황이 심상치가 않아. 올림픽이다 뭐다 해서, 거리 청소한다고 한바탕 난리도 쳤어. 죄 없는 어린 애들이 복지원에 잡혀가기도 했지. 아무튼, 정부에서는 어떻게든 미국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이러다가 여론 뒤집는다고 우리 깡패 새끼들 잡는 거 아닌지 걱정하시더라.”
현 정부도 국민들 마음이 완전히 돌아서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이번 올림픽 때 어떻게든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이목을 끌려는 것이다. 더불어 미국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만들어, 독재 정권을 계속 이끌어 가려는 것인데….
권용일이 이 정도로 경계한다는 건 분명 뭔가가 있을 터.
“정부에서 뭔가 흘러나온 게 있습니까?”
내 물음에 성일환은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부가 조만간 한 번 난리를 피울 것 같긴 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말이야. 그놈들이 슬슬 벼르고 있다는 게 느껴져. 우리 쪽에도 그런 정보가 넘어왔고.”
성일환의 말대로 지금 당장은 깡패를 쓸어 버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은 그들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연이어 거리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 학생들을 제압하고 거리를 청소한다는 면목으로 불량아들이나, 그쪽과 아무 관련도 없는 아이들을 서슴없이 납치한다. 그리고 복지원 같은 곳에 집어넣기도 하는 것이다.
그 유명한 형제 복지원 사건이 바로 이때쯤 발생하게 된 것.
“아무튼, 너도 각별히 조심해. 그리고 큰 형님이 대진 건설을 인수하시는 대로 아파트 공사에 들어갈 거야. 그러니까 너도 얼른 졸업하고 큰 형님 도와드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 대신 맡고 있는 나와바리들도 가져가서 이제 네가 관리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동안 맡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참나. 누가 보면 지금 당장 가져가는 줄 알겠네. 얼른 졸업이나 해, 새끼야.”
성일환은 구시렁대며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래도 고마운 사람이지 않은가. 내가 맡겨 놓은 구역을 가지려고 들지도 않고, 전부 다시 돌려주려고 하다니.
그나저나 대진 건설 인수라….
화진파가 대진 건설을 인수하는 시점이 86년 중순이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는 게 87년 초다. 하지만 그 전에 넘어야 할 산이 하나 있다.
바로 화진파와 유일하게 맞설 수 있는 라이벌, 오성파와의 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