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또 하나의 체스말 (2)
“근데 정말 19살밖에 안 되셨어요?”
“예. 그렇습니다만….”
“근데 어쩜 저보다 더 어른스러우세요?”
권윤아는 지치지도 않는지 온종일 수다를 떨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게 썩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제가 어려서 좀 그러신가요?”
“아뇨. 그래 봐야 저도 이제 21살인데요?”
권윤아는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다.
“그럼, 줄곧 미국에만 계셨던 겁니까?”
“예. 15살 때부터 미국에서 살았어요. 학교도 여기서 다녔고, 지금은 컬럼비아 대학교에 재학 중이에요.”
컬럼비아라면 미국 뉴욕에 있는 명문대다.
권용일을 닮아서인가, 머리가 좋은 것 같다.
“그건 큰 형님께서… 아니. 회장님께서 자주 말씀하셨어요. 명문대에 다니신다고.”
큰 형님이란 말이 입에 붙어서 큰일이다.
권윤아는 권용일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을까?
“그렇게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저도 아빠가 무슨 일을 하시는지는 대충 아니까.”
권용일이 조직폭력배 두목이라는 걸 안다고?
그렇다면 내가 그 조직에서 나온 사람이라는 것도 분명히 알 텐데?
“그런데도… 저한테 거부감을 보이진 않으시네요.”
아무리 깡패 두목이라고 해도 깡패를 사위로 삼겠는가?
만일 제 딸의 남자친구가 깡패라는 걸 알면 도끼를 들고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아빠라는 존재이지 않은가.
“그만큼 아빠를 믿으니까요.”
하지만 권윤아는 권용일을 믿고 있었다.
“아빠가 사람 보는 눈은 누구보다도 뛰어나거든요.”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는 건가.
둘 다 보통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아빠가 지금은 깡패 두목이라고 손가락질받지만, 조만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될 거라 믿어요. 물론… 욕도 같이 듣긴 하겠지만요.”
그냥 하는 소리인 것 같진 않다.
권윤아는 어렴풋 권용일의 계획을 아는 것처럼 보였다.
저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아는가?
한때 조직폭력배 두목이라고 손가락질받던 권용일이 화진 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게 된다.
화진 그룹에 입사하는 직원들부터 시작해 화진 그룹의 기원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수성가한 권용일의 업적을 대단하다고 칭송하게 될 것이다.
권용일이 사실은 깡패 두목이라는 걸 전혀 모른 채 말이다.
물론, 기업 회장이란 직책이 욕을 바가지로 먹게 되는 자리이긴 하다.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자서전을 주목하고, 그 사람이 내뱉은 말을 다른 사람의 말보다 귀담아듣는 게 인간의 습성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저희 아빠, 잘 도와주셔야 해요? 아빠가 태산 씨에게 거는 기대가 무척 커요.”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까지 마쳤다.
예상했던 대로 첫날부터 힐튼 호텔에 같이 들어가는 불상사가 발생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은근슬쩍 내게 다음 만남을 요청했다.
“다음 주 주말에 혹시 바쁘신가요?”
“아뇨. 아마 괜찮을 겁니다.”
“저기, 그럼….”
난 얼굴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까지 그녀에게 다가간 뒤 말했다.
“윤아 씨가 좋으시다면, 전 언제든 윤아 씨를 만나러 한달음에 달려올 겁니다. 그러니까 꼭 불러 주세요.”
권윤아는 가득 미소를 얼굴에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진, 주말은 심심하지 않을 것 같다.
* * *
훗날 미국 최대의 스캔들로 뽑히게 될 콘트라 사건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언론과 야당, 그리고 여당까지 대통령을 거세게 비난할 정도였다. 레이건의 레임덕이 시작된 것이었다.
결국, 특검이 발의되어 조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여전히 대통령의 입김은 무시할 수가 없는지 흐지부지하며 대충 끝내려는 기색이 강했다. 그에 대해 야당에서 강력한 반발을 했지만, 특검의 입장도 존중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콘트라 사건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올리버 노스가 유언장을 남기고 자살을 했다.
그리고 그 속보는 이틀 전 방송을 통해 퍼져나갔다.
또한, 리턴 컴퍼니의 대표라고 알려진 톰 윈스턴은 실종되어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
한결 일이 편해진 미 정부는 모든 죄를 올리버 노스와 리턴 컴퍼니에 뒤집어씌웠고, 메데인 카르텔까지 같이 엮어 버렸다.
“김아름 씨.”
“예, 사장님.”
“리턴 컴퍼니를 조사하다가 우리 이름이 나오진 않겠죠?”
“예. 거의 유령 회사처럼 운영된 곳이라, 사장님에 대한 흔적을 찾진 못할 겁니다.”
다행히 김아름이 일을 철저히 해 놓은 것 같았다.
어차피 회사를 세울 때부터 내 이름은 한 글자도 그곳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이번 난리가 끝나면, 리턴 컴퍼니는 다시 세울 겁니다.”
“같은 이름으로 하실 건가요?”
“네, 여건이 된다면 그럴 겁니다.”
내 대답을 들은 김아름은 살짝 미간을 좁히며 입을 뗐다.
“꼭 그러셔야 하는 이유라도….”
“우리 회사의 모토가 뭔지 아세요?”
김아름은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알려준 적이 없으니, 당연히 모를 수밖에.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게 바로 우리 회사의 모토입니다. 꼭 기억하세요.”
“…예, 사장님.”
떨떠름하게 반응한 김아름을 제쳐 두고, 나는 TV 속에서 열심히 자기변호 중인 레이건을 바라보았다. 위대한 대통령으로 뽑힐 수도 있었던 남자의 추락이다.
콘트라 게이트라는 무대.
그 무대 위로 올라간 출연진들.
그들 중에는 희생자도 있고 명예가 추락한 사람도 있으며, 모든 것을 잃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건, 이들의 희생을 통해 이득을 본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희생하는 무대를 만들어 이득을 얻는 자가 곧 세상의 승리자라고 불리지 않던가?
난 그 승리자 무리에 껴있지 못했다는 죄로 죽임을 당했고, 이 시대로 회귀했다.
과연 나는 진정한 승리자인가, 아니면 복수에 사로잡혀 타락한 한 사람에 불과한 것인가.
하지만 내가 죽음을 통해 한 가지 배운 건, 승자가 이 세상의 정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난 계속 이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승자가 되기 위해서.
* * *
“하하! 우리의 슈퍼스타가 납시셨군.”
골든 아레나의 사장이자 골든 마피아 소속, 다니엘 멘디 로페즈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슈퍼스타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나는 그와 짧게 악수를 한 뒤, 자리에 앉았다.
로페즈는 내 앞에 잔을 하나 놓아주며 말했다.
“복싱계에만 슈퍼스타가 있는 게 아니에요. 이미 라스베이거스 도박꾼들 사이에서는 미스터 김이 전설처럼 여겨지고 있어요.”
“그런가요?”
당분간 아레나에 얼굴을 비춰서는 안 되겠군.
어차피 중요한 경기가 잡힌 게 아니라면 관심이 없다.
“조만간, 빌려주셨던 2억 달러를 갚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요.”
“벌써요?”
“예.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려서요. 그리고 곧 한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래서 인사차 들렸습니다.”
로페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던지며 내게 말했다.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도피라니…. 위쪽에서 열불 내진 않던가요?”
역시, 골든 마피아의 정보망을 무시할 순 없겠다.
난 그에 맞는 답을 주었다.
“사고가 나면 희생자가 생기기 마련이지만, 이득을 보는 사람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이라도 가만히 눈을 감아 주는 거겠죠.”
로페즈는 껄껄 웃으며 내게 상자 하나를 건넸다.
“선물입니다. 다음에 또 미국에 오시면 꼭 이곳에 들러 주십시오.”
상자를 열어 보니 금빛을 반짝이는 카지노 칩이 들어 있었다.
대충 스무 개는 넘는 것 같다.
“이건….”
“금으로 만든 카지노 칩입니다. 미스터 김처럼 귀한 손님에게만 나눠 드리는 골든 아레나의 소소한 선물이랄까요?”
순금이다, 이건가.
그것도 이정도 양이면….
“마음에 드십니까?”
“예. 아주 마음에 쏙 듭니다. 감사합니다, 미스터 로페즈.”
“하하. 아닙니다. 그저 앞으로도 미스터 김과의 관계를 잘 유지 하고 싶군요.”
“제가 특별히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미스터 로페즈가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 아닌지….”
로페즈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백악관을 통째로 조종하고 계신 분이 그렇게 겸손해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다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백악관을 통째로 조종한다라.
그냥 나를 칭찬해 주기 위해 부풀려 말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일까.
일단 안색을 굳히며 모른 척을 해 봤다.
“백악관을요? 제게 그런 힘이 있겠습니까?”
“그런가요? 리턴 컴퍼니의 대표가 이번 콘트라 사건의 핵심 인물로 발표되지 않았습니까? 더군다나 그 대표가 실종되는 바람에 행방이 묘연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미스터 김은 마치 남 일처럼 여유로워 보이시는군요.”
정보를 받은 게 아니라 때려 맞추기를 한 건가?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저 남자는 내가 리턴 컴퍼니 소속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골든 마피아의 정보망은 결코 좁지 않습니다. 미스터 김이 어떤 활약을 보여줬는지 대충 들었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남자는 지금 날 떠보고 있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긴 하지만, 내가 검사 짬을 허투루 먹은 게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저를 떠보시는 것을 보니… 어떤 정보라도 원하시는 겁니까?”
로페즈는 이마를 살짝 때리며 말했다.
“이런. 너무 티가 났나요?”
“그런 건 아닙니다.”
“역시, 미스터 김을 속일 순 없겠군요.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제가 아는 건 거의 없습니다.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백악관이 철통처럼 문을 닫고 있는데. 그저 하는 거라곤 뉴스를 보면서 상황을 추리해 내는 게 전부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는 거 보니, 처음부터 날 속일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미스터 로페즈가 제게 준 선물도 있으니, 그냥 넘어가는 건 염치가 없는 짓이겠죠.”
고작 이런 걸 받았다고 중요 정보를 내놓을 내가 아니다.
로페즈는 정보 하나를 받고자 무려 2억 달러를 내게 건네주지 않았던가?
그만큼 정보라는 건, 시대가 아무리 발전해도 비싼 값을 한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리턴 컴퍼니의 모토는 하나입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겉으로는 리턴 컴퍼니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그렇지 않죠. 그리고 이렇게 미스터 로페즈와 인연을 맺은 이상, 중요한 정보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로페즈는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귀를 쫑긋 세웠다.
“차기 대통령은… 누가 될 것 같습니까?”
“차기 대통령…? 그거야 당연히 메사추세츠 주지사로 역임 중인 마이클 듀카키스겠죠? 대선이 시작되면 우리도 그쪽에 칩을 걸어야 하나 고심하고 있습니다.”
역시, 골든 마피아도 마이클 듀카키스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두 번 메사추세츠의 주지사로 당선된 마이클 듀카키스는 훌륭한 경제 발전을 이루어내며 국민과 언론에 극찬을 받는 중이다. 그리고 그는 1988년에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다.
콘트라 사건으로 인해 선거전까지만 하더라도 당선이 거의 확실시 되지만, 리 애트워터의 네거티브 공략에 무너지고 결국 대통령 자리 코앞에서 좌절한다.
“그렇군요. 콘트라 사건이 크긴 크죠?”
“하하. 야당이 아주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여당에 쏠려 있던 우리 자금도 조만간 야당으로 넘어갈 것 같아요.”
골든 마피아를 잃는 건 여당으로써도 큰 타격일 것이다.
그들은 카지노로 떼돈을 만지고 있지 않은가?
다른 건 다 망해도 카지노 산업은 망하지 않는다는 불문율 하나로, 매일 황금알을 낳는 곳이 바로 골든 마피아다.
하지만 여당을 버리고 야당으로 갈아타게 된다면….
과연 대통령이 된 부시가 이들을 가만히 지켜보겠는가?
“미스터 김은 어떻습니까? 누가 대통령이 될 것 같나요?”
난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듀카키스가 될 것 같군요. 민주당의 압승일 겁니다.”
“그렇죠? 우리도 같은 생각이에요. 아니, 지나가는 꼬마도 듀카키스의 승리를 점칠 겁니다. 공화당이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하겠습니까? 이미 그쪽은 끝났어요.”
로페즈의 말이 맞다. 이미 그쪽은 끝났다. 하지만 삼일 만에 부활한 예수처럼, 공화당은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이다.
리 애트워터의 손길 때문이 아닌, 바로 나의 손길로 인해.
바로 그때, 형제를 배신한 골든 마피아가 어떤 꼴이 될지 벌써 기대가 된다.
이들이 정부의 공격을 받고 처참히 무너질 때, 내 눈앞에 있는 로페즈는 나의 좋은 체스말이 되어 주지 않을까?
부시가 그러했듯, 이 남자도 내 손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